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삶, 나의길] "국악은 한국음악의 결정체".. 대중화 이끄는 전도사

박태해 2018. 10. 5.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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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혜진 국악방송 사장 인터뷰 / 국악과 첫 인연은 / 고1 축제때 가야금 연주반 가입 첫 발 / 국악과 출신으로 '한중연' 첫 입학 기록 / 음악사 등 견문 넓히며 공부재미 빠져 / 학자로 경영자로 활동 / 30년간 평론가·예술감독 등 1인 다역 / 土·日 아침 창덕궁서 궁궐음악회 해설 / 3년째'국악TV 개국 응원..' 모임 활동 / 앞으로 가야할 길은 / 미디어의 변화 흐름서 전통예술은 소외 / 공예·한식 등 포함 전통문화예술TV 시급 / 양질의 문화유산 콘텐츠 자료화도 기대

‘국응사’라는 게 있다. ‘국악TV 개국을 응원하는 사람들’의 약칭이다. 2016년부터 국악인 등 문화예술인은 물론 연예인, 공무원, 학생 등 각계각층 인사들이 국악TV가 생겼으면 하는 바람으로 메시지와 인증샷을 올리며 페이스북에서 활동하는 모임이다. “낚시TV, 반려견TV도 2개나 있는데 우리 고유의 음악을 방송하는 국악TV가 없는 현실이 안타깝고 슬프다. 정부가 나서 개국을 지원해야 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회원 수가 1만4000여 명이니 만만한 모임이 아니다. 국악TV 개국 촉구 서명운동에는 10만여 명이 참여했다. 현재의 국악방송은 FM라디오 방송으로, TV방송이 없다. 국응사의 활동이 3년째지만 낭보는 들리지 않고 있다. ‘국악TV를 누가 보느냐’는 일부의 우려 탓에 매년 기획재정부와 국회 예결위 등의 예산배정 우선순위에서 밀려 고배를 마시고 있다고 한다.

이들 못지않게 국악전문 TV 탄생을 학수고대하는 이가 바로 송혜진(58) 국악방송 사장이다. 국악방송 경영자로서 국악의 대중화와 글로벌화를 위한 국악전문 TV의 필요성을 누구보다도 절감하는 당사자다. 그럼에도 공공기관의 장인 만큼 직접 운동에 나서기보다 국악학자로서 강의와 언론 기고 등으로 조용히 여론조성에 힘을 쏟을 뿐이다. 지난 30여 년간 평론가, 방송작가, 방송진행자, 교수, 연주단 예술감독, 공연해설자로 ‘1인 다역’을 하며 ‘쉽고 친절한’ 국악을 대중에게 알리는 전도사 역할을 해온 이가 바로 그다. 요즘엔 매주 토·일요일 아침에 창덕궁에서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주최로 열리는 ‘궁궐 아침음악회’에서 해설을 담당하고 있다. ‘주말 아침에 누가 국악 들으러 오겠냐’고 생각하겠지만, 마니아들로부터 명품 해설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송혜진 국악방송 사장은 풍부한 전통예술 지식과 경험을 다양하게 응용해 ‘쉽고 친절한 국악’을 대중에게 보급한 국악학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송 사장은 인터뷰에서 “한류드라마의 성공은 영상 매체의 전파가 큰몫을 했다. 국악 등 전통문화예술 역시 영상매체를 잘 활용하면 즉각적이고 빠른 글로벌화와 대중화가 충분히 가능하다”며 “국악을 포함하는 전통문화예술 TV 개국에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서상배 선임기자

4일 서울 광화문의 한 식당에서 그를 인터뷰했다. 국악방송 경영자이자 국악학자로서의 그간의 삶과 국악의 현주소 등에 대해 차분하게 감회와 의견을 피력했다. 국악전문가로서의 자부심도 숨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지나온 곳마다 선명한 족적을 남겼다. 국립국악원 시절 ‘이왕직아악부와 사람들’ 발굴, 국악 FM 방송 설립, 숙명가야금연주단의 인기몰이가 대표적이다.

