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의 인터스텔라] "집값은 존재값.. 졸지에 부자되면 삶도 버블될 것" 건축가 승효상

김지수 대중문화전문기자 2018. 10. 27.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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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재생 건축가의 낭만 아냐… 질좋은 주거, 아파트에만 있지 않아"
"건축은 미학아닌 윤리… 집값 비싸다고 존재값 올라가지 않아"
"자녀에게 물려도 주는 유럽형 임대주택, 희망 가져야"

국가건축정책위원장 승효상(65세). 동아대석좌교수이자 건축사무소 이로재 대표.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대학원을 거쳐 오스트리아 빈 공과대학에서 수학했다. 승효상에 따르면 건축은 공간으로 구축되지만 시간으로 완성된다./사진=고운호 기자

승효상을 만났다. 한국이미지커뮤니케이션연구원(CICI)이 주최하는 리더의 지식 포럼 CQ에서였다. 용산의 한글박물관은 그의 유명한 강연인 ‘지문(地文 땅의 모양-landscript)'을 듣기 위해 모인 각국의 대사와 인플루언서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승효상은 특유의 흐트러진 은발에 온화한 미소를 띤 채 ‘우리는 어디에 어떤 집을 짓고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이야기했다.

요는 이렇다. 서양 건축이 드높은 마천루(Skyscraper)로 오만함을 과시해왔다면, 우리 조상들은 집을 땅과의 조화로운 관계로(Landscript)로 파악했다. 서양의 도시계획이 평지에 세워진 위계형 마스터플랜이라면, 우리 조상들은 산과 계곡의 위에 집을 슬쩍 얹은 형태로 땅의 모양을 해치지 않고 살아왔다.

시를 짓고, 밥을 짓고, 옷을 짓고 농사를 짓듯이 집을 짓고 어울려 살았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서양에서조차 ‘갈등을 부추긴다'며 폐기된 마스터플랜식 도시 계획이 이 땅에 마구잡이로 이식됐다. 땅과 도로와 집에 매겨진 등급은 인간의 삶을 헤집고 갈등의 뿌리를 드러냈다. 그렇게 땅의 무늬를 없애고 지어진 ‘터무니 없는 집', 역사를 밀어버린 불구의 땅에서 불안한 삶이 시작됐다.

승효상은 우리가 불행하게 느낀다면 그것은 잘못된 도시 계획의 결과라고 했다.

다음날 아침, 대학로에 있는 그의 건축사무소 이로재(履露齋)를 찾았다. 2015년부터 2년간 서울시 총괄 건축가로, 지금은 대통령 직속 건축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아 활동 중인 그에게 현실적인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였다. 전 국토가 부동산 광풍으로 몸살을 앓다 숨죽인 지금, 집은 우리에게 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살 수 있는가.

승효상은 "집값은 자기의 존재값"이라며 "집을 사고파는 것은 자기 존재를 사고파는 것"이기에 "터무니없이 비싼 집은 버블이고, 내 존재도 버블이 되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나아갈 방향은 자식에게 물려줄 수도 있는 유럽식 임대주택이라 덧붙이며.

건물공동체(urbs)가 아닌 사회공동체(civitas)로서의 삶. 달동네를 미학의 원형으로 둔 승효상의 ‘빈자의 건축 철학'은 부산의 난민촌에서 태동해 오스트리아 빈 공과대학을 거쳐 완성되었다.

-‘지문’이라는 단어가 신선합니다. 선생이 처음 만든 신조어지요?

"그렇습니다. 위키피디아에도 승효상이 처음 만들었다고 돼 있어요(웃음). 지문은 땅의 무늬, 터의 무늬에요. 우리말에 ‘터무니없다'는 말이 있는데 근본이나 원리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터 무늬가 지워진 곳에 살면 터무니없이 살게 되죠(웃음). 그런데 최근에 정도전도 이 말을 썼다는 걸 알았어요."

-한양도성을 설계한 정도전 말입니까?

"네. 제가 정도전을 참 좋아해요. 그가 쓴 글에 지문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거기선 천지인, 운율을 맞추기 위해 썼더군요. 정도전은 훌륭한 건축가입니다. 그는 조선의 수도로 한양 땅을 고르고 도시의 윤곽을 만들었어요. 건물의 이름도 지었지요. 어떤 건물에 이름을 붙인다는 건 생명을 불어넣는 행위인데, 정도전이 경복궁 궁궐에 붙인 이름을 보면 그 사상의 깊이와 높이에 머리가 아득해지지요."

