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리 유치원 공개 뒤엔 '엄마들'의 추적 있었다

입력 2018. 10. 20. 09:26 수정 2018. 10. 20.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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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
'정치하는 엄마들'의 비리 유치원 명단 추적기
명품가방 사고 급식비 빼돌려도
엄마들만 몰랐던 비리 유치원 이름
알고 보니 비공개 이유도 없어

비영리단체 '정치하는 엄마들'
비리 유치원 명단 공개 위해
정보공개 청구, 행정소송 내며
1년 넘게 끈질기게 매달려와

[한겨레] ▶ 정부와 교육청이 감사를 해 비리를 적발하고도 묵혀뒀던 사립유치원 명단이 공개돼 일주일째 파장이 계속되고 있다. 이 ‘비리 유치원 명단 공개’라는 사건은 어느 날 갑자기 벌어진 일이 아니다. 비리를 저질러 적발되고도 되레 큰소리치는 유치원, 감사를 하고도 유치원 이름을 숨겨줘온 교육당국과 정부에 항의하고자 1년 넘게 노력해온 이들이 있다. 엄마들의 단체, ‘정치하는 엄마들’이다.

‘비리 유치원 명단 공개’ 요구 작업에 1년 넘게 끈질기게 매달려온 ‘정치하는 엄마들’의 조성실 공동대표(왼쪽부터), 남궁수진 활동가, 장하나 공동대표, 김신애 활동가가 1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한겨레>와 만나 환하게 웃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엄마들만 몰랐다. 경기도 화성 동탄신도시 환희유치원 원장이 2014년 3월부터 2년 동안 자기 월급으로 4억원을 챙기면서도 유치원 체크카드로 명품가방을 사고, 개인 카드값과 아파트 관리비까지 유치원 비용으로 처리했다는 사실을 경기도교육청은 2016년, 국무조정실은 2017년 감사를 통해 알고 있었다. 원장이 전남 나주의 대학에 재학 중인 자기 아들을 유치원 사무장으로 앉혀 고액의 급여를 주고 유치원 교육비 계좌에서 그 대학 등록금까지 내는 동안 환희유치원 아이들은 사업자등록이 되지 않은 농장에 가서 체험학습을 했고, 폐업한 업체가 만들어준 영상앨범을 받았다.

엄마들은 알 수가 없었다. 유치원 설립자가 교재·교구비 명목으로 받은 학부모 부담금을 가로챈 경기도 성남 서판교유치원에는 필수 교구조차 턱없이 부족했고, 식자재는 일주일에 한번 정도 간헐적으로 구입해 아이들에게 신선도 낮은 급식이 제공됐다. 이런 사실이 지난해 경기도교육청 감사를 통해 드러났고 검찰이 교재비 편취 혐의로 유치원 설립자를 기소해 재판까지 진행 중이다. 그런데도 지금껏 엄마들은 그 사실을 모른 채 유치원 당첨을 염원하며 서판교유치원 앞에 줄을 서왔다.

엄마들은 몰라도 된다고, 엄마들만 모르면 된다고 우기던 바윗덩어리 같은 세상을 내려친 건 결국 엄마들이었다. 지난 11일 언론 보도와 박용진 의원(더불어민주당)의 발표로 세상에 알려져 한국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전국 비리 유치원 명단 공개’라는 사건 뒤에는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끈질기게 이를 추적해온 ‘엄마들’이 있다. 그들은 한국 사회의 모순에 대해 주체적으로 목소리를 내고자 모인 엄마들의 모임 ‘정치하는 엄마들’이다. 19대 국회의원이었던 장하나씨가 지난해 <한겨레> 토요판(연재 ‘장하나의 엄마 정치’)을 통해 제안하면서 만들어진 비영리단체다.