국악과의 인연이 궁금했다. “뭐가 뭔지 잘 모르고 좋아하다 입문하게 됐어요. 막상 해보니 하고 싶다고 노력한다고 다 잘할 수 있는 건 아니었어요. 전공자의 성향을 ‘풍류 DNA’와 ‘잽이 DNA’로 분류합니다. 월등한 ‘잽이 DNA’ 보유자와 저는 완전히 달랐어요.” 충남여고 1학년 때 가야금 연주단원을 모집 공고를 보고 가야금 연주반에 들어갔다. 재밌고 즐거웠다. 주변에서도 잘한다고 하니 신이 났다. 부모님도 ‘특별한 취미’라며 기특하게 여겼다. 그러나 막상 대학에서 전공으로 삼겠다고 하니 반대했다. 잘하지만 딸의 재능이 가야금을 전공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때 그는 마음을 고쳐먹고 국악 연구자의 길을 생각했다. 서울대 국악과를 졸업한 후 전격적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 진학했다. 국악과 출신의 한중연 최초 입학생이었다. 학부에서 인문대 수업과 동아리에서 훈련받은 독서습관 덕분에 대학원에서도 전공분야인 음악사뿐 아니라 인접학문에 대해 견문을 넓히면서 공부 재미에 푹 빠졌다. 이 시기 동아일보 신춘문예 음악평론 부문에 당선되는 기염을 토했다. 국악전공자로서 일간지 신춘문예 음악평론에 당선된 이도 그가 처음이다.

대학원 시절엔 방송에도 출연하며 방송의 감(感)과 자질을 키웠다. 당시 인기 DJ 김기덕씨가 진행하는 MBC ‘두시의 데이트’에 국악을 소개하는 패널로 2년간 출연했다. “자료도 충분치 않은 상태에서 어렵게 선곡해 들고 가면 어떤 날은 10초 만에 끊고, 어떤 날은 3분도 들어요. 갈피를 잡을 수 없어 마음고생을 많이 했어요. 차츰 김기덕 선생님이 방송에서 허용하는 시간의 의미를 알게 됐어요. 대중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클래식 채널에서의 소통 방식과 반향 정도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당시의 방송 경험을 토대로 그는 1997년 국악전파의 전진기지로서 국악 FM 방송이 필요하다는 제안을 DJ정부에 했고, 실제 방송국 개설 실무도 맡아 지금의 국악방송 개국에 기여했다. 

그의 학자적 집념을 엿볼 대목이 있다. 1989년 국립국악원을 휴직하고 1년간 영국 더럼대 객원연구원생활을 하던 시절이다. 어느 날 이 대학 도서관에서 한국에서는 보지 못했던 특별한 책을 발견했다. 엑카르트 안드레아스라는 이가 펴낸 영문판 ‘Korean Music(London, 1931)’이었다. 이왕직아악부에 소장된 악기와 이왕직아악부 소속 연주원들이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 40여장이 수록된 책을 발견했다. 이왕직아악부는 일제강점기 조선왕조 왕립음악기관의 후신으로 일명 아악부라 불린다. 

이름만 들었던 함화진, 명완벽, 이수경 등 이왕직아악부 시대의 음악인을 이국 도서관에서 흑백사진으로 마주했다. 순간 전율을 느낀 그는 이 시대를 연구하겠다고 결심했다. 더럼대 로버트 프로바인 교수의 도움을 받아 책 속의 자료를 필름에 담았다. 귀국 후에는 당시 생존한 성경린(1911~2008), 김천흥(1909~2007) 선생을 비롯해 이왕직아악부 출신들을 일일이 찾아가 사진과 졸업앨범, 상장, 성적표 등 자료들을 수집했다. 일본에도 건너가 일제강점기에 조선 음악을 연구한 다나베 히사오 후손을 만나 집안에 남아 있는 이왕직아악부 관련 정보를 조사했고 일본 국회도서관, 신문사 소장 자료도 뒤졌다. 

확보한 자료를 국악학자 이혜구, 장사훈 박사가 써 놓은 글, 옛 신문기사들을 찾아 맞춰보면 일제강점기 이왕직아악부 시절의 퍼즐판이 맞춰졌다. 이를 기초로 1991년 국립국악원 개원 40주년을 기념해 ‘이왕직 아악부와 사람들’이라는 사진 전시회와 책자를 발간했다. 그가 기획, 자료수집, 해제, 편집 레이아웃까지 도맡아 진행하며 열정을 쏟아부었던 저작물이었다. “우리나라 음악계에서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탐색해 본 첫 번째 작업이었다. 고된 작업이었지만 학자로서의 희열이 컸다”고 회고했다.


국내 최초의 가야금 오케스트라인 숙명가야금연주단에선 기획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당시 연주단을 설립한 이는 그의 동료이자 대학 동창이었던 김일륜 교수다. 그는 김 교수가 다른 학교로 자리를 옮긴 후 2006년부터 연주단 운영을 맡아 기획·감독했다. 1년 뒤인 2007년 초에 제작된 광고에 숙명가야금연주단과 비보이가 함께 출연한 ‘All for One’은 국악 대중화의 판도를 바꿨다. 

