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밟은 평양 .. 사람들이 한층 자유로워 보였다

입력 2018. 9. 27. 00:06 수정 2018. 9. 27. 06:28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유홍준 교수 2박3일 북한 방문기
14호 버스에 동승한 문화체육인
젊은 연예인들 '대박!' 감탄사 연발
남북 모두 젊은 세대 감각 이해해야
화사하게 차려 입은 여인들
휴대폰·장마당이 바꿔놓은 거리
'자본' 스며들면 더욱 가까워질까
잊을 수 없는 옥류관 평양냉면
김 위원장 10여분 먼저 나와 환대
미완결 북한답사기 마치고 싶어
바흐의 음악 같은 백두산
구름 한점 없는 정상, 장엄한 천지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물도 고여
문재인 대통령의 북한 방문 이틀째인 지난 19일 평양 시민들이 거리를 지나고 있다. 남자들은 인민복 차림이 많았으나 여성들은 보다 자유롭고 화사해졌다. 변화하는 북한의 오늘을 볼 수 있었다. [연합뉴스]
한가위 명절이 지나갔다. 연휴 기간 유엔총회가 시작됐다. 제2차 미북정상회담도 가시화됐다. 앞서 평양에서 열린 제3차 남북정상회담(18~20일)에 동행한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전 문화재청장)의 북한 방문기를 싣는다. 그는 한마디로 “가슴 뭉클하고, 눈물이 맺히는 여정이었다”고 말했다.

꿈결 같은 2박3일이었다. 역사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제3차 남북정상회담에 특별수행원으로 다녀온 것은 큰 영광이자 행운이었다. 특별수행원이란 특별한 임무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결혼식으로 치면 들러리이고 노래로 치면 백댄서 같아서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할 뿐이다. 가라는 대로 가고, 시키는 대로 할 따름이었으나 이처럼 수동태로 움직인다는 것이 그렇게 행복할 줄 몰랐다. 특히나 휴대폰을 서울공항에 맡겨두고 왔기 때문에 2박3일간 완벽하게 모든 잡사로부터 벗어나는 해방을 누렸다.

우리가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것은 오전 10시였다. 나는 14호 버스에 배정받았다. 14호차라! 특별수행원의 마지막 버스다. 각계를 망라할 때면 으레 문화예술은 이처럼 마지막에 놓이는 것이 관례다. 그러나 나는 이를 서열의 말석이 아니라 마침표라고 자부하고 있다. 우리의 14호차에는 대한체육회 이기홍 회장, 차범근 축구감독, 현정화 탁구감독, 박종아 아이스하키 선수, 안도현 시인, 김형석 작곡가, 최현우 마술사, 가수 알리·에일리·지코, 그리고 대학생 기자 이에스더가 동승했다.

지난 19일 평양 옥류관 오찬 모습. 테이블 위쪽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유홍준 교수. [평양사진공동취재단]
나는 천성이 자유인이고 타고난 친화력이 있어서 구면이라고는 안도현 시인뿐이었지만 순식간에 14호차를 한 식구로 버무려놓았다. 체육계 인사와는 ‘만나 뵈어 반갑습니다’라는 따뜻한 수인사만으로도 가까워질 수 있었지만 젊은 가수들과 동질감을 얻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가수 알리가 ‘복면가왕’에 팝콘소녀로 나와 황금마스크를 쓴 프로를 본 적이 있어서 이를 매개로 나이를 반 꺾어야 또래가 되는 그들과도 금방 교감을 이룰 수 있었다.

우리의 버스가 공항에서 출발하여 평양 시내로 향하는 순간 연도에는 꽃다발을 들고 나온 환영 인파가 끝없이 이어졌다. 어른에서 학생까지, 곱게 차린 한복의 여인부터 인민복의 남성까지 목청껏 ‘평화 통일’을 외치며 우리를 향하여 손을 흔들었다. 북한 방문이 처음이라는 차범근 감독은 열리지 않는 차창에 손을 대고 그들의 환영에 답하면서 내게 부끄럼 빛내며 “왜 이렇게 눈물이 나오는지 모르겠어요”라며 고개를 돌린다. 이에 “이럴 땐 참지 말고 실컷 눈물을 흘리게 내버려 두세요”라고 답하고 나니 나도 눈물이 나왔다.