“비공개 당연하다”던 국무조정실
소송 걸자 명단 들고 찾아와
언론 제보에 나서 ‘사건’을 만들다

국공립 확충, 경영 감시 말하면
한유총 무력시위에 토론회도 무산
“휴업 협박 원장에겐 명단 공개가 답”

비리 유치원 숨겨준 교육당국
전수 감사 잘할 능력 있을까
엄마 당사자 참여 가능케 해야

회원 500명, 페이스북 멤버 2300명
서로 처지 공감, ‘이어달리기’하며
보육, 교육, 노동 문제 바꿔나갈 것

1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정치하는 엄마들’ 장하나(41)·조성실(32) 공동대표와 활동가 남궁수진(38)·김신애(36)씨를 만났다. 국무조정실과 교육청이 유치원 비리를 적발하고도 명단을 공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 지난해부터 “왜 유치원 이름을 알려주지 않느냐”고 따지고 나서며 정부와 교육청 등을 상대로 정보공개청구, 행정소송 등을 지속해온 이들이다. 이날도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교육부를 규탄하는 연대 기자회견에 참여한 이들은 “아이들 하원(어린이집·유치원을 마치고 나오는 것) 전에 집에 돌아가야 한다”며 인터뷰를 서둘렀다.

정치하는 엄마들 로고. 정치하는 엄마들 강미정 활동가 제공

“설거지하는데 계속 웃음이 났다”

―1년 넘는 시간 동안 ‘비리 유치원 명단 공개’를 요구하며 여러 행동에 나섰던 것으로 안다. 일단 명단 공개 파장이 큰데, 소감이 어떤가?

장하나(이하 장) 비리 유치원 명단이 공개된 날 일이 바빠 밤늦게 귀가하는 길에 뉴스를 봤다. 비리로 적발된 사립유치원들이 실명으로 거론되는 걸 보니 계속 웃음이 나더라. 나중에는 너무 웃어서 입꼬리 주변 근육이 아플 정도였다. 자정 넘어서 밀린 설거지를 하는데 춤추면서 했다. 같은 시각, 오랫동안 유아교육을 돈벌이로만 생각하고 정말 부당하게 돈을 벌었던 사립유치원의 나쁜 원장들이 어디선가 화내고 난감해하고 박용진 의원과 ‘정치하는 엄마들’을 욕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너무 기쁘고 좋아 춤을 췄다. 이 맛에 사회운동을 하고 행동에 나서는 게 아닌가 싶었다.

김신애(이하 김) 마침내 비리 유치원 이름이 공개되는 것을 보고 감격스러웠다. 명단 공개를 1년 넘게 요구하다 보니 이게 정말 될까 싶은 순간도 많았다. 어디서 막혀 있는 건지 답답하고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데 정말 공개되고 나니, 엄마들이 이렇게 노력하니까 되는구나, 계란으로 정말 바위를 깰 수 있구나 싶었다. 하지만 파장이 이렇게 클 줄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내가 사는 동네 맘카페에 비리 유치원 명단 공개를 위해 ‘정치하는 엄마들’이 해온 활동에 대해 글을 올렸더니 조회수가 폭발적이었다.

조성실(이하 조) 6살 아이와 함께 뉴스를 보는데 어느 유치원에서 원장이 급식비를 아끼느라 아이들에게 포도를 두 알씩만 줬다는 얘길 듣고 같이 울었다. 우리 애가 4.3㎏으로 우량하게 태어나 먹성이 좋은데, 그래서 공동육아 하는 데서도 아주 많이 먹는 편이다. 뉴스를 보고는 아이가 “엄마, 저는 저런 유치원 안 다닐래요. 나는 포도 두 알 주는 유치원은 절대 안 갈 거야. 너무 싫어. 너무 나쁜 사람이다. 어떻게 해야 돼?” 이렇게 물어보더라. 내가 “그래서 엄마가 ‘정치하는 엄마들’ 하는 거야”라고 대답했더니 “엄마 응원해요”라고 하더라. 밤새 마음이 너무 슬펐다. 결국에는 당연히 공개되어야 하는 건데 여기까지 오는 동안 진짜 고생을 많이 했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보다 더 슬픈 건 부모들이 알고자 했을 때는 관련 기관들이 전혀 압박으로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터질 게 터져서 정말 다행이다.

남궁수진(이하 남궁) 감사에 적발된 사립유치원의 비리 내역을 정리하면서 정말 많이 분노했다. 아이의 보호자들이 비리 내용을 확인하고 이게 내 아이의 유치원이라는 걸 알면 정말 분노하게 될 텐데, 이름이 전부 가려 있었다. 역시 유치원 이름이 공개되니 모두 분노하고 있고 부모들이 들고일어날 수밖에 없는 문제다. 지금은 분노에서 끝나지 않게 해야겠다는 책임감 같은 것도 든다.

