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보도 속 A급들 "이름도 없이 사라져간 그들에게 빚졌다" [5공 전사-2화]

유정인·강현석 기자 2018. 10. 8.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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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제5공화국 전사> 속 1980년 5월 ‘학생운동’ 계보도에 적힌 이들은 458명에 이른다. 하지만 신군부 불법에 저항했던 국민은 이들만이 아니었다. 신군부의 비밀책자에 적히지 않은 무수한 시민들이 당시 거리에 나와 계엄해제와 민주주의 회복을 외쳤다. ‘문제학생 조종’ ‘배후’ ‘전남출신 복적생’ ‘A급’ 따위의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다단한 개개인의 삶이 저마다 변곡점을 맞았다. 이 중 많은 이들은 잊혀졌다. 계보도에 올라 있던 일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계보도를 직접 봤다고 말한 사람은 없었다. 동시에 이 문건의 존재에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이들에게 38년 전의 봄날은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 “합수본, 계보 빈자리 내 이름 넣으면 된다 말해”

설훈 민주당 최고위원(65) - 당시 고려대 사학과 2학년 복학생

“고려대 학생운동권 계보를 본 적은 없습니다. 5월17일 예비검속 후 얼마 지나서 합동수사본부에 잡혀 들어갔을 때, 가장 위에 김대중 전 대통령을 적은 계보는 본 기억이 있습니다. 전국 총학생회장 회의 습격 때 빠져나온 신계륜 고대 학생회장이 ‘당분간 잠수하라’고 했는데, 그러고도 3번인가 더 시위에 참여했다가 3번째에 결국 붙들려 갔습니다. 벽에 커다란 계보도를 붙이고는 몇 개 빈자리를 가리키면서 ‘여기 네 이름을 집어넣기만 하면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땐 김 전 대통령을 만나본 적도 없고, 오히려 학생운동권은 정치권을 좀 멀리할 때였어요. 계보도에 제가 ‘A급’으로 적힌 건 유신 때 두 번 징역을 살고 나왔기 때문이 아닌가 해요. 이미 감옥살이도 했고, 고문을 또 받는다 할지라도 절박한 마음이 있으니까 학내 시위에서 학생들이 ‘전두환 물러가라’를 외친 거죠. 너무 많은 희생이 있었습니다. 제가 아니라 광주에서 돌아가신 분들, 고문으로, 의문사로 돌아가신 분들이 기억되길 바랍니다. 그분들의 희생 위에 만든 정말 고귀한 민주주의입니다. 이 고귀한 민주주의의 가치를 잘 지켜나가야 됩니다.”