본래 운동선수들은 생각보다 감성이 여리어 사고가 철학적이다. 이에 반해 연예인들은 감성이 밝고 낙천적인 데가 있다. 젊은 가수들은 그저 ‘대박!’이라고 그들 특유의 감탄사를 발하고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머릿속에서 가늠하는 것 같았다. 이번 특별수행단에 젊은 연예인들이 대거 참여한 것은 통일의 과제를 우리 젊은 세대에게 안겨주는 데 큰 기여를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려호텔에 여장을 풀고 점심을 든 다음 14호차 팀은 김정숙 여사의 옥류아동병원 순방을 수행하게 됐다. 우리의 버스가 평양 시내를 관통하면서 나는 차창 밖으로 거리의 풍광을 유심히 살폈다. 나의 평양 방문은 이번이 네 번째이다. 1997년, 98년엔 중앙일보에 ‘나의 북한 문화유산 답사기’를 연재하기 위해 갔고, 2006년 문화재청장 시절엔 남북장관급 회담의 공식 수행원으로, 그리고 고구려 벽화고분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에 따른 후속조치를 위해 다녀왔다.

20일 백두산 천지를 바라보고 있는 남한의 문화체육인들. 왼쪽부터 탁구감독 현정화, 가수 알리, 시인 안도현, 축구감독 차범근. [사진 유홍준 교수]
20년 전, 처음 평양에 왔을 때의 인상은 규격화된 잿빛 도시였다. 평양 시민들의 옷차림과 표정도 솔직히 말해서 그런 분위기였다. 10년 전에도 사실 그런 인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 본 평양은 대단히 밝았다. 고층건물이 전에 없이 많이 들어섰고, 건물의 외벽을 연분홍빛, 또는 보랏빛으로 맑게 단장하기도 했으며 곡선미를 살린 멋진 건물도 많이 들어섰다. 건물보다 내게 더 눈길이 가는 것은 북한 사람들의 일상생활 모습, 에브리바디(everybody)의 에브리데이 라이프(everyday life)였다.

거리엔 인민복, 교복 차림이 여전히 많았지만 그 사이사이에는 화사하게 차려 입은 여인, 휴대폰을 보면서 걸어가는 사람도 눈에 띄었다. 그들의 걸음걸음에는 제도화된 틀에서 벗어난 자유로움도 느껴졌다. 북한에 휴대폰이 570만대 보급됐고, 장마당이 460 곳 설치됐고, 성과급 제도가 도입되면서 일어난 변화라는 것이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자본’의 생리가 북한 사회에 그렇게 스며들고 이들이 ‘돈’이라는 지독한 바이러스에 면역이 생길 때 우리와 생활 감각이 좀 더 가까워질 것이라고 했다.

북한이 자랑하는 의료시설인 옥류아동병원에 도착하여 김정숙 여사를 기다리는데 이설주 여사가 먼저 와 현관 앞에 서서 영접할 차비를 하고 있었다. 근 10분간을 그렇게 밖에서 기다렸다. 의전을 보면 상대방의 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이번 정상회담에서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자세를 유지했다.

또 우리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작곡한 김원균을 기리며 세운 음악종합대학을 방문했고, 이어 평양대극장에서 환영공연도 관람했다. 공연은 지난번 평창 겨울올림픽 때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보여준 무대와 비슷했는데 우리를 배려하여 ‘아침 이슬’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같은 남쪽 노래도 그네들의 창법으로 불러주었다.

