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죽을 때까지 안 간다" 경로당 외면하는 요즘 노인들, 왜

박태인 2018. 10. 1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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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80세대 "경로당에서 할 것 없어"
"경로당 변화하지 않으면 소멸"
'개방형 경로당' 모델 주목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가 노인의 날인 지난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 경로당을 방문해 어르신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청와대 제공]
성남시 분당구에 거주하는 고영학(71·남)씨는 경로당에 간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할아버지'라는 단어를 가장 싫어한다는 고씨는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내 친구들은 경로당을 쳐다도 보지 않는다"며 "거기에 가면 정말 할아버지가 된 것 같아 앞으로도 갈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고씨보다 7살이 많은 이창석(78)씨도 기자와 만나 "서울에 거주하며 아내와 봉사활동은 다녀도 경로당에는 가지 않았다"며 "할 것도 없고 쓸모없는 사람처럼 TV만 봐야 하지 않느냐"고 했다.

한국의 대표적인 노인 복지시설인 경로당이 노년 세대에게 외면받고 있다. 한국 사회는 2017년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14%를 돌파하며 고령사회에 진입했다. 하지만 경로당을 찾는 노인들의 발걸음은 뜸해지는 역설적인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경로당의 운영 주체인 대한노인회 관계자는 "경로당 회원 수 현황을 공개할 수 없다"면서도 "(회원 수가) 예전만큼 늘고 있지는 않다"고 말했다.

지난달 19일 부산 해운대구 벡스코에서 열린 '60(60세 이상) 시니어 일자리 한마당'에서 구직을 원하는 노인들이 채용 정보를 살펴보고 있다. [중앙포토]
지난달과 이달 초 기자가 찾은 수도권 대형 아파트 단지(500~1800세대) 내 경로당은 신문만 덩그러니 놓인 채 텅 비어 있거나 소수의 노인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노인의 날인 지난 2일 한 경로당에서 만난 서모씨(91)는 "사람이 아예 없는 날도 많다"고 말했다.

노인 복지 전문가들은 한국 노년 세대들의 경로당 외면 현상을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다. 경로당은 6만 7342개(2017년 기준)의 국내 노인 여가시설 중 사실상 전부인 97.4%(6만 5650개)를 차지하고 있다. 노인복지관과 노인교실 비율이 2.6%에 불과해 경로당이 외면받으면 이를 대체할 노인 여가 시설이 마땅치 않다.

수년간 경로당을 연구해온 김춘남 경기복지재단 연구위원은 "7080세대는 물론 예비 노년 세대인 베이비 부머들은 아예 경로당에 갈 생각이 없다"며 "신(新) 노년 세대라 불리는 이들의 여가 욕구를 만족시켜주지 못한다면 경로당이 소멸할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경로당이 외면받는 이유는 노년 세대의 욕구와 필요가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지난달 '경로당 활성화' 보고서를 발표한 대구경북연구원의 박은희 연구위원은 "노년 세대의 학력과 건강 수준이 높아지며 경로당이 기존 동네 사랑방 이상의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고 분석했다.

2016년 대한노인회가 전국 경로당을 대상으로 실시한 '경로당 활성화 실태조사'를 살펴보면 경로당을 다니는 노인들도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전국 경로당 중 62.2%인 3만 9866개의 경로당 회원들은 경로당의 '여가 프로그램'에 대해 불만족스럽다는 입장을 드러냈다.

2016년 대한노인회가 전국 경로당을 대상으로 조사한 경로당 프로그램 이용 관련 실태 조사. [자료 대한노인회 제공]
답변 내용별로 살펴보면 '프로그램이 다양하지 못하다(22.8%)', '정기적인 프로그램이 제공되지 않고 있다(21.2%)', '관심 없는 프로그램이 제공되고 있다(16.5%)'순이었다. 대한노인회 관계자는 "경로당 활성화 사업이 지방 이양 사업으로 분류되며 국비 지원이 어려워져 예산난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경로당 문턱을 낮추는 '개방형 경로당'과 세대·지역별 특화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경로당 혁신사업'을 경로당 활성화의 방안이라 말하고 있다. 기존 회원제 중심의 폐쇄적인 경로당을 전 세대가 어울릴 수 있는 가족 여가 시설로 탈바꿈해야 한다는 것이다.

송파구 파인타운10단지에 위치한 개방형 경로당에서 운영 중인 예절교실의 모습. [사진 송파구청]
박은희 연구위원은 "유럽 경로당에서 시도되고 있는 다양한 혁신 모델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프랑스는 경로당에 보드게임과 닌텐도 위(Wii) 게임기를 설치해 청소년과 노년 세대가 어울리는 '게임 도서관'을 만들어 큰 호응을 얻었다. 독일의 경우 경로당의 예비 고객인 베이비부머 세대를 위한 직업 알선 등 맞춤형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경기도에서도 지난 3년간 '아침이 기다려지는 경로당' 사업을 통해 도내 19개 경로당에서 특화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고양시 덕양구 우방 경로당은 노년세대(1세대)와 청소년 세대(3세대)가 함께하는 '농사 체험교실'과 '역사 탐방교실'을 진행해 성공적 모델이란 평가를 받았다. 송파구에서도 2015년부터 1·3세대가 함께 어울리는 개방형 경로당 모델을 도입했고 현재 25개 경로당으로 확대 운영 중이다.

김춘남 연구위원은 "어느 나라도 우리와 같은 탄탄한 경로당 인프라를 갖추지 못하고 있어 이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며 "한국 사회에 등장한 새로운 노년 세대를 위해 경로당의 변화가 절실한 시점"이라 말했다.

박태인 기자 park.ta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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