■ “10·26 이후 완전한 자유는 없을 것이라 직감”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60) - 당시 서울대 정치학과 2학년 복학생
“유신 때부터 중앙정보부와 보안사 요원들이라고 충분히 알아챌 수 있는 사람들이 강의실까지 들어왔습니다. 10·26 이후 완전한 자유가 올 거라고 생각지 않았어요. 1980년 5월부터 신군부가 ‘최후의 한판’을 준비할 것이라는 등 분위기가 하 수상했습니다. 서울 친척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아예 들어가지를 않았지요. 나중에 수배 포스터가 붙더군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수사 결과를 공식 발표하기 전에 붙잡히면 ‘김부겸은 도표 어디쯤에 끼울 것’으로 돼 있다는 이야기가 돌기도 했습니다. 학생들이 가장 중요한 민주화 세력이었다고 하면 과장이겠지만, 민주화 진영에서 중요 동력임은 틀림없었죠. 역사라는 게 그런 것 같습니다. 빛도, 이름도 없이 사라져갔지만 당시 자기에게 주어진 데 온몸을 던진 이들의 피땀이 있는 것이니까요. 지금 정치를 하고 있는 저희는 그분들에게 빚을 진 것입니다. 굴곡진 삶에서 꽃도 못 피운 이들에게 영광이 돌아가야죠. 오늘 서 있는 자리라는 것이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젊은이들도 어려움을 혼자 극복하려거나 자기 문제만 해결되면 된다고 하기보다 ‘우리들’, ‘우리 공동체’의 문제에 눈길을 보내주길 바랍니다.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은 결국 공동체 전체의 것임을 인식하는 게 필요한 것이지요.”
■ “미리 도표 그려놓고 붙잡아간다는 소문 파다”고은광순 솔빛 한의원장(63) - 당시 이대 사회학과 4학년 복학생
“제가 73학번인데, 박정희 유신정권 당시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1975년과 1977년 두 번 구속됐어요. 3학년 2학기에 학교를 짤리고, 박정희가 죽고 난 뒤 복학이 됐죠. 전두환 신군부가 권력을 쥐고 나서 대학가에는 ‘미리 도표를 그려놓고 학생들을 잡아간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새로운 세상이 오는가 했는데 더 악랄한 정권이 등장한 거예요. 저는 복학한 뒤 무슨 일을 한 것도 없이 도망갔어요. 거기 말려들어가면 고문해서 간첩으로 만들어내는 자들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으니, 일단 안 잡히려고 한 거죠. 학교도, 집도 못 가고 지인들 집을 전전하면서 떠돌았어요. 같은 복학생인 최정순(현 서울시의원)은 그때 잡혀갔습니다. 박정희-전두환 정권 아래 보낸 저의 20대를 떠올리면 분노와 함께 억울함이 치밀죠. 사진도 별로 없어요. 친구들과 사진을 찍긴커녕, 주민등록증 사진도 흐릿하게 나온 게 좋다고 했을 때니까요. 정말 깜깜한 시절을 지났습니다. 결국 저는 이대를 떠나서 1984년에 한의대로 진로를 틀었어요. 계속해서 그 당시의 진실들이 밝혀지길 바라고, 진정성 있는 정치가들이 나오길 바랄 뿐입니다.”
■ “고문 후유증으로 돌아오지 못한 그들이 진짜”전여옥 전 국회의원(59) - 당시 이화여대 학보 편집장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학보사 편집장을 맡고 있어서 ‘A급’으로 표시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때 학생들에게 총궐기하라는 내용을 실은 학보를 발행했어요. 헤드라인을 ‘모두 일어나라, 싸워라’고 뽑았던 기억이 납니다. 5월17일 이대에서 전국 총학생회장들이 모인 회의가 열렸는데 군인들이 쳐들어왔어요. 학보사에도 올 테니, 학보들을 막 감췄죠. 곧 군인들이 들이닥쳐 끌려갔습니다. 이른바 닭장차에 오르려는 순간, 어느 교수님이 저를 포함한 학생 세 명을 잡아채서 자기 차에 태워 빼냈어요. 지금 생각하면 영화 속 한 장면 같네요. 한 달을 도망 다녔습니다. 제 나름대로는 당시 위험을 무릅쓰고 맞섰지만 절대 내세우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얘기도 많이 안 해 왔고요. 박정희 유신체제를 끔찍하게 겪는 동안 자신을 송두리째 던진 친구들을 봐 왔기 때문입니다. 재능과 능력을 제대로 펼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일생을 바친 경우가 많았어요. 많은 이들이 고문 후유증으로 제대로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진짜’였다고 생각해요. 겉으로 드러난 사람들보다도 이 ‘진짜’들의 이야기를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영문도 모른 채 보안사에 끌려가 사형선고까지”정동년 전 광주남구청장(76) - 당시 전남대 복학생회 대표
“1980년 5월6일 작성된 조직도에 내가 전남대 학생운동의 주모자로 나온다니 이해가 안 가네요. 당시 나는 한일합방 반대 시위를 주도해 23살 때 제적됐다가 38살의 늦은 나이에 복학했어요. 복학한 친구들이 여럿 있었는데 내가 나이가 많아서인지 언론 등에서 ‘복학생 대표’라고 표현하기는 했지요. 그렇다고 내가 지시하는 위치에 있지 않았습니다. 3월 복학한 후 다른 복학생들과 함께 제대로 된 학생회를 발족시키는 데 힘을 모았고요. 박관현 총학생회장 체제가 출범한 뒤에는 학생운동에서 손을 떼고 후배들에게 맡겼습니다. 그러다가 5월17일 밤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집으로 들이닥친 보안사 요원들에게 영문도 모른 채 505 보안대로 끌려갔어요. 다른 복학생들도 연행돼 있더군요. 5·18민주화운동 동안 보안대에 있었지만 보안사 요원들의 행동에서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구나’ 짐작할 수 있었어요.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서 500만원을 받은 혐의를 인정하라며 갖은 고문도 당했지요.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1982년 12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났지요. 잘못된 역사가 지금이라도 바로잡히기를 바랍니다.”
■ “나와 엮은 조직도 속 인물, 당시 누군지도 몰라”김성용 신부(85) - 당시 남동성당 신부
“전남대·조선대 체계도의 대표로 나오는 정동년씨는 5·18 전까지 알지도 못했어요. 왜 내가 정씨의 배후로 조직도에 등장하는지 모르겠지만 짐작은 갑니다. 1980년 가톨릭농민회 활동에 관여했어요. 내가 주임 신부였을 당시 남동성당에는 광주지역 민주 인사들이 자주 모이기도 했지요. 그렇지만 대학생들과 별다른 인연을 맺지 못했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은 광주 시민들의 자발적인 항쟁이었어요. 계엄군의 만행을 보고 시민들이 전부 울분에 찼어요. 5·18 기간 나도 계엄군들에게 ‘공수부대 철수’ ‘연행자 석방’ 등을 요구했어요. 5월27일 계엄군이 도청을 무력진압한 뒤에는 서울로 피신해 명동성당에서 5·18의 진실을 알리는 ‘분노보다 슬픔이’를 기록해 참상을 알렸지요. ‘자진 출두하면 불문에 부치겠다’는 계엄군 말을 믿고 조비오 신부와 함께 6월14일 광주 보안대에 찾아갔더니 군복으로 갈아입힌 뒤 곧바로 지하실에 처박았어요. 군사재판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1년2개월 뒤 형집행정지로 풀려나기는 했어요. 전두환 등 신군부는 이제라도 회개해야 해요. 용서를 받을 수 있는지 여부는 잘못을 회개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렸다는 것을 알았으면 합니다.”』 유정인·강현석 기자 jeong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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