한국이미지커뮤니케이션연구원(CICI)이 주최하는 리더의 지식 포럼 CQ에서 그의 유명한 ‘지문' 강연을 듣기 위해 각국의 대사들이 모였다. 모든 땅에는 과거의 기억이 손금의 지문처럼 남아 있다고 말하는 승효상./사진=고운호 기자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서울 편'에 보면 산악 지역인 한양이 조선의 수도로 낙점될 때의 극적인 상황이 나오더군요. 서울은 이제 국제도시가 됐습니다.

"당시엔 비행기도 없으니 산에 올라가서 내려다본 거죠. 하나의 도시를 설계한다는 건 자신을 타자화시켜야 가능한 일입니다. 위에서 내려다봐야 하지요. 산에서도 안 보이는 건 머릿속의 상상에서 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범위까지 보는 게 배치도고 평면도예요. 그 입장을 갖기가 쉽지 않습니다."

나를 타자화 객관화해서 전체 그림을 보는 능력은 보통 사람에겐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선생은 어떤가요?

"저는 훈련으로 취득을 했습니다."

-서울을 위에서 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속상한 것 천지입니다. 잘못 가꾸어진 것들이 많아요. 하지만 서울은 희망이 있어요. 인구 1천만 명의 메가시티는 전 세계에서 20개 정도인데, 서울은 그 중 유일하게 산이 있는 도시예요. 건축도 수명이 다하면 언젠가는 없어지는데, 산은 없앨 수 없죠. 언젠가는 원점을 회복할 도시예요. 아무리 망가져도 돌아갈 원점이 있는 거죠. 그게 희망입니다. 세계의 다른 도시들은 다 평지에 지어졌어요. 그래서 건물이 없어지면 어디로 갈지 몰라 길을 잃지요."

-도시의 산밑에 일군 ‘달동네'를 중심으로 공동체와 빈자의 미학을 역설하셨습니다. 그러나 땅과 집에 대한 한국인의 욕망과 갈등은 이제 일상의 투쟁이 됐지요. 어떻게 보십니까?

"우리나라 GNP가 전 세계 27위입니다. 그런데 행복 지수는 80위예요. 보통 GNP가 10위면 그 도시의 행복지수도 10위 권 안에 드는데, 이상한 경우에요. 우리는 돈만 있지 행복하지 못합니다. 이 불균형이 도시 구조에 있습니다."

-도시 구조가 한국인의 불행을 만들었다?

"처칠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건축을 만들지만, 다시 건축이 우리를 만든다'고. 부부가 같은 공간에 살면 닮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사는 공간을 닮게 되어 있지요. 어린 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살기 힘들다’는 소리를 들었고, 정권은 오직 ‘경제 경제 경제'를 소리높여 외쳤어요. 이젠 잘 살게 됐습니다. 행복을 위해 돈을 벌었지만, 이젠 행복하지도 않으면서도 계속 돈을 벌어야 한다고 하죠. 진짜 행복이 뭔지, 어디서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지 공공의 영역에서 제안해줘야 한다고 봅니다."

-시민들은 더 깨끗하고 설비가 좋은 집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선생은 금호동 달동네에서 건축의 이상을 봤지만, 이제 그곳은 ‘호재’를 거쳐 다 무슨 무슨 힐로 재개발됐지요. 재건축통제와 선생이 주도한 도시 재생 프로젝트도 공격하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부동산 증식을 막고 돈을 못 벌게 해서 화가 난 거죠. 그런데 그런 욕망은 하루 빨리 버리는 게 좋습니다. 부동산으로 돈 버는 것만큼 허망한 게 없습니다. 그건 국가 경제에 전혀 도움이 안 돼요. 생산을 합니까, 번식을 합니까. 피땀 흘려 번 돈은 칭찬받아 마땅하지만, 불로소득은 공공이 거둬가는 게 마땅합니다. 안 그러면 타인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 막혀요. 파편화 되죠.

모로코의 마라케시나 페즈를 보면 1200년 됐는데도 도시가 하나의 유기체 같습니다. 열 개 내외의 집과 시설이 모여 하나의 군락을 이루고 도시 전체가 연결되어 있어요. 행복하게 살려면 그렇게 집이 나의 존재의 확장이라는 걸 알아야 해요. 실제로 집에 부동산 개념이 들어온 건 얼마 안 됐어요. 박정희 정권 이후부터니까요."

