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하청 피라미드에 묻힌 여성 IT노동자의 죽음

정제혁·이효상 기자 2018. 10. 26.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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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외국계 증권사 5단계 파견 구조
ㆍ프리랜서 웹디자이너 1년 만에
ㆍ계약연장 빌미 술자리 후 실족사
ㆍ검찰 ‘무혐의’ 공단 ‘산재 거부’
ㆍ이철희 의원 “용역직 보호 절실”

프리랜서 웹디자이너 장모씨(여)는 2015년 10월부터 유명 외국계 증권사인 ㄱ사의 모바일 거래시스템 구축 프로젝트에 투입돼 일했다. 장씨가 채용된 과정은 복잡했다. ㄱ사는 소프트웨어 개발사인 ㄴ사에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제작을 의뢰했다. ㄴ사는 기업 홈페이지 제작 업체인 ㄷ사와 웹디자이너 1명에 대한 용역 계약을 체결했다. ㄷ사는 인력파견 업체인 ㄹ사와 같은 계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ㄹ사는 장씨와 프로젝트에 대한 용역 계약을 체결했다. 고용 피라미드의 맨 밑바닥에 장씨가 있었다.

프로젝트팀은 ㄱ사에 상주하며 작업했다. ㄱ사 직원 3명, ㄴ사 직원 11명, 장씨 등 총 15명이 함께 일했다. 장씨는 ㄹ사와 용역 계약을 맺었고, 그래서 장씨의 법적 고용주는 ㄹ사였지만 실질적 사용자는 2차 하청업체인 ㄷ사였다. 장씨의 채용 면접을 본 것도, 장씨 명함에 적힌 소속사도, 장씨의 생살여탈권을 쥔 것도 ㄷ사였다.

프로젝트 종료를 1개월 앞둔 2016년 3월 사건이 발생했다. ㄷ사 임원인 ㅁ씨가 용역 계약 연장 문제를 논의하자며 저녁 식사를 청했다. 장씨는 자신의 고용 문제를 논의하자는 이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ㄱ사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한 뒤 2차로 옮겨 술을 마셨다. ㅁ씨는 만취한 장씨를 호텔로 데려갔다. 호텔 4층 객실을 잡은 ㅁ씨는 카드 지갑을 찾으러 1층으로 내려갔고, 그사이 장씨는 맨발로 객실에서 뛰어나와 비상계단을 통해 내려가다 추락했다. 정직원으로 있던 증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전업한 지 불과 1년 만에 장씨는 그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유족은 장씨가 성폭행을 피해 달아나다 실족했다고 주장했다. 장씨가 엘리베이터가 아니라 비상계단을 통해 내려가려 한 점, 엘리베이터에서 ㅁ씨가 장씨를 끌어내는 모습이 담긴 호텔 폐쇄회로(CC)TV 등을 근거로 들었다. 하지만 검찰은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했다.

파견직의 설움은 죽은 뒤에도 장씨를 따라다녔다. 유족은 장씨 죽음이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며 유족급여와 장의비를 신청했지만 근로복지공단은 “프리랜서인 장씨는 개인사업자”라며 거부했다.

정보기술(IT) 산업 파견 노동자의 죽음은 이렇게 공적 시스템에서 지워졌다. ㄱ사, ㄴ사, ㄷ사, ㄹ사 어느 곳도 사과하거나, 배상하거나, 책임지지 않았다. 고통은 유족의 몫이었다. 장씨 모친은 사건 충격으로 뇌 수술을 받은 뒤 후유증에 시달린다. 부친은 25일 통화에서 “사건 당일 딸이 출근하면서 조카에게 ‘일찍 들어올 테니 저녁 같이 먹자’고 했다. 그래놓고 나가서 그리 됐으니 황당하다”고 했다.

장씨의 죽음에는 다단계 고용 구조, 불안정 노동, 갑을관계, 취약한 사회안전망, 성폭력, 성범죄 피의자보다 피해자에게 엄격한 입증 책임을 요구하는 사법시스템 등 우리 사회의 부조리가 집약돼 있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이철희 의원실과 함께 이 사건을 조사한 한국정보통신산업노조(IT 노조)는 “장씨 사건은 현재 IT 업계에서 나타날 수 있는 모든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고 했다.

이 의원은 “3개 이상의 고용주를 두었으면서도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한 채 억울하게 삶을 마감하는 제2의 장씨가 다시는 없도록 특단의 조치를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제혁·이효상 기자 jhju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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