지난해 2월 국무조정실 부패척결추진단이 “대도시 유치원·어린이집 95곳을 골라 감사한 결과 91개 기관에서 205억원을 부당하게 사용한 사실을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당시 국무조정실과 교육부, 보건복지부가 공동으로 낸 보도자료에는 현재 세상을 시끌벅적하게 하고 있는 비리의 거의 모든 내용이 들어 있었다. 보도자료와 함께 기자들에게 보낸 ‘유치원·어린이집 분야별 위법 부당한 사례’ 자료에는 앞서 언급한 환희유치원과 서판교유치원의 비리 내역도 자세히 적혀 있었고 ‘루이뷔통’ 명품가방 영수증까지 사진으로 첨부되어 있었다. 오직 유치원 이름만 없었다. 유치원 이름이 빠진 보도가 이어졌고 엄마들은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별수 없이 아이들을 계속 유치원에 보냈다.

지난해 6월 ‘정치하는 엄마들'이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칼퇴근법'과 ‘보육 추경'의 국회 통과를 촉구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조직되지 못한 엄마들의 불안감’이란 힘이 없었다. 아이를 맡기는 입장에서 엄마 혼자서는 원장이나 교사들에게 밉보일까봐 행여 자신의 유치원이 비리 유치원은 아닐까 걱정이 되더라도 작은 질문조차 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 비리 유치원 이름이 뭡니까?”라는 질문은 나오지 않았고 정부도 유치원 이름은 비공개가 당연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렇게 국무조정실 발표가 나온 2월이 지나갔다.

생각해보면 국무조정실의 당시 발표는 엄청난 것이었다. 전국에 사립유치원은 4220개, 국공립은 4801개가 있다. 언뜻 양쪽 수가 비슷해 보이지만 국공립에는 초등학교에 딸린 한 반짜리 병설유치원도 포함돼 있다. 수용 원아 수로 따지면 사립유치원이 50만5743명, 국공립이 17만2553명으로 3배 정도 차이(2018년 4월 기준)가 난다. 당시 국무조정실이 감사한 유치원은 55곳이었다. 전체의 1%에도 못 미치는 유치원을 감사했는데 그중 54곳에서 비리가 적발된 것이었다. 위반사항이 398건, 부당 사용금액 182억원에 달했다.

국무조정실의 발표로부터 몇달이 흐른 지난해 6월 ‘정치하는 엄마들’이 출범했다. 출범 직후부터 비리 유치원의 이름을 묻고 나섰다. 엄마들은 아이를 업고 나와 비리 유치원의 이름을 공개하고 사립유치원의 회계를 투명하게 하라며 거리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각종 토론회에 참석했으며, 지난해 12월부터 여러 차례 국무조정실과 전국 17개 시·도 교육청, 100여곳의 교육지원청에 정보공개청구를 했다. 정보공개청구는 거듭 무시당했고 엄마들은 지난 5월 비리 유치원 명단 공개를 요구하며 국무조정실과 인천시교육청을 상대로 행정소송에 나섰다. 소송에 나서고서야 지난 7월 국무조정실로부터 비리 적발 유치원·어린이집 명단을 받을 수 있었다. ‘정치하는 엄마들’은 이를 언론에 제보했다.

언론이 취재에 나섰고, 이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던 국회 교육위 소속 박용진 의원과의 협업도 시작했다. 박 의원은 시·도 교육청과 교육지원청에 자료를 요청해 교육청·교육지원청 차원에서 2013~2017년 사이 감사를 벌여 비리를 적발한 유치원 1878곳의 명단과 비리 내역을 입수했다. 박 의원이 이를 국정감사에서 공개했고 큰 파장이 일었다. ‘정치하는 엄마들’이 만들어 놓은 발판 위에 박 의원이 받아낸 자료가 더해지면서 비리 유치원 문제의 심각성은 더 선명하게 세상에 알려졌다. 그렇게 ‘비리 유치원 명단 공개’라는 사건이 완성됐다.

‘부재중 전화 64통’의 추억

―비리 유치원 명단 공개를 위한 ‘정치하는 엄마들’의 노력은 어떻게 시작됐나?