승효상이 극찬하는 모로코의 페즈. 9천 개의 골목이 미로처럼 얽혀있는 도시. 중심과 주변, 상업 지구와 주거 지구의 구획 없이 튼튼한 벌집형 군락을 이뤘다.

-하지만 지금 전 세계는 부동산 광풍으로 몸살을 앓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유럽 한가운데 있는 오스트리아 비엔나는 9년째 삶의 질이 세계 1위에요. 그곳 사람들은 67% 임대 주택에서 살죠. 집이 소유나 임대냐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북유럽도 그렇죠. 알고 보면 뉴욕, 런던, 파리 등 세계 주요 도시 몇 %만 부동산으로 들끓어요. 몹시 나쁜 예죠."

-서울이 그 나쁜 예 중 하나가 된 건 왜입니까?

"옛날 주택이 모자랐던 시절에 주택 공급을 건설회사에 일임하고 특혜를 줬어요. 건설회사가 만든 게 아파트 단지예요. 담을 치고 게이트를 만들어 도시의 섬을 세웠죠. 그 안의 도로조차 사유지예요. 그 섬이 성이 되어 폐쇄적 공동체가 되고 다른 성보다 값을 올리려고 적대적 공동체가 됩니다. 주택공사가 그 적대적 공동체를 타파해야 하는데, 이명박 정부 시절에 공공기관도 돈 벌어야 된다고 하니, LH공사조차 싼값에 공급하고 손해봐야 한다는 본분을 잊고 민간보다 더 상업적 이익을 추구했어요. 무엇보다 선분양제가 나쁜 역할을 했지요.’

-선분양제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특이한 제도지요.

"그러니 바꿔야죠. 건설회사의 이윤과 로비 등 오랜 습관이라 단번에 바꾸기는 힘들어요. 하지만 후분양제가 되면 집이 공급자 마음대로 안 돼요. 소비자가 ‘안 사!’해버리면 끝이죠. 판이 바뀌는 거예요. 주택에 관한 생각이 바뀌면 전체 행복의 판도가 바뀝니다."

-소비자들이 원하는 주택의 판도는 어떻게 바뀌고 있습니까?

"예컨대 1인 가구가 많이 늘어났는데 건설사는 2베드, 3베드 집만 공급하고 있어요. 돈 있는 1인 여성이나 남성을 위한 집도 지어야죠. 반면 돈 없는 청년들은 집 안에 부엌, 욕실 다 가질 필요 없어요. 공유하면 되죠. 이들이 살 수 있도록 공유 주택과 더 나아가 공유 마을을 만들어줘야 해요. 그래야 개인도 살고 공동체도 살 수 있어요. 시대가 바뀌면 그에 맞는 공급이 따라줘야 해요. 예지력 있는 건축가가 선도적으로 치고 나가야 하는데, 지금은 시장의 욕구를 따라만 가고 있죠. 이런 아우성은 아무리 맞춰줘도 끝내 만족을 못 해요."

오스트리아 빈은 9년째 삶의 질이 전세계 1위인 도시. 임대주택의 천국이다.

-지금 정부는 잘하고 있다고 봅니까? 공급 부족 패러다임에서 선회해서 이제는 신도시를 만들고 그린벨트를 해제해야 한다고 하는데요.

"국민이 어디서 어떻게 사는 게 행복한지 정하고 바꿔나가야 하는데, 쉽지 않죠. 부동산 가격 떨어뜨린다고 욕을 먹고 있으니… 하지만 정부가 만들려고 하는 것도 신도시가 아니라 주택단지의 볼륨을 키우려는 겁니다. 우리나라 주택이 인구에 비해 부족하지 않아요. 다만 국민 자신이 30평대 강남 아파트가 주택의 본보기라는 틀을 깨트려야 해요."

-선생은 아파트를 한 번도 설계한 적이 없지요?

"한국에선 없어요. 지금의 관습대로 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중국에서는 아파트를 설계했습니다. 중국 건설 시장의 주체는 건설사가 아니에요. 디벨로퍼(부동산개발업자)가 땅을 불하받으면 좋은 건축가를 초빙하고, 좋은 건축가의 설계 힘으로 규격화되지 않은 공동주택을 공급합니다. 그런 아파트는 건축가 이름으로 팔려요. 건설사 이름이 아니라.

