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운의 역사정치] 당나라 깬 양만춘은 가공인물..연개소문 '밀사 외교' 먹혔다
영화 ‘안시성’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안시성 출신으로 주필산 전투에 참여했다가 패잔병이 된 사물은 고구려 최고 권력자 연개소문으로부터 반역자 양만춘을 암살하라는 밀명을 받고 안시성에 잠입합니다. 안시성은 당 태종이 이끄는 대군의 침입을 앞둔 상황, ‘안시성은 어떻게 되느냐’는 사물의 질문에 ‘안시성은 포기하고 모든 병력은 평양성을 지킬 것’이라는 연개소문의 차가운 답변이 돌아옵니다.
중앙 권력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들-고립무원의 처지-연개소문의 양만춘 암살 지령 등은 영화 ‘안시성’의 줄거리를 구성하는 주요 얼개입니다.
답변에 앞서 가벼운 퀴즈를 하나 내보겠습니다. 안시성을 지킨 성주 이름은 무엇일까요? 만약 자신 있게 ‘양만춘’이라고 대답한다면 결과는 ‘땡’입니다.
안시성 전투는 국사 시간에 빠지지 않고 배우는 역사적 사건이지만 이를 둘러싼 주요 ‘팩트’들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645년 당 태종이 이끈 10만 대군과 맞서 80일 동안 안시성을 지킨 주인공은 누구였을까요? 지금부터 사서에 남겨진 기록들을 따라가며 추적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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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성을 지킨 남자
“황제(당 태종)가 백암성에서 이기고 이세적(당 태종의 심복)에게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안시성은 성이 험하고 병력이 정예이며, 그 성주가 재능과 용기가 있어 막리지(연개소문)의 난에도 성을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막리지가 이를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킬 수 없어 (안시성을) 그에게 주었다’… 안시성주가 성에 올라 절을 하고 작별 인사를 하였다. 황제는 그가 성을 고수한 것을 가상하게 여겨 비단 100필을 주고 격려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4년)
『삼국사기』가 전하는 안시성주에 대한 기록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안시성주’라고만 나올 뿐 이름은 물론 출생지나 생몰연도를 비롯해 그가 누구인지 추정할 수 있는 어떤 구체적인 단서도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당 태종은 좀처럼 세상에 나타나기 드문 임금이다. 병력을 운용함에 이르러서는 기묘한 계책을 냄이 끝이 없고 향하는 곳마다 대적할 자가 없었다. 동방을 정벌하는 일에서는 안시성에서 패하였으니 그 성주는 가히 호걸로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에 그 성명이 전하지 않으니 매우 애석하다.”
■ 그러면 안시성주는 왜 양만춘으로 알려졌을까요.
「 '양만춘'이라는 석 자가 처음 등장하는 건 조선 선조 때입니다. 윤근수가 쓴 『월정만필』에는 그가 임진왜란 때 만난 명나라 장수의 말을 빌려 『당서연의』라는 중국 책에 안시성주가 ‘양만춘’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전합니다. 이후 송준길, 박지원 등 학자들이 이를 받아쓰면서 ‘안시성주=양만춘’으로 굳어졌죠. 그런데 『당서연의』는 명나라 시대 출간된 소설입니다. 학계에선 양만춘은 작가가 지어낸 가공의 이름일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실제로 고구려 주요 인물 중 양(梁)씨 성을 쓰는 인물은 없기도 했습니다.
」
안시성을 버린 연개소문?
당나라 측은 속전속결로 진격했습니다. 645년 3월 말 고구려 국경에 진입한 뒤 불과 한 달 반 만에 개모성, 백암성, 요동성 등 고구려의 주요 거점을 차례로 함락시켰습니다. 다음 목표는 안시성이었죠.
이에 연개소문은 6월 21일 북부 욕살(고구려의 지방 장관) 고연수와 고혜진에게 15만 군사를 맡겨 안시성 구원에 나서게 합니다. 안시성마저 무너지면 평양성까지는 오골성 정도만 남아 있을 뿐인데, 이곳은 전력이 약했습니다. 연개소문으로선 얄궂게도 정적과도 같은 안시성 세력을 지켜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죠.
6월 23일 안시성 40리 앞 지점에서 고구려와 당의 정예군 25만명이 뒤엉켜 훗날 주필산 전투로 불리는 건곤일척의 대결을 벌였습니다. 수적으로 우위에 있었던 고구려군은 당 태종의 계략에 빠져 처참하게 패했습니다. "피가 흘러 내가 넘쳐 푸른 물결이 잠깐 사이에 붉게 물들었다. 목을 친 머리가 무덤이 되어 머리뼈로 큰 산을 만들었다." (『전당문(全唐文)』, 7권)
군을 이끌었던 고연수와 고혜진은 당 태종의 길잡이로 전락합니다. “연수와 혜진이 무리 3만 6800명을 거느리고 항복을 청하였다. 군문에 들어가 절하고 엎드려 목숨을 청하니…고연수를 홍려경(鴻臚卿)으로, 고혜진을 사농경(司農卿)으로 삼았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주필산 전투의 패배는 단순한 패배 이상이었습니다. 당시 고구려의 인구 규모를 감안할 때 15만명은 평양성 수비군을 제외한 거의 전 병력이나 다름이 없었을 것입니다. 고구려가 제아무리 군사 강국이라도 더 이상의 군사를 동원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당 태종조차 주필산 전투 직후 "고구려가 나라를 들어 존망을 걸고 왔으나 (내가) 한 번 깃발 들어 패배하니 천우가 나에게 있다"고 기뻐하며 하늘에 제사를 지냈을 정도였으니까요. 누가 봐도 고구려는 풍전등화의 상태였고 안시성은 고립무원에 빠진 셈이었습니다.