장 ‘정치하는 엄마들’이 창립총회를 연 지난해 6월 국회에서 ‘새 정부 보육정책 이것은 꼭 바뀌어야 한다’라는 제목의 토론회가 있었다. 이 토론회에 우리가 패널로 참석했는데 그 자리에서 국무조정실의 유치원·어린이집 감사 내용을 더 자세히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한해 2조원 가까운 국고가 지원되지만 유치원은 감사조차 제대로 받지 않았고 감사에 적발되고도 명단이 공개되지 않았다. ‘정치하는 엄마들’은 텔레그램을 통해 활발하게 회의를 하는데 당시에도 ‘텔방’(텔레그램방)에서 논의를 하면서 비리 유치원 명단 정보공개청구에 나서자고 결정했다.

정작 해보자고 나섰는데, 사실 정보공개청구는 물론 소송에 이름을 올리는 일도 처음이었다. 유치원에 대한 감사가 워낙 원칙 없이 이루어지다 보니까 정보공개청구 대상도 모두 제각각이었다. 국무조정실 따로, 17개 시·도 교육청 따로 해야 했다. 또 교육청 산하 교육지원청별로 정보가 나뉘어 있어서 결국 100여개 교육지원청에 일일이 청구하는 일이 벌어졌다. 정보공개를 청구하기도 힘든데 하고 나면 수십 군데에서 전화가 빗발치고…. 저도 애 키우고 생활을 해야 하는 사람인데 어떤 날은 ‘부재중 전화 64통’ 이렇게 와 있더라. 전화해서는 좀 무시하는 듯한 말투로 ‘이런 건 비공개인데 뭘 알고 싶은 거냐’ 묻기도 하고…. 그 뒤에는 우체국 아저씨가 도대체 무슨 일 하냐고 물을 정도로 등기가 쏟아졌다. 전국의 교육지원청에서 등기우편이 날아오는데 대부분 ‘유치원 이름은 비공개다, 우리는 답변했다’는 식이었다. 나중에 행정소송을 하려고 보니까 정보공개청구를 한 지 90일 안에 소장을 접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몰라서 또 한번씩 정보공개청구를 더 하고, 질문을 잘못해서 비리 내용은 안 오고 비리 유치원 명단만 와서 또다시 하고… ‘맨땅에 헤딩’이 딱 맞는 상황이었다.

감사에 적발된 유치원이라 해도 전부 비리 유치원은 아닐 수 있다며 명단 공개를 우려하는 시각이 있는데, 부모들도 감사에 적발된 비리 내용을 보면 이게 단순 행정상의 착오인지 아니면 진짜 악의를 가지고 행한 고질적인 문제인지 분별할 수 있다. 그런데 비리가 적발된 유치원이 어느 곳인지 전혀 확인할 수 없고 그나마도 비공개 결정을 하는 기준 자체가 모호하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이미유치원 실명으로 감사 내용을 홈페이지에 게시하고 있던 전남지역 교육지원청 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기관에서 비공개 결정을 통보해왔다. 거듭 요청해도 대부분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 제9조 1항 5호, 6호(감사 과정에 있어 공개될 경우 업무 수행에 지장 초래, 개인에 관한 정보 공개가 사생활의 비밀 또는 자유 침해할 우려)에 의거해 비공개 결정을 한다고 했다. 비공개 처분을 취소해달라는 행정소송에 나서기로 하고 국무조정실과 인천시교육청 산하 교육지원청들을 상대로 소장을 접수하며 지난 5월30일 기자회견을 열었다. 내 이름으로 소장을 접수하려니 혹시 내가 뭔가 서류 작업을 잘못해 일이 잘못되면 어쩌나 걱정도 됐다. 추가로 서류 등을 챙기지 않아도 된다고 회원들이 이야기해줘 자신있게 소송에 이름을 걸 수 있었다.

‘운영의 자율성’이라는 논리 아래 아이들과 부모들이 접근할 수 없는 사립유치원의 세계를 표현한 그림. ‘정치하는 엄마들’ 강미정 활동가 제공

기자회견을 열고 소장을 접수하고 나니 국무조정실에서 연락이 왔다. 그제야 국가기관이 당연히 공개해야 하는 자료인데 착오로 정보공개를 거부했다며 95곳의 유치원·어린이집에 대해 벌인 감사 결과와 적발된 91곳의 명단을 7월20일 넘겨줬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국 시·도 교육청의 유치원 합동점검 담당자들은 이미 지난 7월5일 모여 ‘공개가 맞는다’라는 결론을 내려놓고 있었다. ‘비리 적발 유치원 명단을 비공개함으로써 보호되는 이익과 그 공개로 보호되는 국민의 알권리를 비교해 봤을 때 공개가 합당하다’는 서울고검 송무과와 정부법무공단의 법률자문 결과도 받은 상태였다. 유치원 이름 공개로 감사 업무에 지장을 받지도 않으며 개인 사생활의 비밀 침해에도 해당되지 않아 공개가 합당하다는 결론이었다. 그런데도 법률을 근거로 엄마들의 요구에 비공개라는 답변을 계속해온 것이어서 분통이 터졌다.