당시 극장에서 상영된 이 광고는 ‘왕의 남자’, ‘괴물’의 잇단 흥행으로 1000만 이상의 관객이 봤다. 이 광고음악은 싸이월드와 휴대전화 컬리링 음원으로 인기를 얻었다. 광고와 동시에 발매한 ‘숙명가야금연주단 베스트콜렉션 FOR YOU’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음반에 수록된 ‘가야금이 비틀스를 만났을 때 Let it be, Obladi Oblada’의 인기는 대단했다. 한동안 KTX에서도 이 음악을 썼다. 비보이와 함께 세계 곳곳에서 초청이 쇄도했다. 국악계 안팎에선 “역시 송혜진!”이라는 소리가 나왔다.

그는 스스로 국악계 비주류라고 했다. 국악인 집안에서 태어난 것도, 국악전문 중등과정을 마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처한 입장이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국악을 ‘외곽에서 보기’, ‘거꾸로 보기’의 관점으로 객관화시켜 보는 데 익숙해졌다. “예술인의 입장이 아니라 향유자의 입장에서 국악의 전통과 예술의 가치를 바라보려고 해요. 그렇게 방송을 하고 글을 쓰고, 해설하고 강의를 했어요. 그러다 보니 어려운 국악이 향유자인 대중에 쉽게 재밌게 전해져 공감과 감동을 주게 돼요.”

그는 국악 TV 개국과 관련해서는 “국악전문 TV에 국한하기보다는 대중성과 시장성을 감안해 국악에다 우리의 공예, 한식, 건축 등을 포함하는 전통문화예술 TV가 현실적으로 필요하다”며 전문가답게 각종 자료를 제시하며 많은 얘기를 했다.

“영상 미디어 진화가 숨이 가쁠 정도입니다. TV와 인터넷, 스마트폰에서 다종다양한 영상 콘텐츠들이 이용자의 오감을 자극해요.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양상 미디어가 현대인의 일상을 어떻게 바꿔 놓을지에 대한 논의도 활발합니다. 그런데도 이 같은 변화의 흐름에서 전통예술의 소외는 심각해요. 4개의 주요 지상파 TV를 포함한 케이블 방송 채널이 400여 개가 넘지만, 전통문화예술 전문채널은 없습니다. 

전통문화예술 TV 채널이 생기면 양질의 전통문화예술 콘텐츠를 확보할 수 있어요. 이 콘텐츠들은 1차적으로 국가문화유산의 아카이빙 자료가 됩니다. 이를 통해 TV뿐 아니라 스마트폰, 컴퓨터 등에서 이용할 수 있는 멀티미디어 생명 환경을 조성합니다. 그렇게 되면 전통문화예술 TV는 전통유산 기록과 영구 보존의 국가적 책무를 하는 한편 다양한 미디어서비스를 할 수 있는 전진기지로서 기능할 수 있어요.”

인터뷰 말미에 당부의 한마디를 했다. “얼마 전 방탄소년단(BTS)이 유엔본부 연설에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물었죠. 국악은 ‘우리는 누구인가’를 말해주는 한국인 음악의 결정체입니다. 잊혀도 좋을 구닥다리 음악이 아니에요. 우리나라 언어는 국어, 우리나라의 역사는 국사, 우리나라의 음악은 국악입니다. 국악 라디오 방송이 3수(修) 만에 설립인가가 난 만큼 전통문화예술 TV도 도전 3년째인 올해 반드시 개국의 소망이 이뤄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많이 도와주세요.”

박태해 선임기자 pth1228@segye.com

■송혜진 사장은
 
△1960년 충남 대덕 출생 △서울대 음대 졸업(1983) △동아일보 신춘문예 음악평론 부문 당선(1987)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문학박사(1995) △영국 더럼 대학교 음악대학 객원연구원(1989∼1990) △국립국악원 학예연구사 및 학예연구관(1989∼2001) △국악방송 편성제작팀장(2001∼2003) △숙명여대 전통문화예술대학원 교수(2001∼현) △숙명가야금연주단 예술감독(2006∼2016)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3기 위원(2010∼2012) △서울문화재단 문화정책위원회 위원(2013∼2015) △KBS국악대상 미디어 출판상(2006) △제4회 관재국악상(2011) △난계악학대상(2016) △저서 <한국 아악 연구>, <한국 악기>, <우리 국악 100년>, <국악, 이렇게 들어보세요>, <청소년을 위한 한국사>, <꿈꾸는 거문고> 등 다수 △(재)국악방송 사장(2016~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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