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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원정에 나선 수 양제의 군대, 과연 113만명이 넘었을까

임기환 입력 2018. 10. 04.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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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명장면-55] 612년 봄 정월, 수양제는 고구려 원정군의 출진을 명령하는 조서를 내렸다.

'수서'에 따르면 당시 동원된 수나라 육군은 좌익 12군, 우익 12군 총 24군이었다. 그런데 군사 수가 너무 많아서 한꺼번에 출정하지 못하고, 매일 1군씩을 보내 서로 40리 떨어지게 하되 진영을 이어가도록 해서 앞뒤로 군영 깃발이 960리에 뻗쳤다. 그 뒤를 수양제가 직접 거느리는 어영군 6개 군이 출진하였는데, 이 행렬 또한 80리나 뻗쳤다. 이렇게 하여 40일 만에야 발진이 다 끝났는데, 모두 113만3800명이었다. 여기에 군량을 나르는 자는 그 배가 됐다고 한다.

기록상 113만명이 넘는 고구려 원정군은 역사상 듣도 보도 못한 엄청난 대군이었다. 수문제가 고구려 1차 원정 때 동원한 군대가 30만명 정도였고, 이보다 앞서 수문제가 남조 진(陳)을 정벌하기 위하여 동원한 군대가 52만명 규모였다. 수양제 때에 들어서는 돌궐 등 북방 종족들에게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607년 북방 순수 때 동원한 군대가 50만명이었다. 즉 50만명 정도의 군대 동원이 그때까지 최대 규모의 병력이었다.

그러면 당시 수왕조는 어느 정도의 군대 동원이 가능했을까? 먼저 수문제가 남조를 통일한 후 609년에 파악한 전체 인구 규모가 약 900만호, 4500만명 정도였다. 전통시대에 일반적으로 동원 가능한 최대 군사력 규모는 인구 20명당 1명꼴이었다. 즉 수 왕조는 계산상으로는 200만명이 넘는 군사 동원이 가능한 인구 규모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수치상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로 군대를 동원할 때에는 병력 동원시스템, 징발된 군사들의 이동 거리, 군량 보급 등 수많은 과제가 해결돼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수치상 동원 가능한 군사가 모두 징발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전국 각지와 여러 방면의 국경을 수비해야 하기 때문에 전국의 모든 병력을 한곳으로 집결할 수 있는 상황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수서' 기록에 따르면 단지 군사 113만여 명에 그치는 게 아니라 치중을 담당한 인원이 2배, 즉 200만여 명에 이르렀다고 했다. 위 기록대로라면 무려 300만명이 넘는 대군이 고구려 정벌에 동원된 셈이다. 오로지 고구려 정벌을 위해 이런 규모의 군사 동원이 과연 가능할까? 가능하다고 해도 실제 이런 규모가 동원되었을까? 혹 수양제가 자신의 위엄과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병력 수를 부풀려 과장한 것은 아닐까? 역사상 전무후무한 병력이다 보니, 역사서의 기록이 곧이곧대로 믿기지 않는다. 그래서 여러 연구자들이 위 기록에 보이는 군대의 편제를 통해 실제 동원한 군사의 규모를 추정해보는 연구를 시도했다. 결론은 어땠을까?

수양제

놀랍게도 113만여 명이란 병력 규모는 사실이었다.

'수서'에 따르면 수나라 육군의 편제를 보면 각 군(軍)은 기병, 보병, 치중융차산병(輜重戎車散兵) 등으로 구성돼 있었다. 먼저 기병은 4단(團)이 있고, 각 단은 10대(隊)로 구성되는데, 각 단은 100명이 속해 있었다. 즉 1군의 기병 수는 4000명이었다. 보병도 4단이 있고, 보병의 각 단은 20대로 구성된다. 다만 각 대의 보병 수는 기록이 없어 1군의 보병 수를 8000명, 혹은 1만6000명으로 보는데 기병과 마찬가지로 1대당 100명으로 본다면 8000명일 가능성이 높다. 치중융차산병의 수도 이견이 있지만, 대략 1만3000명으로 이를 합하면 1군의 병력 수는 총 2만5000명으로 구성됐다고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육군이 좌익12군, 우익12군 모두 24군이었으니, 24×2만5000=60만명이다.

여기에 수양제가 직접 거느린 어영군이 6군이었다. 어영군 1군 규모가 어떠한지는 불분명하지만 일단 육군의 1군과 동일하다면 6×2만5000=15만명이다. 그리고 수군(水軍)의 군사 수를 포함해야 하는데, 그 수가 기록돼 있지 않다. 나중에 평양성을 공격하는 수군의 수가 4만명이었음을 고려하면 그 보다 많은 수가 될 터인데, 수군 관련 징발 기사를 보면 대략 7만명 규모로 추정할 수 있겠다.