반면 우리나라 아파트는 어떤가요? 공동주택이라고는 하지만 공동체적 삶을 지향하지 않아요. 붙어살 뿐 모여 살지 않죠. 주차장에서 집으로 직행하는 집은 옆집에 누가 사는 지도 몰라요. 죽어도 며칠 만에 발견되죠. 그건 집합 주택이지 공동 주택은 아닙니다. 커뮤니티센터는 법규상 만들어놓기만 할 뿐, 공동체 인식이 없으니 허울뿐이죠."

-붙어살 뿐 모여 살지 않는다… 뼈아픈 말이군요. 하지만 선생이 추구하는 공동체 복원으로서의 도시 재생도 속도가 더딘 편인데요.

"중계동의 백사마을은 오세훈 시장 시절에 허물고 아파트를 지으려 했다가 보존재개발 쪽으로 방향을 틀었어요. 1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습니다만, 저항이 있어 쉽지 않아요. 몇십 년간 지속한 익숙한 시스템을 혁명적으로 바꾸기는 어렵죠. 하지만 멈출 수가 없어요. 저는 임기도 끝나가고 기력도 쇠해가지만, 누군가는 이어서 해야 해요. 좋은 마을의 샘플이 생기면 다들 수긍할 거라 믿습니다."

-달동네 사람들도 쾌적한 곳을 꿈꾸지 않겠습니까? 땅의 모양대로 땅의 이야기를 들어서 짓는 건축은 어쩌면 건축가의 낭만적 유토피아가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듭니다.

"그들의 꿈이 과연 아파트에서의 삶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중산층의 주거 형태로 아파트밖에는 상상을 못 해서죠. 서구 선진 사회의 도시 형태를 몰라서 그런 겁니다. 우리나라 주택은 단독, 연립, 아파트 3가지예요. 하지만 연립 같은 아파트, 아파트 같은 단독 주택도 얼마든지 있어요. 건축가는 사람들의 삶을 담보로 실험하지 않습니다."

높낮이 없이 고요하던 승효상의 목소리가 ‘낭만적인 유토피아'라는 대목에서 갑자기 커졌다.

"건축가들이 왜 밤을 하얗게 새우는지 아세요? 그건 자기가 긋는 선 하나가 삶을 바꾸기 때문입니다. 이 선이 이 사람의 삶에 선일까, 악일까… 그걸 고민하며 수도 없이 밤을 지새웁니다. 타인의 삶으로 건축 실험을 할 수는 없어요."

도시 재생으로 범죄율을 80% 낮춘 콜롬비아 메데인(Medellin).

-도시재생 한다고 골목마다 그려진 벽화는 어떻게 봐야 하나요?

"벽화는 가시적인 겁니다. 재생에 필요한 사람은 미술가가 아니라 건축가죠. 바꿔야 할 것은 공간이에요. 집 한 채를 허물어서 마당이 있는 흥미로운 공간을 만들면 아이들이 모이고 사람이 모여요. 콜롬비아의 메데인이라는 도시도 건축을 공부한 시장이 가난한 슬럼가에 작은 도서관, 공연장, 학교를 지어서 범죄율을 80%나 줄였어요.

다만 재생은 빠른 시간 안에 효과를 보기 힘들어요. 콜롬비아도 10년 걸렸어요. 기다려야죠. 지금 건축가들이 창신동 등 재생 지역에 파견돼서 주민들과 긴밀하게 소통하고 있어요. 과정이 중요하니 느려도 기다려야 합니다."

-을지로나 서촌, 익선동, 해방촌 등에서 일어나는 젠트리피케이션은 어떻게 보십니까? 터의 무늬가 보존되더라도 또 다른 문제가 생기지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라는 말이 마냥 나쁜 건 아니에요. 환경이 젠틀해진다는 거죠. 원주민이 쫓겨나는 문제는 정책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오른 임대료를 공공으로 환수하면, 오를 이유도 없어집니다. 한편으론 부작용으로 쫓겨난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해서 환경을 바꾸면 도시 전체가 점점 젠틀해지는 겁니다. 도시는 꿈틀대는 생명체예요. 가만있으면 죽죠.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나도 전체적으로 도시 전망은 결코 비관적이지 않습니다."