―19대 국회의원이었던 장하나 공동대표의 경우 국회의원이었다면 좀더 수월하게 자료를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조금 허탈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나?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20대 국회의원이 됐으면 ‘정치하는 엄마들’을 못 만났을 것이고, 이런 식으로 세상을 못 바꿨을 것이다. 그저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노력했을 것이다. 우리 애가 4살이라 아직 유치원에 가지도 않았으니까 비리 유치원 문제를 알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렇게 당사자로서 조목조목 애타게, 절실함을 가지고 임할 수 있는 국회의원이 있을까? 이것은 자료 하나를 받는 문제가 아니다. 지금 우리는 아이를 돌보고 키우는 당사자들이 모여 백년 묵은 적폐를 흔들고 있다. 엄마들을 만나 같이 울면서 드러내놓고 이야기하니까 보육, 교육, 노동 문제가 큰 그림으로 보인다. 어떤 국회의원도 그걸 혼자 힘으로 할 수 없을 것이다. 시민의 목소리가 녹아든 단체 활동의 힘이다. 이렇게 같이 바꿔나갈 것이 너무도 많다.

1년여 전 토요판에 ‘이제 우리 만납시다’

‘정치하는 엄마들’은 <한겨레> 토요판에서 태어났다. 지난해 3월25일, 장하나 전 의원은 <한겨레> 토요판에 ‘장하나의 엄마 정치’라는 제목의 연재를 시작했다. 딸 두리를 낳은 지 2년이 될 무렵이었다. 연재 첫회 ‘엄마들이여, 정치합시다!’란 제목의 글에서부터 그는 작정하고 ‘엄마 모임’에 시동을 걸었다. “정치에 여성(엄마)들이 나서야만 독박육아를 끝장내고 평등하고 행복한 가족공동체를 법으로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우울한 여성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여러분의 아이들과 제 딸 두리에게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사회를 전해줄 수 있습니다. 저와 마음이 통하신다면, 이제 우리 만납시다.” 기사 끝에 페이스북 주소(www.facebook.com/political.mamas)를 적어두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어떻게 엄마정치 모임을 제안했고, 또 어떻게 그걸 보고 모이게 됐나?

19대 국회의원으로 일하면서 임신과 출산을 했다. 아이를 낳고 보니 대한민국 여성들의 삶이 출산하고 망가진다는 사실이 비로소 보였다. 정치적으로 너무도 많은 문제가 있는데 대표적인 시민단체들이나 여러 노동조합에도 엄마들은 존재하지만 엄마들의 문제로 싸우는 사람은 없었다. 국회의원 재선에 실패하고 혼자 힘으로 엄마들을 조직할 수가 없었던 차에 <한겨레> 토요판 연재를 시작하는 첫 글에서 엄마 당사자들의 세력화를 제안하며 모이자고 했다.