이때 뜻밖의 일이 벌어집니다. 6월 말 안시성 앞에 진주한 당나라 군대가 8월 초순까지 약 40여일간 공격하지 않은 것이죠.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당 태종이 주필진에서 고구려 중앙군을 대파했다. 이에 막리지(연개소문)는 말갈인 사절을 설연타에 몰래 파견했다.”
이것은 안시성 전투의 향방을 가른 결정적 한 수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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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변수-초원의 강자 설연타
동아시아 역사를 이해할 때 염두에 둬야 할 것은 북방 유목민족이라는 존재입니다. 중원-북방 민족-한반도의 삼각관계는 청나라 때까지 유기적으로 맞물리며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렸습니다.
예를 들어 고구려의 전성기인 5세기는 북방 민족이 황하 이북을 장악한 5호 16국 시대입니다. 한족과 북방민족이 샅바 싸움을 벌이는 동안 고구려는 만주 일대로 힘을 키울 수가 있었던 것이죠. 반대로 한나라가 흉노를 물리쳤을 때는 창끝을 한반도로 돌려 고조선이 멸망했습니다.
북방 세력도 중원 왕조와 고구려 사이에서 이득을 챙기려 했습니다. 흔히 ‘고구려=군사 강국’을 떠올리지만 실은 고구려의 흥망은 돌궐, 거란, 철륵 같은 북방 세력을 다루는 외교술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진주가한은 이 때문에 낭패를 입었습니다. 폐물 명목으로 말 5만 마리ㆍ소와 낙타 1만 마리ㆍ양 10만 마리를 각 부족에게 거둬들인 뒤 당 태종에게 보냈는데 일방적 혼인 취소로 큰 경제적 손실을 본 것이죠. 리더로서 위신도 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혼인 사기’로 막대한 경제적 손해를 본 진주가한에게 ‘당나라의 주요 병력은 안시성에 집중되어 있으니 지금 당나라 본토를 치면 승리를 거둘 수 있다. 지난번 입은 손해도 우리가 갚아줄 수 있다’는 식으로 꼬드긴 것이죠.
하지만 설득이 쉽진 않았습니다. 당 태종도 설연타의 기습에 대비해 고구려 원정을 떠나며 이 일대에 병력을 배치한 데다 진주가한은 와병 중이었기 때문이죠.
졸지에 두 개의 전선 사이에 놓인 당 태종은 마음이 급해졌죠. 황급히 추가로 군사를 보내 설연타의 군대를 막게 했습니다. 당 태종이 안시성을 눈앞에 두고도 40여일간 움직이지 않은, 아니 움직일 수 없었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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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성을 구원한 40일
긴박했던 645년 여름의 흐름을 정리해보면 보면 이렇습니다. 연개소문 15만명의 안시성 구원군 파견(6월 21일)→주필산 전투 패배(6월 23일)→연개소문이 설연타에 사신 파견(6월 23일 직후)→설연타의 당 공격(7월)→당 태종의 안시성 공격 개시(8월 10일)
설연타 덕분에 안시성은 40일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얻었습니다. 훗날 전개된 전투를 보면 안시성주는 이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고 만반의 준비를 갖췄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병사들도 충원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안시성 전투 중반 “인근 건안성과 신성에 10만명의 고구려 병사가 지키고 있다”는 당나라 측 발언이 나오는데, 주필산 전투에서 생존한 패잔병 상당수가 전선에 다시 합류한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설연타의 첫 공격 시기는 학자마다 의견이 다른데 일부 학자는 7월이 아니라 9월, 그러니까 안시성 철수 직전이라고 주장합니다. 어느 쪽이든 주요 전선이 안시성에서 몽골로 옮겨졌으니 연개소문의 외교 공작은 성공을 거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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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성을 지킨 진짜 주인공
첫머리에 던진 질문에 대해 답할 차례입니다. 안시성을 지킨 주인공은 누구였을까요.
양만춘이라는 가공의 이름으로 남은 안시성주, 그와 함께 성을 지킨 병사들을 가장 먼저 꼽을 수 있지요. 적대 세력인 안시성을 구하기 위해 15만명의 군대를 기꺼이 보내고, 군사력이 바닥나자 기민한 외교술로 대처한 연개소문도 주인공의 한 자리를 차지해야 할 것입니다.
중원 왕조의 갖은 위협 속에서도 700년간 만주에서 존속했던 고구려의 저력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요. 우리가 고구려를 그리워한다면 그 시선은 만주 땅이 아니라 바로 이런 저력에 맞춰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이 기사는 서영교 『연개소문의 對 설연타 공작과 당 태종의 안시성 撤軍- 『資治通鑑』 권198, 貞觀 19년 8·12월조 『考異』의
「實錄」
자료와 관련하여』·『주필산 전투와 안시성』, 김용만 『고구려 후기 고구려, 수ㆍ당, 북방 제국의 대립관계』, 김락기 『17~19세기 고구려 안시성 인식과 ‘城上拜’-
「연행록」
과
「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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