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 13명 중 2명 서명 못 받아..90세 할머니 호흡기 달고 고통
현실과 동떨어진 존엄사법
환자 뜻 모를 땐 가족 다 동의 필요
"언제 손자들까지 찾아 서명받나"
미국선 법정대리인 제도 활용
병원 윤리위 있어야 존엄사 가능
요양병원 1526곳 중 22곳만 설치
사전의향서 작성해도 무용지물
유일한 방법은 가족 전원이 연명의료 중단에 합의하는 것. 60세 전후의 자녀 6명은 이의가 없었다. 손자 13명에게서 문제가 발생했다. 한 명이 재소자였고, 한 명은 가족과 불화가 생겨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다. 연명의료결정법에 따르면 무조건 가족 전원(자녀와 손자녀)이 서명하고 가족관계증명서로 가족임을 증명해야 한다.
결국 자녀 두 명이 나섰다. "어머니가 기계를 달고 임종하는 걸 원하지 않은 것 같다"고 희미한 기억을 더듬었다. 자녀 두 명이 어머니의 뜻을 추정해 진술하면 되는 조항을 적용했다. 의료진은 할머니의 인공호흡기를 제거했고, 얼마 안 돼 세상을 떴다. 19명의 서명을 받느라고 할머니는 일주일 넘게 중환자실에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연명의료 중단, 즉 존엄사 제도가 어렵게 시행됐지만 경직된 비현실적 조항이 적지 않아 웰다잉 확산을 저해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오·남용을 걱정한 나머지 너무 엄격하게 법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환자의 뜻을 모를 때 가족 전원이 합의하는 조항 때문에 문제가 적지 않게 생긴다. 50대 말기 간경화 환자는 간이식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어서 의료진의 설명을 듣고 연명의료 중단에 동의했다. 하지만 기력이 없어 서명하지 못한 채 의식을 잃었다. 연명의료계획서에 본인이 반드시 서명해야 한다. 나중에 연락 없이 지대던 가족이 나타나 "끝까지 치료해 달라"고 요구해 이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의식이 없던 80대 만성폐쇄성 폐질환 환자는 아들 둘이 투석 치료를 안 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아들이 모르던 딸 2명이 있었고, 이들의 동의를 받지 못해 투석 치료를 계속하다가 숨졌다.
의료기관윤리위원회(이하 윤리위)가 구성되지 않으면 존엄사를 집행할 수 없는 점도 문제다. 윤리위는 5명 이상으로 구성하되, 의사가 아닌 위원 2명(1명은 외부인)을 포함해야 한다. 자문, 의료인 교육 등의 역할을 한다. 윤리위가 구성된 의료기관은 164곳이다. 동네 의원을 제외한 의료기관의 4.9%다. 상급종합병원(대형대학병원) 아래급인 종합병원 302곳 중 89곳(29.5%), 소형병원 1467곳의 0.6%만이 윤리위가 있다. 경기도 남양주·오산·이천, 세종시, 경북 문경·김천 등 전국 157개 시·군·구에 이런 의료기관이 없다.
윤리위와 연명의료 제도를 운영하려면 전문가가 있어야 한다. 돈과 공간이 필요한데, 현행 건강보험 수가가 그 정도를 커버해 주지 못한다. 대한병원협회 김선태 대외협력 부위원장은 국회 토론회에서 "종교계·법조계·시민단체 등에서 추천한 2명을 포함하기 때문에 소규모 의료기관이나 요양병원이 윤리위를 운영하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여의도성모병원 관계자는 "내부 사정이 있어 윤리위 위원 선정을 못하고 있다. 부서 간 의견 조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상계백병원 관계자는 "곧 윤리위를 구성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요양병원도 구멍이다. 1526개 중 22개(1.4%)만 위원회를 설치했다. 대부분의 요양병원에서 연명의료 중단을 할 수 없다. 한 폐암 말기환자(78)는 서울의 한 요양병원에 입원한 채 서울대병원을 오가며 항암치료를 하던 중 상태가 급격히 악화됐다. 요양병원 당직 의사는 심폐소생술을 한 뒤 기관지에 관을 삽관해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보냈고, 중환자실에서 3주간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다가 숨졌다.
김소윤 연세대 의대 의료법윤리학과 교수는 "종전에는 가족 1~2명 동의로 심폐소생술 금지요청서(DNR)로 연명의료 중단이 이뤄졌는데, 연명의료결정법을 시행하면서 종전보다 엄격해졌다"며 "가족 전체 동의의 예외 인정, 직계가족의 범위 축소 등의 다양한 의견이 나오는데, 이런 걸 모아 법률 개정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sssh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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