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 해체는 '환승'입니다 [기고]

서범경 한국원자력연구원 해체기술연구부장 2018. 10. 25.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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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얼마 전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후 유명해진 인도네시아의 ‘롬복’이라는 섬이 있다. 잦은 지진으로 세계의 이목을 끌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의 한적한 시골마을에 시인인 친구가 정착하여 살고 있다. 친구의 안부가 궁금할 때마다 시인인 그의 등단작인 ‘환승입니다’가 떠오른다.

지금 우리나라 원자력 분야도 ‘환승’을 준비 중이다. 정부는 2017년 10월 에너지전환 정책에 대한 중장기 목표와 방향을 담은 로드맵을 수립했다. 원전의 단계적 감축, 재생에너지 확대, 지역·산업 보완대책이 포함돼 있다. 우리나라도 이제 원전 해체가 본격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설계수명에 도달한 원전의 계속 운전 여부는 경제성, 안전성, 전력 수급, 국민 의견 등을 종합해 결정한다. 영구정지가 결정되면 해체 과정을 밟는다. ‘해체’란 원전의 운전 과정에서 생성된 방사성물질을 제거하고, 해체 과정에서 발생한 방사성폐기물을 안전하게 처리한 후 건설 이전의 깨끗한 자연환경으로 되돌리는 모든 과정을 뜻한다.

흔히 해체는 건설의 역순(逆順)이라고들 한다. 한편으로는 맞는 말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틀린 말이다. 일반 시설의 경우는 건설의 역순으로 작업을 하면서 마지막에는 구조물을 폭파시켜 철거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건설보다 해체가 더 쉽다는 말도 나온다. 그러나 원자력시설과 같이 방사성물질로 오염된 시설은 법적 기준 등을 충족하면서 해체를 해야 하기 때문에 일반 시설과 같은 방법으로는 해체할 수가 없다.

해체 과정에서는 다량의 방사성폐기물이 일시에 발생한다. 이들을 안전하게 관리하고 처리하기 위해서는 발생에서부터 최종 포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단계를 거쳐야 한다. 그러나 방사성폐기물을 처리할 수 있는 시설과 장비 등은 제한적이어서 한꺼번에 대량으로 취급하기가 어렵다. 때문에 해체 단계별로 발생하는 방사성폐기물을 제한된 양만 처리할 수밖에 없고 작업시간도 오래 걸린다. 이러한 이유로 원자력시설의 해체에는 일반 시설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다.

영구정지 후 바로 해체하지 않고 천천히 해체한다면, 방사성 붕괴로 방사선 준위가 줄어들어 해체가 좀 더 쉬워질 수도 있다. 실제 해체 과정에서 작업자의 피폭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핵종은 감마선을 방출하는 Co-60이다. Co-60은 방사능의 세기가 반으로 줄어드는 시간이 약 5년 정도라 시간을 두고 해체를 한다면 충분히 방사선 준위가 낮은 상태에서 작업을 진행할 수 있다. 그러나 반감기가 긴 다수의 핵종들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폐기물 양이 급격하게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반면, 영구정지 후 바로 해체를 시작하면 시설의 특성을 잘 알고 있는 시설 운영 인력들을 곧바로 해체작업에 투입할 수 있기 때문에 지식 전달 측면에서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기술적 또는 정책적인 문제가 있지 않은 이상, 대부분의 국가에서 즉시 해체를 선호하는 이유다.

현재 운전 중인 많은 원전들이 1970년대 전후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설계수명과 계속운전을 고려하면 2020년대 이후 해체 수요가 급격하게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세계 원전 해체시장 규모는 영구정지와 운전 중인 모든 원전을 합하면 약 500조원이 넘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에 따라 미국, 유럽연합(EU) 등 선진국을 포함한 기존의 원전 건설 및 원자력 전문업체들이 세계시장 진출을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나라와 같이 해체 분야 후발주자가 세계 시장에 진출하기 위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와 노력이 필요하다. 보통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는 환승에 따른 추가 비용이 들지 않는다. 그러나 원자력과 같이 특수한 분야는 제대로 환승을 준비하지 못하면, 많은 비용이 소요되고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다.

서범경 한국원자력연구원 해체기술연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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