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무조건 반말..진짜 친구 만드는 법

2018. 10. 10.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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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너 어디까지 해봤어?

[한겨레]

지난 2일 열린 프립의 일회성 대화 모임 ‘수평어’의 모습. 김포그니 기자

지난 2일 저녁, 서울 영등포구 여의동의 한 카페. 20~40대 다양한 연령대 20여명이 하나 둘씩 나타났다. 일회성 대화 모임 ‘수평어’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수평어는 각자의 인적사항을 밝히지 않고 반말로 대화하는 방식을 뜻하는 신조어로, 지난 5월 일일체험 플랫폼 ‘프립’ 등에서 처음으로 선보였다. 당시 참여한 10∼40대의 다양한 연령층에서 인기를 끌었다.

모임을 기획한 이요셉(31)씨가 이날 모인 사람들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안녕, 난 요셉이야. 나를 표현하는 3가지 단어는 제주도, 디자인, 자연이야.” 그처럼 실명을 말해도 되고 가명을 말해도 된다. 중요한 건 존댓말은 하면 안 된다는 것. 무조건 반말을 해야 한다. 본인의 인적 정보도 말하면 안 된다. 대신 자신에 대한 진솔한 소개는 필수다. 최근 실연당한 경험, 앞으로의 소망 등 하고픈 얘기는 모두 털어 놓을 수 있다. 모임은 보통 1∼2시간 동안 진행된다고 한다. 일회성 만남이지만 ?모임이 끝난 뒤 마음에 맞는 이들끼리 따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이어나갈 때도 있다고 한다.

이씨는 외국 여행에서 외국인들을 우연히 만나 친해진 경험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영어로 대화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수평적인 대화가 가능했고 나이와 관계없이 친구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사회에서는 속내까지 털어놓는 친구를 만들기 힘들다는 것에 초점을 뒀다. 초·중·고등학교 때와 달리 처음 본 이들끼리 존댓말로 관계를 트다 보면 서먹하기만 할뿐 금방 친해지기 어렵다”며 그는 누구나 친구가 될 수 있는 길을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이어 이씨는 “직장이나 학교에서 나이·직급에 따라 수직적인 구조가 형성되는데, 여기서 오는 피로감이 크다는 이들이 많다. 형식적으로 예의를 차리며 속내는 감춰야 할 때가 대부분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 대해 편히 말을 꺼내고픈 이들이 많을 거라 생각했다”고 말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이 모임에서 19살의 대학교 신입생과 40살의 직장인이 반말로 수평적인 대화를 한 끝에 친구가 된 사례도 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수평’ 만남이 성사된 셈이다.

만나서 대화만 하지 않는다. 모임 이후 다양한 활동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휴대폰을 끄고 삼림욕을 하기도 하고, 천문대를 찾아 별을 보거나 음악을 들으며 술 한잔을 나누기도 한다. 이처럼 다양한 놀이를 함께 즐길 수 있다 보니 형식은 일회성 모임이지만 매주 이 모임을 찾는 이들도 적잖다고 한다. 수평어라는 대화 방식이 인기를 끌자 ‘오픈유니브’, ‘한강에서 치맥힐링’ 등 일일체험 플랫폼이나 지식공유 커뮤니티 ‘오픈 컬리지’ 등에서 유사한 대화 모임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이런 모임들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뭘까.

이날 이 모임에 처음 참여해 봤다는 백동우(26)씨는 “눈치 안 보고 편하게 말하고 싶었다”며 수평어 모임에 참여하게 된 이유를 밝혔다. 백씨는 “상대방의 나이·성별·학력·직장 등을 알게 되면 나도 모르게 조심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게 되고 자연히 날씨, 회사, 사는 곳을 묻는 식의 획일화된 대화만 하게 되는 게 아쉬웠다”고 한다. 이날 그는 자신처럼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동성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백씨는 새로 사귄 친구의 실명도, 나이도 아직 모르지만, 좋아하는 작가와 책에 관해 얘기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한다. 소설가가 꿈이라고 했더니 ‘멋지다’는 격려도 받았다. 그는 “친구와 가족들에게 진짜 내 꿈을 말했을 때 ‘작가는 배고프다’며 말리기만 했었는데(웃음). 비록 일회성 만남이었지만 ‘인생 친구’를 만난 기분”이라며 웃어 보였다.

직장인 허유선(34)씨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만 친해지는 건 두려웠다고 한다. “나의 평판이 중요하기 때문에 상대의 눈치를 보느라 깊게 친해지는 걸 어려워하는 편”이라며 “그만큼 마음이 외로워져 이 모임을 찾게 됐다”고 한다. 누가 봐도 백발의 연장자인데도 스스럼없이 말을 놓을 수 있는 분위기가 마치 현실을 탈출해 꿈꾸는 기분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현실감이 없는 만큼 대화의 자신감도 생겼다. 운영자 이씨는 “허씨처럼 인간관계가 조심스러운 사람들에게도 다시 한 번 친구를 사귈 기회가 필요하다 생각한다”고 말한다.

상대에 대한 편견 없이 동등한 대화를 나누다 보면 대상에 더 집중하게 된다. 취향, 철학, 취미 등을 살피게 된다. 집중할수록 애정이 생기고 나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데 용감해진다. 수평어는 그런 관계의 출발점이다.

수평적인 대화를 즐기는 신풍속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최창호 심리학자는 “젊은 세대는 ’꼰대’들과 당당하게 대화하고 싶고,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로부터 소외되고 싶지 않은 심리가 있다. 이런 심리 구조가 수평어라는 대화 문화를 만든 것 같다”고 분석했다. “적어도 학교·직장 밖에서는 편하게 반말로 대화하는 문화가 점점 확대되어갈 것이라는 얘기다.

김포그니 기자 pogn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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