삼지연에서 천지로 가는 길의 이깔나무 숲길. [사진 유홍준 교수]
그리고 목란관에서 환영 만찬이 열렸다. 드디어 14호차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자리이다. 북한 관현악단의 은은한 선율 속에서 식사가 끝나갈 무렵 우리의 무대가 펼쳐졌다. 먼저 에일리가 ‘첫눈처럼 너에게 가겠다’를 열창했다. 북측 인사들은 그저 신기한 듯 경청했다. 그리고 래퍼 지코의 ‘아티스트’에서는 어리둥절해 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알리의 ‘365일’과 김형석의 피아노 연주 ‘아리랑’에 와서야 비로소 감동하는 빛이 보였다. 그것도 감흥이 아니라 이해였던 것 같다. 이 점은 나이 많은 우리 측 수행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 젊은 세대의 감각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핵문제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주탁(헤드 테이블)에서는 요술사 최현우가 움직일 때마다 웃음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내일 원만한 공동선언문이 나올 것만 같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이튿날 우리는 오전에 여사님을 수행하여 만경대 학생소년궁전을 참관하고 점심으로 평양냉면을 먹을 옥류관으로 갔다. 옥류관에서 주탁은 특별수행원인 임동원, 백낙청, 홍석현, 장상, 차범근, 나 그리고 북측 인사로는 김영철 통전부장과 이수용 당외교부장이 배석했다. 두 정상을 맞이하기 위해 일행들이 아래층으로 내려갔는데 김정은 위원장이 10여분 일찍 와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문 대통령은 공동성명문 발표 때문에 예정보다 5분 정도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김 위원장은 무려 약 15분간이나 계속 현관 밖에 서서 기다렸다.

자리에 앉으면서 이설주 여사는 곁에 있는 나에게 서울의 평양냉면에 대해 물었고, 김정은 위원장은 백두산 들쭉술을 화제로 삼았다. 나는 이번에 남측에서 선물한 높이가 6.6m, 폭 4m에 달하는 김정호 ‘대동여지도’의 복제본에 대해 설명해 드렸다. 그리고 나서 내가 함흥에 가보지 못해 북한답사기를 완결 짓지 못하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추사 김정희가 북청으로 유배가면서 만세교를 넘어가던 이야기를 하자 문 대통령은 집안 어른들에게 들은 원산의 군자교 얘기로 받았다. 이어 내가 길주의 북관대첩비 이야기를 하자 김 위원장이 신기해하며 듣는 것을 보고는 문 대통령은 나를 문화유산 전문가라고 다시 소개해주었다.

유홍준
식사 후 문 대통령이 대동강을 보러 베란다로 나가면서 우리들도 따라 나갔다. 그때 자리에 계속 앉아 있던 임동원 이사장님이 들으니 김영철 부장이 김 위원장에게 “저 분이 남측의 3대 이야기꾼 중 한 분입니다”라고 소개하더라는 것이다. 이것이 와전돼 내가 “북한에서도 3대 구라로 통한다”고 퍼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만수대창작사를 방문했다. 여기서 나는 기념으로 ‘자작나무 숲’을 그린 유화 한 점을 샀다. 저녁에 있은 5·1경기장의 집단체조는 상상을 초월하는 환상적인 매스게임이었다. 그리고 문 대통령은 15만 평양 시민들 앞에서 “우리는 5000년을 함께 살아 왔고, 70년을 헤어져 살고 있습니다”라는 역사적인 명연설을 했다. 나도 모르게 가슴이 울렁거리고 눈물이 흘렀다. 나는 이것이 제3차 남북정상회담의 하이라이트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이튿날 우리는 알려진 대로 백두산으로 향했다. 새벽 5시에 호텔에서 출발하니 연도에 또다시 수많은 인파가 어둠 속에서 꽃을 흔들며 환송해주었다. 나는 14호차 식구들에게 백두산의 장엄함을 말하여 금강산이 모차르트라면 백두산은 바흐의 음악 같다고 했다. 가문비나무·이깔나무숲이 한없이 이어지다가 갑자기 황량한 고원으로 들어서고 마침내 정상에 오르면 발 아래로 새파란 천지 못이 장대하게 펼쳐지는 장엄함을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날따라 백두산에는 구름 한 점 없었고 바람도 불지 않았다. 아마도 단군 갑자 이래 가장 맑은 천지에서 남과 북의 두 정상이 맞잡은 손을 높이 치켜들었을 때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다. 그때 14호차 문화예술인 넷이서 나란히 앉아 망연히 천지를 바라보는 뒷모습은 가히 방북을 영원히 기념하는 사진으로 삼을 만하였다. 꿈결 같은 여정이었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