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도 원격진료 한창인데..한국은 의료법 막혀 19년째 헛바퀴

손해용 2018. 10. 16.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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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성장 막는 한국판 ‘적기 조례’①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사는 바유 수르야(28)는 오랜 컴퓨터 작업으로 눈이 아플 때면 스마트폰 원격 진료 애플리케이션인 ‘할로닥’(Halodoc)을 사용한다. 증상을 입력한 뒤 진료를 담당하는 의사들의 리스트가 나오면 원하는 의사를 선택해 영상통화로 진찰을 받는다. 보험 처리는 물론, 의약품 처방에서부터 구입ㆍ배달까지 앱에서 끝낼 수 있다. 바유는 “교통체증이 심한 자카르타에서 병원에 가는 시간을 아낄 수 있어 편하다”고 말했다.
인도네시아의 원격 진료 서비스인 '할로닥'을 이용하면 화상통화나 채팅을 통해 의사에게 진찰을 받을 수 있다. [사진 할로닥]
16일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인도네시아에서만 약 200만명이 할로닥을 이용하고 있으며, 2만명의 의사가 등록돼 있다. 진료비는 2만5000~7만5000루피아로 일반 사립병원보다 싼 편이다. 의료 분야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인도ㆍ태국ㆍ싱가포르 등 다른 동남아 국가에서도 ‘링엠디’ㆍ‘닥터 애니웨어’ 등의 원격 진료 서비스가 인기를 끌고 있다.

미국ㆍ일본ㆍ중국 등은 물론 동남아에서도 이처럼 원격 의료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으나, 한국에서는 여전히 남의 나라 얘기다. 2000년 강원도에서 원격진료 시범사업을 시작했지만, 여전히 시범사업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서다.

현재 한국에서는 ‘의사-환자 간’ 원격진료 행위는 불법이다. 의사ㆍ한의사ㆍ간호사 등 의료진끼리 자문하는 형태의 원격진료만 가능하다. 18대 국회부터 20대 국회까지 총 세 차례에 걸쳐 의사-환자 간 원격진료를 허용하는 의료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오상우 동국대 일산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진과 정보기술(IT)을 가지고 있는데 원격진료 규제에 가로막혀 날개를 펴지 못하고 있다”며 “미래 의료시장으로 가는 길목을 가로막는 이 규제를 완화한다면 IT 기술과 의료기술이 빠르게 결합하는 세계 트렌드를 주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장조사 회사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세계 원격의료 시장 규모는 2015년 181억 달러에서 2021년 412억 달러(약 46조5000억원)로 커질 것으로 관측된다.

IT 강국이라고 불리는 나라에서는 원격 진료가 자리 잡은 지 오래다. IBIS월드에 따르면 미국 원격의료 시장은 2012년부터 2017년까지 연평균 45.1%의 성장세를 기록했다. 감염병 치료에도 활용하고 있다. 네브래스카메디컬센터는 지난 2014년 라이베리아에서 의료봉사 활동 중 에볼라에 감염된 의사 리처드 새크라를 치료하는 데 원격 진료를 이용했다. 화상 통화와 무선 송수신 기능을 갖춘 전자청진기 등을 통해 의료진과의 접촉을 최소화해 치료를 진행할 수 있었다. 캐나다에서는 1175개 지역에 5710개의 원격의료 시설이 구축돼 총인구의 21%가 혜택을 보고 있다.(OECD 2012년 기준)

휴대전화를 이용한 ‘포켓닥터’를 2년 전부터 도입한 일본은 지난 4월 원격의료 관련 규제를 대부분 없앴다. 과거에는 인구가 적어 의사 수가 부족한 지역에서 주로 원격 진료가 이뤄졌지만 최근에는 도심으로도 확산되고 있다. 도쿄의 번화가 롯폰기에 위치한 병원인 ‘신 롯폰기 클리닉’은 외부 시선 때문에 통원을 꺼리는 우울증 등 정신과 상담이나 꾸준한 관리가 필요한 금연치료 등에서 원격 의료의 이용 빈도가 높다.