지금까지 계산한 수를 합하면 82만명에 이른다. 그렇다면 113만3800명이라는 수는 다소 과장된 것일까? 물론 위 계산은 1군 2만5000명으로 계산한 결과이며, 1군을 3만2000명 혹은 3만7000명으로 보는 견해에 따르면 달라질 수 있다. 예컨대 나중에 우문술 등이 거느린 별동대는 9개 군(軍), 30만5000명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대로라면 1군은 대략 33만1000명 남짓한 규모가 된다. 이 수를 적용하면 육군 30군에 100만명 정도의 군사가 된다. 그런데 1군당 2만5000명의 군사는 여러 기록을 통해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고 113만명이 넘는 숫자가 과장됐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수서' 열전이나 금석문 등 사료에는 위에 언급한 24군 이외에 수성도군(遂城道軍), 증지도군(增地道軍), 개모도군(蓋牟道軍), 신성도군(新城道軍) 등 여러 군단 이름이 등장한다. 실제로는 24군 이상의 군단이 편성됐던 것이다. 또 앞서 언급한 기록에서도 매일 1군씩 출진하는데 총 40일이 걸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40개 군단이 편성됐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수양제의 친위군은 1군 규모가 훨씬 더 컸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전체 규모를 보면 34개 군단에 어영군 6개 군, 여기에 수군을 합하면 기록대로 충분히 113만명 이상의 군사가 동원됐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각 군마다 치중 병참부대가 구성돼 있었기 때문에, 200만명이 넘는 군량을 수송하는 인원은 실제 고구려 원정에 동원된 군사라기 보다는 전쟁 준비 과정이나 후방에서 군량지원 등을 담당했던 인원을 가리킨다고 추정된다.

지금까지 수양제가 고구려 원정에 동원한 병력이 기록대로 113만8000명이었다는 점을 확인해 보았다. 다소 장황하게 여러 계산법을 제시한 까닭은 이 숫자가 정말 상상을 넘는 대규모 군사이기 때문이다. 과연 고구려 정벌에 이렇게 어마어마한 병력을 동원할 필요가 있었을까?

당시 고구려의 군사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우선 고구려 인구수를 따져보자. 다른 기록은 없고, 고구려가 멸망할 때 당이 파악한 인구가 대략 70만호 정도였다. 즉 350만명 정도다. 당시 당이 고구려 전지역을 장악한 것은 아니었지만, 가장 많은 인구가 살고 있는 요동과 한반도 서북부 지역을 차지했다. 당에 귀속되지 않은 지역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400만명 전후의 인구로 추정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앞서 계산법대로 동원 가능한 군사력은 20만명 수준이며, 한반도 남쪽에서 백제와 신라를 방어하는 군사력을 제외한다면 그 군사 수는 훨씬 줄어든다. 비상사태에 총력전을 펼친다고 해도 수양제의 군사를 상대할 군사력은 30만명을 결코 넘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통상 전쟁에 있어서 공격군 수가 방어군 수의 3배가 되어야 대등한 전투력을 발휘한다고 한다. 계산상으로 고구려의 최대 방어병력 30만명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90만명이 넘는 군사력이 필요하게 된다. 그렇다면 수양제가 113만명이 넘는 군사를 동원한 것은 나름 합리적인 계산에 따른 전략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고구려의 방어 병력은 요동과 수도 평양성 및 교통로 곳곳에 흩어져 있을 수밖에 없고, 수의 침공군은 몇몇 경로와 거점 공격에 집중할 수 있다. 그렇기에 따지고 보면 수양제의 군사력은 어마어마하게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는 것이다.

중국 대륙을 통일하기 위해 남조 진을 정벌할 때에도 군사 52만명을 동원하였는데, 그 2배가 훌쩍 넘는 군사를 고구려 원정에 동원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그가 고구려의 군사력을 크게 평가했다는 흔적은 없다. 오히려 고구려를 가벼이 여겨 단숨에 원정이 성공하리라 자신했던 듯하다. 그렇다면 수양제는 왜 이렇게 엄청난 군대를 동원했을까? 거기에는 수 양제의 또 다른 야심과 욕망이 자리 잡고 있다고 판단된다. 그의 야욕이 불러온 전쟁의 참화를 앞으로 차근차근 살펴보자.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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