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학자 "세종, 이미 600년 전 여성까지 글 읽게 한 업적"

신준봉.김호정.노진호 2018. 10. 9.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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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글자 ㄱ, ㄴ, ㅁ, ㅅ, ㅇ 에
획 추가할수록 센소리 나 혁신적
글자 모양 비슷하면 소리도 비슷
"현재 언어 이론으론 설명 못해"
영국 학자 '자질문자'라고 명명


즉위 600년 다시 보는 세종<중>

“신 등이 엎디어 보옵건대, 언문(諺文)을 제작하신 것이 지극히 신묘하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혜를 운전하심이 천고에 뛰어나시오나….”

세종을 이야기할 때 한글을 빼놓을 수 없다. 인용문은 한글 창제에 반대했던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가 1444년 세종에게 올린 상소문의 첫머리다.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한글 창제는 단순히 새로운 문자 하나를 보태는 문제가 아니었다. 존재의 근원을 뒤흔드는 사안이었다. 그랬는데도 반대 진영의 핵심인 최만리조차 한글의 신묘함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최만리까지 갈 것도 없이 한글은 갖가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신묘함에서 비롯되는 의문들이다. 과연 세종이 직접 만들었을까. 어떤 주변 언어를 참고했을까. 무에서 유를 만들었다는 100% 창조 주장은 비현실적이다. 창제의 목적은 어떤 것이었나. 우리 생각에만 빠져서는 자칫 균형을 잃기 쉽다. 외국 전문가들의 시각은 어떨까. 지금까지의 국내외 한글 연구 흐름, 해외 전문가들이 생각하는 한글의 문자 특성과 우수성 등을 정리했다. e메일 답변 등을 종합한 결과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1950년대 후반부터 열광=한글이 서양 언어학자들의 시야에 포착된 건 1820년대부터다. 그 존재가 알려진 후 꾸준한 연구와 평가 대상이었다. 그러다 1940년 경북 안동의 한 고택에서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본으로 인해 한글의 제작 원리가 소상하게 전해진 50년 후반에 이르러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80년대 전반까지 국제적으로 호의적인 평가가 잇따랐다. 국내 연구자들은 이 시기를 ‘한글의 우수성에 대한 격찬의 시기’로 분류한다. “아마도 세계 어떤 문자보다도 가장 과학적인 체계”(라이샤워·페어뱅크 『East Asia: The Great Tradition』), “역사상 유례 없는 문자학적 호사”(레드야드 『1446년의 한국의 언어 개혁』), 이런 식의 최상급 평가가 이 시기에 쏟아졌다. 그 결과 한글은 해외 문자학 서적에서 반드시 언급될 뿐만 아니라 별도의 장(章)으로 다뤄지기도 한다(연세대 연규동 HK연구 교수).

1990년대 들어서며 국내 연구자들 사이에 해외 전문가들의 한글 연구 성과를 종합해 보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일반 문자학’이라는 보다 보편적인 관점에서 한글의 현주소를 파악해 보자는 취지다.

◆한글, 이래서 혁신적이다=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연구 성과를 낸 해외 전문가들에게 간단한 설문지를 보냈다. 4명이 답변을 보내왔다. 1985년 저서 『세계의 문자체계(Writing Systems)』에서 한글은 자질문자라는 주장을 펴 한글이 국제적으로 집중 조명받는 데 기여한 영국의 언어학자 제프리 샘슨(영국 서섹스대 명예교수)도 답변자에 포함됐다.

샘슨의 자질문자론은 한마디로 글자의 소리가 비슷하면 글자 모양도 비슷하다는 주장이다. 기본 자음 글자인 ‘ㄱ’에 획을 가해 ‘ㅋ’을 만들면 거센소리를 표시하도록 한 한글의 문자 특성을 당시 언어 이론으로 설명하지 못하자 ‘자질(features)’이라는 개념을 고안해 해석했다.

샘슨은 ‘한글의 가장 혁신적인 점’을 묻는 질문에 역시 자질문자론을 꺼냈다. “소리 언어가 갖는 음성학적 자질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글자 모양을 만든 점(the shapes of the letters are based on analyzing the sounds of the language into their individual phonetic features)”이라고 답했다.

글자 모양이 복잡해질수록 거센소리나 된소리를 표시하게 한 점이 가장 혁신적인 특성이라는 입장은, 흔히 소리를 낼 때 발성기관의 모양을 본떠 글자를 만든 점을 한글의 위대한 점으로 꼽는 대중의 통념과는 차이가 난다.

미국 메릴랜드대의 로버트 램지 교수 역시 비슷한 입장이었다. 그는 대표적인 한글 예찬론자 중 한 명이다. 한글의 자질 특성을 장문의 답변을 통해 알기 쉽게 설명했다. “소리를 낼 때 발음기관(혀, 입술, 치아, 성대)의 모양을 본떠 자음 글자를 만들었다는 점도 놀랍지만 기본자(ㄱ, ㄴ, ㅁ, ㅅ, ㅇ)에 획을 가해 글자 모양이 복잡해질수록 더 센소리를 표시하게 한 점은 언어학 전문가들을 더 놀라게 한다.”

비슷한 얘기다. 영어의 경우 비슷한 계열의 소리를 표시하는 알파벳들인 ‘n’ ‘d’ ‘t’ 사이에는 모양상의 유사점이 존재하지 않는데 한글은 존재한다는 얘기다.

권재일(전 서울대 교수) 한글학회 회장은 한글의 문자학적 의미로 ▶자질문자인 점 ▶발음기관 상형 ▶처음부터 모음을 따로 만듦 ▶모음조화 현상 반영 등을 꼽았다.

◆한글은 누가 만들었나=국내 학계에서는 만든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세종이 직접 만들었다는 친제설(親製說),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만들었다는 협찬설(協贊說), 학자들에게 만들도록 시켰다는 명제설(命制說)로 구분해 논의가 이뤄진다.

해외 전문가들은 국내 학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한 듯했다. 구글 뉴욕의 연구과학자인 리처드 스프로트는 자신은 세종 전문가가 아니라면서도 학자들을 시켜 만들었을 가능성,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외국 학자가 참여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국내에서도 비교적 최근까지 세종 친제설은 주류 학설이 아니었다. 국어학의 창시자 주시경(1876~1914)부터 친제설을 지지하지 않았다. 협찬이라는 입장이었다. 그러다 국어학자 이기문이 1992년 ‘훈민정음 친제론’을 발표한 후 친제설이 주류 학설로 자리 잡았다. 이기문은 논문에서 창제 당시 한글 맞춤법의 변화 양상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친제설 논리를 편다.

로버트 램지 교수는 한글의 창제 목적과 관련, “문자 해독 능력이 기득권층에 위협이 될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들까지 글을 읽게 하려 했다는 점에 한글 창제의 보편적인 의미가 있고, 인간 지성의 두드러진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고 답했다.

◆ 특별취재팀=신준봉·김호정·노진호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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