중국 정부는 2009년부터 원격의료를 정책적으로 육성하고 있다. 시장이 큰 만큼 샤오미ㆍ화웨이ㆍ바이두ㆍ알리바바ㆍ텐센트 등 주요 IT 업체가 이 시장에 뛰어들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2022년 중국의 원격의료 이용자는 4억2700만 명에 달할 전망이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해외와 달리 국내에서 원격 진료를 시행하지 못하는 것은 대한의사협회ㆍ대한한의사협회ㆍ대한간호협회ㆍ대한병원협회 등 의사단체와 시민단체들이 반대 목소리를 높이고 있어서다. 원격진료로 인해 불완전한 진료와 처방이 이뤄질 수 있고, 대형 병원 쏠림 현상이 생겨 동네ㆍ지방 병원 진료 시스템이 무너질 수 있다는 게 반대 논리의 골자다. 원격의료의 주 대상이 될 만성질환을 앓는 노인들이 스마트 기기를 잘 다루기 어렵고, 문제가 생겼을 때 의사의 책임인지 장비의 결함인지 입증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의료법 개정이 자칫 의료민영화의 길을 터줄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특히 병원이 멀리 떨어져 있어 환자가 직접 가기 힘든 미국ㆍ중국과 달리 국내에선 대부분 지근 거리에 병ㆍ의원이 있다. 직접 의사를 만나는 게 어렵지 않은데, 굳이 불완전 의료 가능성이 있는 원격의료를 도입하는 건 무리가 있다는 게 이들의 또 다른 반대 이유다.

최대집 대한의사협회장은 지난 7일 기자들과 만나 “우리나라 의료접근성은 세계적으로도 비슷한 사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높다”며 “일단 원격의료를 허용해놓고 만성질환 관리로 대상을 넓히겠다는 의도라 수용할 수 없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2014년에 의료계가 집단휴진을 한 이유도 원격의료 때문이었다”며 “만약 법안이 상임위를 통과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제대로 보여주겠다”라고도 했다.

하지만 원격진료의 기대 효과는 분명하다. 아픈 몸을 이끌고 병원을 찾는 수고와 시간을 줄일 수 있다. 직장ㆍ육아로 바쁜 30~40대에서부터 장애인ㆍ노인 등까지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계층이 넓다. 도서벽지ㆍ군부대ㆍ교정시설 등 의료사각지대 해소는 물론, 고령화 시대에 폭증하는 만성질환자 관리와 의료비 절감에도 효율적이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국내 시범사업이나 해외연구를 통해서도 원격의료의 실효성은 입증됐다. 2016년 1월 보건복지부가 148개 참여기관(환자 5300명)을 대상으로 원격의료 시범사업을 벌인 결과 당뇨병ㆍ고혈압 환자의 증상이 개선됐다. 시범사업 기간에 원격의료 관련 오진이나 부작용 등 안전성 문제도 나타나지 않았다.

소아 중증 환자를 치료하고 있는 김민선 서울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원격진료가 허용되면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이 번거롭게 병원을 오갈 일 없이 집에서도 진료를 받을 수 있어 효용이 크다”이라며 “긴급 응급처치나 환자 이송 여부 등에 대한 판단도 수월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의료 편의성을 높이고, 세계적인 의료ㆍIT 융합 흐름에 발맞추기 위해서라도 의사-환자 간 원격진료를 허용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원격의료 이용률이 전체 인구의 20%로 확대될 경우 2조 원 이상의 신규 시장이 창출된다고 분석했다. 보건산업진흥원은 원격의료로 데이터를 다루는 간호직, 통신을 담당하는 전산직, 원격 진찰에 필요한 의술 및 장비를 연구하는 연구직, 전반적 업무를 보조하는 행정직까지 다양한 직업이 탄생할 것이라고 봤다.

정부는 군부대ㆍ교정시설ㆍ원양어선ㆍ산간도서벽지 등에 한해 원격진료를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이 경우 의료 소외계층 120만명이 혜택을 볼 수 있을 것으로 추산된다. 오상윤 보건복지부 의료정보정책과장은 “의료사각지대를 해소하자는 취지”라며 “법 통과를 위해 국회와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IT업계에서는 기대에 한참 못 미치는 안이라는 평가가 많다. 도심에 있는 일반인 환자 대상 원격의료는 여전히 금지하고 있는 탓에 원격진료를 해외처럼 산업적으로 키우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차기 경영학회장인 김용준 성균관대 경영대 교수는 “이미 중국은 스마트폰과 원격 진료를 결합해 금융ㆍ헬스케어ㆍ의료기기 등의 분야에서 다양한 사업 모델을 만들어 내고 있다”며 “관련 규제를 풀고 투자를 끌어낸다면 국민 효용은 물론 의료산업 활성화, 일자리 창출, 해외 진출 등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손해용 기자 sohn.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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