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사'라는 이름의 유령

2018. 10. 11.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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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유엔사 지휘통제권 유엔 아니라 미국에…
이름만으로는 알 수 없는 유엔사 역사

지난 5월9일 비무장지대 군사분계선에 위치한 판문점에서 공동경비구역(JSA) 경비대 대원들이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김진수 기자

“비무장지대(DMZ) 내 모든 활동은 유엔사령부(유엔사) 소관이다.”

로버트 에이브럼스 주한미군사령관 지명자는 지난 9월25일 미 상원 인준청문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닷새 전 평양 남북 정상회담에서 체결된 ‘판문점선언 군사분야 이행합의서’에 담긴 비무장지대 내 감시초소 철수 등과 관련한 발언이었다. 일부 국내 언론은 기다렸다는 듯 이 발언을 근거로 군사적 긴장 완화 조치를 비롯한 남북 합의사항 이행에 딴죽을 걸고 나섰다. 유엔사는 지난 8월 말 남북 철도 연결을 위한 현지 조사를 가로막아 ‘주권 침해’ 논란을 부른 바 있다. 북-미가 종전선언에 다가선 지금, 새삼 유엔사에 관심을 갖는 이유다.

남북평화 딴죽 거는 유엔사?

유엔사는 한국전쟁과 함께 태동했다.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나자, 트뤼그베 할브단 리 당시 유엔 사무총장은 유엔 헌장에 따라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를 소집했다. 헌장 제99조는 “사무총장은 국제평화와 안전 유지를 위협한다고 판단되는 어떤 사안이라도 안보리에 회부할 수 있다”고 돼 있다. 긴급 소집된 안보리는 당일 북한군의 적대 행위 중단과 철수를 촉구하는 결의 제82호를 통과시켰다.

한국전쟁은 유엔 창설 이후 지구촌에서 벌어진 첫 전면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에 대한 인류의 반성으로 만들어진 유엔은 헌장 제7장(제39~51조)에 ‘평화에 대한 위협, 평화의 파괴 및 침략 행위에 관한 조치’를 마련해놨다. 국제평화와 안전을 유지·회복하기 위해 병력 파견(제42조)을 포함한 지구촌 차원의 평화 유지를 위한 법적 의무와 권한은 안보리에 맡겨졌다.

결의 제82호에 북한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이틀 뒤 안보리는 유엔 회원국에 한국을 지원하기 위한 노력을 촉구하는 내용을 뼈대로 한 결의 제83호를 채택했다. 그리고 같은 해 7월7일 안보리 결의 제84호가 채택된다. 안보리는 결의를 통해 △미국 주도 아래 연합군 사령부를 구성하는 데 회원국의 협력을 촉구하고 △미국에 연합군 사령관을 지명할 것을 요청하고 △북한군에 맞선 작전을 수행할 때 참전국 국기와 함께 유엔 깃발을 사용하도록 허용하고 △미국이 연합군 사령부 활동에 대해 보고하도록 요청했다.

결의 제84호에 따라 1950년 7월24일 더글러스 맥아더를 사령관으로 하는 유엔사가 일본에서 공식 출범했다. 유엔이 창설 이래 처음 무력분쟁에 군사적으로 개입한 사례다. 유엔사가 본격 활동에 접어든 이후에도 안보리는 결의 제85호(7월31일)와 제88호(11월8일)를 채택했다. 하지만 사무총장의 연락관이 유엔사에 파견되고, 유엔사의 상황 보고를 받는 선에서 유엔의 역할은 그쳤다. 안보리는 이듬해인 1951년 1월31일 결의 제90호를 채택하고, 한국전쟁과 관련해 더는 논의조차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유가 있다.

안보리가 한국전쟁 당시 발 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은 ‘소련의 부재’ 덕분이었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소련은 1950년 1월13일부터 8월1일까지 안보리 회의를 보이콧했다. 중화인민공화국(중국) 대신 중화민국(대만)이 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를 차지한 것에 대한 항의였다. 중국은 미-중 관계가 풀리기 시작한 1971년 10월25일 유엔 총회 결의 제2758호가 통과된 이후에야 안보리 상임이사국 지위를 승계할 수 있었다.

