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위안부재단 사실상 해산..'10억엔 처리' 폭탄 남았다

전수진.서승욱 2018. 9. 26.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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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25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를 만나 위안부 피해자 화해치유재단(이하 재단)에 대해 “정상적 기능을 못하고 있다”며 “지혜롭게 매듭지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2015년 박근혜 정부 당시 한ㆍ일 위안부 합의의 결과물로 이듬해 7월 출범한 재단을 사실상 해산하겠다는 뜻을 일본 정부에 전달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25일 오전(현지시간) 미국 뉴욕 파커 호텔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만나 악수하고 있다. [청와대 페이스북=뉴스1]

재단은 지난해 12월 민간 이사진이 전원 사퇴하면서 유명무실화한 상태다. 문제는 일본 정부가 출연한 10억엔(약 99억8200만원)의 처리와 한ㆍ일 관계 향방이다.

재단은 이 10억엔으로 피해자와 유족에 대한 치유금을 지급하는 사업을 해왔다. 이를 통해 생존 피해자 34명과 사망자 58명의 유족들에게 총 44억원이 지급됐다. 결국 일본 정부 출연금의 절반 이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상황이다.

시민단체 등 일각에선 10억엔을 일본 정부에 반환하자고 주장하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크지 않다. 사실상 한ㆍ일 위안부 합의의 파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국가간 외교적 합의를 정부가 먼저 나서서 파기한다면 한ㆍ일 관계를 넘어 국제적 외교 신뢰도 하락이 불가피하다.

청와대도 25일 10억엔 반환을 검토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뉴욕에서 기자들에게 “10억엔을 일본 정부에 반환하겠다는 의사로 받아들여도 되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그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대통령께서 ‘위안부 합의를 파기하거나 재협상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문장에는 10억엔 반환은 들어있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아베 신조 일본총리가 25일 오전(현지시간) 미국 뉴욕 파커 호텔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 환담을 하고 있다. [청와대 페이스북=뉴스1]

10억엔 처리에 대해 전문가들은 “진퇴양난”이라고 입을 모았다. 주일 대사를 지낸 신각수 전 외교부 제1차관은 “일본에 반환하겠다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외교적 고립을 자처하는 것”이라며 “국가간 합의를 국내 정치적 사정으로 사실상 파기하는 격”이라고 비판했다. 일본 전문가인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도 “설사 반환하겠다고 해도 일본 정부가 받을 리가 없다”며 “한ㆍ일 양측이 모두 모르쇠로 일관하며 폭탄 돌리기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에 재단의 사실상 해산을 일본 정부에 밝힌 것은 현실적으로 재단의 운영이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을 인정해달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서울 중구 통일로 주상복합건물에 사무실을 낸 재단엔 임대료 및 인건비로 매달 수천만원의 자금이 들어간다.

26일 서울 중구 화해·치유 재단 사무실에 적막감이 흐르고 있다. 유엔총회 참석차 미국 뉴욕을 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은 25일 오전(현지시간)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한일정상회담을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아베 총리에게 조만간 위안부 화해·치유 재단을 해산할 예정이라고 전달했다. [뉴스1]

일본은 일단 공식 반응을 자제하고 있다. 한ㆍ일 정상회담 결과 브리핑도 청와대 측과는 딴판이었다. 니시무라 야스토시(西村康稔) 관방 부장관은 뉴욕 현지에서 기자들에게 “문 대통령이 (화해치유)재단의 상황에 대해 설명했지만 이 자리에서 발언을 상세히 소개하진 않겠다”라고만 말했다. 아베 총리가 먼저 언급했다고 청와대가 밝힌 강제 징용 문제에 대해서도 기자들이 ‘재판 관련 언급이 나왔느냐‘고 물었지만 니시무라 부장관은 “아베 총리가 (일본의) 기본적인 입장을 말했다. 하지만 이 문제 역시 (이 자리에서) 언급하지 않겠다”고만 말했다. 이처럼 일본 정부는 전체적으로 말을 아끼는 분위기였다. 일본 언론들도 26일자 석간까지는 두 정상의 발언을 그대로 소개하는 데 그쳤다.
26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1354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서 참가자들이 일본 정부의 진정한 사과를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5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열린 한일정상회담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만나 조만간 위안부 화해치유재단을 해산할 예정이라고 통보했다. [뉴스1]

그러나 이는 폭풍 전의 고요다. 양국 관계에 정통한 외교 소식통은 “일본 측은 재단 해체를 위안부 합의 위반이나 사실상의 파기로 해석하기 때문에 내부적으로는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며 “특히 대법원의 강제 징용 피해자 판결과 함께 이 문제가 마치 쌍끌이처럼 양국 관계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2015년 이후 대법원에 계류 중이며 연내 결론이 예상되는 강제징용 피해자 보상 청구 판결 얘기다.

이 강제 징용 문제를 정상회담에서 아베 총리가 먼저 언급했다는 점도 주목된다. 문 대통령은 “지난 정부가 강제징용 관련 재판에 개입을 시도한 정황이 문제가 되고 있다”며 “강제징용 소송 건은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답했다고 청와대 관계자는 전했다. 북·일 정상회담을 추진하고 있는 아베 총리 측으로선 이번 문제의 불씨를 크게 키워 '중재자'로서의 한국과 관계를 크게 불편하게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

앞으로 강제징용 피해자 보상 관련 대법원 판결이 한ㆍ일 관계 주요 가늠자가 될 전망이다. 신각수 전 주일대사는 “핵심은 이미 유명무실해진 화해치유재단이 아니라 강제 징용 관련 대법원 판결”이라며 “결과에 따라 일본은 앞으로 당분간 한국과는 일체 외교적 합의를 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정할 수 있으며, 이는 미국 등과의 관계 설정에서도 문제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박철희 교수도 “현재 일본의 전략은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까지는 침묵을 지키며 두고 보겠다는 것”이라며 “외교 신뢰도 하락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도쿄=서승욱 특파원,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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