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레깅스·톱 입은 수십명 함께 구호.. '러닝 크루' 세상 된 한강공원

안영 기자 2018. 10. 6.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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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 조절자가 "앞길 장애물" 외치자, 일면식 없는 러너들이 제창
지난 1일 저녁 서울숲 인근 한강공원에서 본지 기자가 ‘러닝 크루’ 체험을 하고 있다. 20~30대가 중심인 ‘러닝 크루’는 SNS를 통해 매주 모여 한강변을 달리고 사진을 찍어 올린다. / CREW GHOST 제공

인스타그램 피드에 공지가 뜬다. '10월 1일 월요일 19시 50분, 서울숲역 3번 출구.'

지난 1일 저녁 7시 30분, 야구모자를 눌러쓴 후디 차림으로 서울숲역 3번 출구 앞에 섰다. 대기 중이던 크루(crew·팀원)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따라오라' 손짓한다. 서울숲 방향으로 걸었다. 컨테이너 박스 100여 개가 일렬로 늘어선 잡화점 거리에 가로등 불이 꺼지고 사방이 어두워진다. 드디어 서울숲 입구. 건널목 신호가 바뀌고 차들이 멈춰 서자 시야가 탁 트이며 진풍경이 펼쳐진다. '러너(runner·뛰는 사람)' 수십 명이 레깅스와 쇼츠, 브라 톱 차림으로 가볍게 몸을 풀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러너들이 지정된 장소에 모이면 '체크인'이 시작된다. 일종의 '출석 체크'. 참여 횟수를 세고 출발 인원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매주 열리는 러닝에 성실히 참여하면 '정예 멤버'로 인정받을 수 있다. 크루 깃발을 들고 단체 사진을 찍고 나서 준비운동 장소로 600여m 일사불란하게 이동했다. 몸풀기 운동을 마치고 코치로부터 '오늘의 러닝 계획'을 듣는다. 5㎞를 뛰는 초보자 그룹부터 12㎞를 뛰는 숙련자 그룹까지, 각 그룹 페이서(pacer·속도 조절자)와 러너들이 모여 "파이팅!" 구호를 외치면 90여 분 레이스가 시작된다.

지난 1일 저녁 8시 한강변. Why?는 '러닝 크루(running crew)'와 함께 달렸다. 서울숲 입구부터 중랑천을 찍고 성수동1가 아파트 단지 트리마제를 돌아오는 '수변공원 러닝 코스'다. 초심자 그룹에 주어진 거리는 5㎞. 기자는 평생 이만큼 긴 거리를 뛰어본 적이 없는 달리기 초보자다. 네온등 반짝이는 동호대교 교각을 구경하며 지나가는 자전거에 손을 흔들었고, 다른 크루와 마주치면 가볍게 목례를 했다. 앞서가던 페이서들이 손을 흔들며 "장애물 조심!" "보행자 조심!"을 외치면 러너들은 한목소리로 복창했다. 뛰다 멈춰 포즈를 취하고 서로 사진을 찍어주면서 일면식도 없던 낯선 이들이 친해지기 시작한다.

SNS식 '헤쳐 모여'

"인스타그램에 일정이 공지되면, 계정으로 DM(다이렉트 메시지)을 보내 게스트로 참가 신청을 할 수 있어요. 게스트 참여 횟수가 일정 수준 이상 되면 심사를 통해 정규 멤버 자격이 부여됩니다."

참가 공지는 인스타그램 같은 SNS로 이루어진다. 알려준 ID로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내거나 링크에 적힌 구글 DOCS를 통해 신청서를 제출하고 게스트로 참가할 수 있다. 자유 참가자도 받는 개방적 크루뿐 아니라 정규 달리기만 하는 폐쇄적 크루 역시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을 활용해 일정을 공지하고 참가 신청을 받는다. 최근엔 참가 신청 전용 앱을 만드는 크루도 생겼다. 웹 개발자 신철규씨가 주축이 된 'CREW GHOST'는 직접 전용 앱을 개발해 앱으로 참가 신청을 받고 신청자들을 관리한다.

서울시내 러닝 크루는 최근 1년 사이 50여 개로 늘었다. '러닝 크루 원년'인 2014년에 비하면 파죽지세다. 그 이유는 '인스타그램의 성장'과 맞물린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RUNSEOUL' 캡틴 곽태신씨는 "최근 1년 사이 인스타그램에 러닝 바람이 불면서 새 멤버 유입이 늘었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러닝 월간지 '런시티'는 인터뷰하는 러너들 이름 옆에 나이 대신 인스타그램 계정 주소를 적는다. 스포츠 브랜드도 SNS를 공격적 마케팅 창구로 쓰면서 '러닝 크루' 열풍에 기름을 부었다. 스포츠 브랜드 뉴발란스 관계자는 "브랜드 친화도를 올리기 위해 러닝 클럽을 조직해 인스타그램으로 광폭 홍보 중"이라며 "최근엔 러닝에 7번 참여하면 브랜드 로고가 박힌 티셔츠를 증정하는 행사를 진행 중인데 SNS에 '득템 인증샷'을 올리는 사람도 많다"고 했다. 크루들은 유튜브를 활용해 러닝 일지를 기록하기도 하고 북클럽 '트레바리' 등 신규 플랫폼으로 모임을 조직하기도 한다.

새로운 구별 짓기?

"반포한강공원에 저녁 마실을 나가면 5분에 한 번씩 러닝 크루가 지나가요. 몸에 딱 붙는 레깅스와 톱을 입고 구호를 외치며 함께 뛰니 주변 시선이 집중됩니다."

러닝 크루 열풍에는 자신을 관리하면서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욕망이 깔려 있다. 멤버 중엔 '런예인' '런스타' 칭호를 얻으며 인스타그램 스타가 된 이들도 나왔다. "외모 보고 멤버를 선발한다"는 풍문이 돌 정도로 화려한 멤버들이 크루 SNS 계정에 등장한다. 이들 중엔 실제로 모델, 스튜어디스 직군 종사자가 많다고 한다. 초창기 '러닝 바람'을 주도했던 크루들의 활동 반경이 강남 일대에 밀집된 점을 들어 "외모와 주거지 등 '스펙'을 고려해 크루를 선발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다. 하지만 러닝이 대중화되면서 강북에 기반을 둔 WAUSAN30, 수도권 대학 연합 동아리 UCON, 2030 여성이 주축이 된 VIVID LADY 등 크루의 저변이 넓어지고 있다.

최근 크루들은 곧 다가올 '러닝 대축제'를 앞두고 강도 높은 훈련에 돌입했다. 지난 3일 손기정평화마라톤을 시작으로 10월 28일 춘천마라톤(춘마)까지 '러너의 계절' 가을을 수놓는 연례행사 준비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다. '88 SEOUL' 관계자는 "매주 평일 저녁 정기 런 말고도 주말마다 모여 강도를 올려가며 마라톤을 대비하고 있다"며 "특히 '춘마'는 오르막이 많은 난코스에 속하지만 풍광이 훌륭해 이번엔 꼭 풀코스에 도전해볼 생각"이라고 각오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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