이름만 유엔, 실체는 미국 주도

한국전쟁으로 안보리가 숨 가쁘게 움직이면서 소련도 보이콧을 중단했다. 거부권을 지닌 소련의 복귀로 안보리 논의는 더 이상 미국 맘대로 흘러가지 않게 됐다. 안보리가 결의 제90호를 통해 한반도 문제에서 아예 발을 뺀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이후 전쟁은 2년 반 넘게 불을 뿜었지만, 안보리는 아무런 후속 조치를 하지 않았다.

만 3년을 넘긴 전쟁은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 체결로 멈춰섰다. 정전협정 체결 때 유엔사는 한국군(59만911명)과 미군(30만2483명)을 비롯해 17개국 93만여 명의 병력을 자랑했다. 협정에 따라 정전체제를 감독하기 위한 군사정전위원회가 꾸려졌다. 정전협정 제20조는 “군사정전위원회는 10명의 고급 장교로 구성하되 그중의 5명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이 이를 임명하며, 그중의 5명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과 중국인민지원군사령관이 공동으로 이를 임명한다”고 규정돼 있다. 유엔사 존속의 근거다.

정전협정은 애초 유효기간이 짧았다. 협정 발효 뒤 3개월 안에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고위급 정치 협상을 시작하기로 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 협상은 65년이 지난 오늘까지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 1956년 말까지 참전국 대부분이 병력을 물렸지만, 1953년 체결된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따라 미군은 한반도에 남았다. 일본에 머물렀던 유엔사가 본부를 한국으로 옮겨온 것은 1957년의 일이다.

“안보리 결의 제84조는 ‘연합군 사령부’를 안보리가 통제하는 산하 조직으로 구성하도록 결정한 게 아니다. 단지 사령부를 구성하고, 이를 주도하는 역할을 미국이 맡도록 ‘추천’했을 뿐이다.”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 전 유엔 사무총장은 재임 기간이던 1994년 6월24일 김영남 당시 북 외무상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렇게 밝혔다. 유엔은 그간 기회 있을 때마다 ‘유엔사’와 무관하다는 점을 밝혀왔다. 로즈메리 디카를로 유엔 정무담당 사무차장은 지난 9월17일 열린 안보리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름과 달리, 유엔사는 유엔에 딸린 기구나 조직이 아니다. 유엔의 지휘·통제도 받지 않는다. 안보리 산하단체도 아니다. 따라서 유엔의 예산이 지원되지 않으며, 유엔사와 유엔 사무국 간에 어떤 보고 체계도 없다.”

유엔사와 유엔에 딸린 평화유지군의 지휘·통제 체계를 비교해보면, 둘의 차이를 명확히 알 수 있다. 유엔 평화유지군의 지휘·통제권은 세 분야로 나뉜다. 첫째, 전반적인 정무적 판단은 안보리에 귀속된다. 둘째, 평화유지군의 운용 방향과 지휘권은 사무총장이 갖는다. 셋째, 현장 지휘권은 사무총장의 위임을 받은 지휘관이 대행한다. 반면 유엔사는 정무적 판단은 미국 정부가, 운용과 지휘권은 주한미군사령관이, 현장 지휘권은 한-미 연합사령부를 구성하는 한국군과 미군 지휘관이 각각 맡는다. 유엔사는 ‘유령’이다.

주한미군사령관은 ‘모자’가 3개

“우리는 유엔사와 매우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 제임스 매티스 미국 국방장관은 지난해 6월3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제17차 아시아안보회의(샹그릴라 대화)에 참석해 이렇게 말했다. 북-미 갈등이 극단으로 치닫던 상황에서, 대북 군사행동 가능성을 거론하면서 나온 발언이다. 누구와 ‘협력’한다는 뜻일까? ‘모자가 3개’인 주한미군사령관은 한-미 연합군 사령관과 유엔사 사령관을 겸하고 있다. 매티스 장관은 이렇게 덧붙였다. “(한반도에는) 미군만 있는 게 아니다. 유엔사와 1950년 안보리 결의에 따라 병력을 파병한 참전국이 있다. 왜냐하면, 한국전쟁은 지금껏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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