<한겨레> 토요판을 통해 ‘우리 만납시다’라는 글을 읽을 당시는 산후우울증이 절정에 달했을 때였다. 연년생으로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고 둘째는 50일이 지난 시기였는데 몸도 마음도 너무 힘들었다. 글을 읽고 나니 이건 너무 내 얘기고 이 사람은 나야,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로서의 고충과 고민 등 모든 것이 내 얘기여서 누가 내 마음을 대필해준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모임에 나갔고 체력을 아끼느라 뭐든 소극적이었던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지난해 4월22일 첫 모임에서 생판 모르는 이들이 각자 자기 얘기를 하면서 정말 많이 울었다. 모임 이름을 어떻게 할지에 관한 논의가 시작됐고 제가 ‘정치하는 엄마들’이 어떻겠냐고 했다. 몇년 전부터 메모장에 적어둔 이름이었다. 그 순간 하나 언니가 절 보며 ‘마치 운명 같다’고 하더라. 페이스북 주소로 쓴 단체 영어 이름이 ‘정치엄마’(political mamas)라면서. 두 아이를 낳고 일을 그만둔 상태였는데 첫 모임부터 사무국장 역할을 맡아 준비위원회에 참여했고 이후 공식 출범하고부터는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정치하는 엄마들’ 회원들이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비리 유치원 엄벌을 촉구하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남궁 정치하는 엄마들을 만난 이후로 이 모임이 나에게 진짜 힘이 많이 된다. 유대감이 다르다. 우리끼리는 ‘이어달리기’라고 하는데 텔방에 어떤 일을 해야 한다고 올리면 자발적으로 서로 일손을 돕는다. 누군가 하다가 힘에 부쳐도 이어받아 할 사람이 나선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서로 100% 공감하면서 격려하며 가는 것이다. 비리 유치원 명단 공개 작업도 서로가 같은 마음으로 해왔기 때문에 여기까지 오는 게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첫 만남을 한 지 두달이 안 된 지난해 6월11일. ‘정치하는 엄마들’은 비영리단체 창립을 선언했다. 창립총회는 묵념으로 시작했다. “뼈 빠지게 착취당한 우리 엄마들을 위해 모두 같이 묵념하겠습니다.” 지난 5월 ‘정치하는 엄마들’이 펴낸 책 <정치하는 엄마가 이긴다>에서는 당시 엄마들의 감정을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의 어머니, 시어머니, 할머니, 모든 선배 엄마들의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엄마들의 삶은 태곳적부터 존재해왔으나 엄마들의 삶을 역사의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는 건 생소한 일이었다. 엄마들은 항상 국가 혹은 사회와 같이 거대한 존재로부터 외면당하고 또 착취당했다. 한 집안의 남성 가장을 주인공으로 상정하는 이 사회의 구조 속에서 엄마들은 늘 구조를 떠받치기 위해 희생을 감내해야 하는 존재였다. 이름도 없이, 그저 엄마라는 단어에 갇힌 채 강요당한 모성의 역사는 얼마나 무수했던가.”

이후 1년여 동안 ‘정치하는 엄마들’은 왕성한 활동을 벌였고 회원 수는 늘어갔다. 회원이 수십명 수준이던 초창기부터 보육, 교육, 노동, 여성 관련 토론회에 50회 이상 패널로 참석했고 ‘비리 유치원 감싸기 정부 규탄 기자회견’ 등 자체 기자회견과 성명서 발표만 30차례 넘게 했다. 시민단체와의 연대 기자회견에도 적극 나서고 엄마 당사자의 목소리가 필요한 인터뷰에는 적극 출연했다. 현재 ‘정치하는 엄마들’에 가입된 회원 수는 500여명, 페이스북 페이지 ‘정치하는 엄마들’의 참여자(멤버)는 2300여명에 이른다.

―유치원과 어린이집의 회계 투명성 강화 등에 목소리를 내면서 한국유치원총연합회(한유총) 등과의 대립도 심했다고 들었다.

‘정치하는 엄마들’이 10대 과제로 ‘보육기관 관리 감독 강화’ ‘보육기관 정보 공개 및 경영 투명화’ 등을 내세우면서 토론회나 세미나 같은 곳에서 마주친 원장들에게 야유받고 욕먹고 거의 멱살잡이까지 당한 적도 있다. 지난해 7월 서울시교육청이 국공립 유치원 확충 관련 여론 수렴을 위해 마련한 세미나도, 지난 5일 박용진 의원실이 마련한 ‘유치원 비리 근절을 위한 정책 토론회’도 한유총 원장들이 욕설과 고성, 몸싸움으로 무산시켰다. 이런 행태를 봤을 때 이들을 압박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비리 유치원 이름을 공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비리를 저질러도 이름이 공개되지 않으니까, 익명성 뒤에 숨을 수 있으니까 부끄러움 없이 비리를 저지르는 것이다. 악성댓글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알권리라는 말이 있다고 생각한다. 비리 유치원 이름과 그 유치원 원장이 누군지 공개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제가 토론회 패널로 참석할 때면 방청석에 앉아 있는 ‘정치하는 엄마들’ 회원들 옆에서 원장들이 저를 보고 쌍욕을 한다더라. “집에서 애나 볼 것이지 기어나와서 난리냐” “직장도 없이 경단녀(경력단절여성) 돼서 사회운동 한다고 다닌다”는 등 욕을 하다가 “그냥 파업하자, 맞벌이 가정에서 별수 있겠어” “어차피 워킹맘들은 우리 볼모야, 우리가 휴원하면 워킹맘들 난리난다”는 말까지 해 회원들이 놀라곤 했다. 1년 전 한유총이 정부 재정 지원 확대와 국공립 유치원 증설 정책 폐기를 주장하며 집단 휴업에 돌입하겠다고 나선 것은 결국 사립유치원 원장들이 교육자가 아닌 사업자의 모습만을 드러낸 행태다. 그 당시에는 엄마들이 화가 나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조직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웠다. 이번 비리 유치원 명단 공개는 ‘정치하는 엄마들’이라는 조직된 엄마들이 이뤄내고 이후 대응까지 맡아서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엄마들의 ‘든든한 뒷배’가 된 듯해 뿌듯하다.

