사회

"둘도 없는 효자(孝子)에 지쳐..이혼해"

남형도 기자 입력 2018.09.26. 06:33
음성 기사 옵션 조절 레이어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o i

번역할 언어 선택
글자 크기 조절 레이어
가사 부담, 효도 강요 등에 쌓여 왔던 갈등, 명절 계기로 폭발..고통 알아채 온정(溫井)으로
/삽화=이지혜 디자인기자


결혼 20년차인 주부 김숙희씨(51·가명)는 올해 추석 때 남편과 이혼 얘기가 오갔다. 몸살이 난 와중에 제사 준비, 전 부치기, 과일상, 술상 준비 등을 도맡아 했는데 남편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친척들과 잡담하며 누워서 TV만 봤다.

여기까진 사실상 매년 비슷하게 겪던 일이라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남편이 집에 온 뒤 "시부모에 주는 추석 용돈이 박한 것 같다"고 말해 김씨가 결국 폭발했다. 사실 용돈도 틈날 때마다 드렸던 터. 아내에게는 "아픈데 고생했다"는 말 한 마디 없었다.

김씨는 남편에게 울분을 터트리며 "그냥 이혼하자. 형편도 힘들고, 둘도 없는 효자에 지쳤다. 당신이 해준 게 뭐 있냐. 더 이상 못 살겠다"고 했다. 남편도 홧김에 "그래, 도장찍자"고 해 정말 이혼까지 갈 뻔 했다. 하지만 자녀들이 겨우 말렸다. 김씨는 "넘어간 것 뿐이지, 괜찮아진 게 아니다"라며 "힘든 건 여전하다"고 토로했다.

명절을 계기로 갈등이 극대치에 이르는 부부들이 늘고 있다. 명절이 직접적 원인이라기 보다 그간 쌓여 있던 앙금이 드러난 것이란 분석이다. 갈등의 '결정타'로 작용한 셈. 하지만 해결 방법을 몰라 문제를 키우는 부부들이 다수다. 심하면 이혼까지 가기도 한다.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2016년 접수된 이혼신청은 10만8880건으로 하루 평균 298건이었다. 반면 추석·설날 이후 열흘간은 하루 평균 약 577건이었다. 명절 때 이혼 신청이 평상시보다 2배 많은 것으로 파악됐다.

특히 특히 2016년 설 연휴 직후인 2월11일은 838건, 추석 연휴 직후인 9월19일은 1076건으로 평소의 3~4배에 달하는 이혼 신청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명절 자체가 이혼의 직접적인 계기라고 하기 보단, 이를 계기로 불거지는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실제 돌싱 소셜 데이팅 어플리케이션 '은하수다방'이 이혼 남녀 36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명절이 이혼에 영향이 없거나 거의 없다'고 답한 이가 63%로 과반수를 넘었다. 영향이 있다고 한 응답자는 21.7%였다.

/삽화=임종철 디자인기자


명절을 계기로 드러난 부부 갈등 양상도 다양하다. 주로 젊은 며느리들 위주 하소연이 많다. 과거 자신의 어머니 세대와 다른 생각을 가졌고 참지 않음에도, 시댁이 요구하는 것과는 괴리가 커 갈등이 생긴다.

직장인 이정현씨(31)는 "명절 때 시어머니가 제사를 지내러 하루 전에 오라고 하고, 2박3일 있다가 가라고 했다"며 "그걸 남편이 보고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아 대판 싸웠다"고 말했다. 이씨는 "친정은 대체 언제 가는 것이냐"고 따졌더니 남편은 "명절 때 잠깐인데 그걸 못 참냐"고 해 갈등이 커졌다.

직장인 서모씨(35)도 "친정에서도 엄마가 설거지 한 번 안 시키고 귀하게 컸는데, 명절 음식 차린다고 하루종일 전 부치며 기름 냄새 맡고 있으니 '뭐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며 "남편에게 따졌더니 공감도 못하더라. 결국 싸웠다"고 말했다.

남편들 불만도 있다. 직장인 최모씨(42)는 "명절 때마다 아내 비위 맞추랴, 부모님 눈치 보랴, 중간에서 힘들어 죽겠다"며 "처가에 가면 남편도 불편하긴 매한가지인데, 왜 남성들만 몰아붙이는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부부 갈등의 첫 걸음은 각자 남편·아내가 고통 받고 있다는 걸 인지하는 것이다. 러스 해리스 박사는 저서 '행동으로 사랑하라'에서 "우리 모두는 파트너가 고통 속에 있을 때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무시하거나 일축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며 "이런 반응은 관계를 되살리기 보단 독으로 물들게 한다"고 했다.

이어 그는 "온정은 이런 독성의 해독제"라며 "먼저 파트너가 고통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당신이 가지고 있는 원래의 친절함과 만나야 한다"고 조언했다. 파트너 마음 속에 고통 받는 작은 아이가 있다고 여기고, 이를 위해 생각과 감정을 나눠줄 수 있는지 살펴보라는 것이다.

남형도 기자 hu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