전수 감사에 당사자 참여 늘려야

―교육부가 유치원 전수 감사와 신고센터 운영 등 대책을 발표했다. 엄마 당사자 입장에서 앞으로 이 분노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길 바라는가?

남궁 전 유치원 운영위원이다. 우리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은 한달에 원비 40여만원을 내고 분기별로 12만원의 특별활동비와 1년에 180만원의 기타경비를 낸다. 그런데 운영위원이어도 회계장부를 볼 수가 없다. 회계 내역을 보고 싶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와도 행여나 내 아이가 미움을 받을까봐 말을 못한다. 원장은 운영위원회가 의결기관이 아니라 자문기관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운영위를 여는 것도 원장 재량이다. 반면 국공립은 회계 내역을 공개하게 한다. 사립유치원 감사를 위해 기존 운영위원들, 엄마아빠 당사자들이 어떻게 참여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법적으로 그 길을 열어줬으면 좋겠다. 유치원 원장들의 자금 유용과 회계 비리도 물론 화나는 일이지만, 급식 비리나 위생상의 문제, 중대 안전사고가 났을 때 보고하지 않은 일 등으로 감사에 적발된 유치원도 여러 군데였다. 그 유치원 이름들마저 당장 확인할 수가 없다는 게 너무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된다. 전수 조사를 하려면 앞으로 인력이 문제가 될 것이다. 감사에 유치원에 아이를 보내는 운영위원이나 학부모 당사자들이 적극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지난해 성명을 낼 때부터 감사에 당사자 참여를 보장하라고 이야기해왔다. 또 회계 프로그램인 ‘에듀파인’을 사립유치원에도 무조건 도입하고 장기적으로는 국공립 단설유치원을 확충해야 한다.

사실 앞으로 전수 감사를 한다는데 얼마나 제대로 될까 걱정이 된다. 제 지인이 비리 유치원에 아이를 보내고 있었는데 특별활동비를 차명계좌로 받더란다. 그래서 유치원 원장이 돈을 차명계좌로 받는데, 이걸 어디로 신고하면 되냐고 교육청에 물으니까 그건 교육부 소관이 아니라면서 국세청에 신고를 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 유치원이 이번 공개된 명단에도 올라 있는데 비리 내역에 차명계좌 건은 들어가지 않았다더라. 전수 조사 한다 해도 회계를 얼마나 투명하게 조사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남궁 ‘교육자치’라는 말이 좋기는 한데 어떤 교육청은 비리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고 어떤 데는 너무 간략하게 쓰여 있다. 이번에 보면 경기도교육청이 가장 의지를 갖고 감사를 해서 환희유치원 등의 내용이 상세하게 기술된 것으로 안다. 지역별로 감사의 시기와 정도가 너무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부분에 대한 조정과 기준 확립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정치하는 엄마들’은 20일 토요일, 서울 시청역 4번 출구 앞에서 단체 이름으로 주최하는 첫 집회를 연다. ‘유아교육·보육 정상화를 위한 모두의 집회’라는 제목이다. 집회의 형식은 ‘아이들과 함께, 웃고 떠드는 상냥한 집회’라고 한다. 엄마들만 몰랐던, 엄마들은 몰라도 된다던 세상을 향해 한번 존재감을 드러낸 엄마들의 행보는 거침이 없다. 비리 유치원 명단 공개 다음으로 엄마들은 비리 어린이집 명단 정보공개를 청구해둔 상태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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