-1세대 건축가 김수근의 ‘공간’에서 15년을 일했습니다. 지금 건축 철학의 기초는 그때 만들어진 건가요?

"김수근 선생에게 배웠지요. 건축가는 무엇을 하고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무엇을 배웠습니까?

"여자와 프로젝트는 쫓아다니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웃음). 김수근 이전의 건축은 설계의 청사진을 만드는 정도였습니다. 대접도 못 받았죠. 그분에게 건축의 본질은 ‘공간’이라는 걸 배웠습니다. 그전까지 건축은 형태로 간주했어요. 외형으로 봤죠. 그러나 외형보다 중요한 건 내부 구획입니다. 어떤 건물이 눈물 나게 아름답게 느껴졌다면 그건 공간이 주는 감동이에요. 벽, 천장, 바닥 모양은 공간을 만드는 수단일 뿐이죠."

-장식이 과한 건축물을 경계해온 건 본질을 흐리기 때문인가요?

"형태는 공간을 감싸는 정도로 충분하니까요. 어떤 건축물이 유명해지는 건 매우 쉽습니다. 비틀거나 현란한 색을 칠하면 돼요. 하지만 좋은 건축은 좋은 공간을 만드는 겁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의 삶이 돋보여야죠. 건물이 화려하면 삶이 돋보이겠어요?’

실제 간소한 건물을 과시적인 기둥과 처마, 돔으로 둘러싸서 최악의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힌 국회의사당.

-대표적으로 청와대나 국회의사당을 허위의식이 낀 나쁜 형태의 건축물로 지적하셨는데요.

"맞습니다. 과시적이죠. 국회의사당은 그 기둥과 지붕이 대표적이고요. 청와대는 내부 구조가 형편없습니다. 관저에는 빛도 잘 안 들고 환기도 안 되죠. 그런 건물에 거주하면 삶의 질이 나빠져요. 생활의 질이 나빠지면 불행해지죠. 안타까운 일입니다."

-무리한 요구를 하는 건축주에게 "이건 당신 집이 아니다. 사용권은 당신에게 있지만, 소유권은 시민과 사회에 있다"고 일갈한다고 들었습니다. 수긍을 하던가요?

"(웃으며)초창기엔 상처받고 헤어지는 경우가 많았죠. 그 다음부터는 건축주는 내가 선택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온다고 다 받으면 상처만 남아요. 이젠 대부분 그런 저의 성향을 알고 옵니다. 그래서 돈 되는 일을 못 해요(웃음). 대안학교 사람이 만드는 공동체 마을이나 공동묘지 설계 일을 맡아서 했지요. 보람 있는 일입니다."

-부자를 위한 설계는 안 합니까?

"최근엔 어떤 돈 많으신 분이 수목원을 만드는 일을 함께하고 있어요."

-그럴 때 빈자의 미학과 부자의 미학은 선생의 철학 안에서 어떻게 공존합니까?

"그 수목원은 자기 이익이 아니라 오로지 후대를 위한 작업입니다. 그리고 제가 주장하는 빈자의 미학은 가난한 자의 미학이 아니에요. 가난할 줄 아는 자의 미학이지요. 건축은 돈이 들어가는 일이고, 건축가는 필연적으로 돈 있는 사람과 일을 합니다. 다만 이웃과 후대를 위해 겸손하고 검박하게 짓자는 거지요. 100층으로 지을 수 있지만, 공동체를 위해 30층으로 짓자는 거죠."

-자본주의에서 그런 설득이 가능한가요?

"금전적으로 손해를 끼치면 안 되죠. 생각을 바꾸면 됩니다. 가령 대학로의 샘터 빌딩 1층은 반을 비워서 통행로로 내줬어요. 그 비싼 땅에 당장의 이익만 생각하면 그렇게 못했겠죠. 지금 그곳은 사람이 드나들고 비가 오면 몸을 피하는 장소예요. 사람을 기쁘게 하니 그 건물 카페도 장사가 잘돼요. 사회에 이익이 되면 랜드마크가 되고 임대료도 올라가죠. 그렇게 멀리 보도록 건축가가 꾸준히 권유하는 거죠."

-땅은 귀찮은 것이니 죄다 평지로 만들어 위계와 구획이 정확한 도시를 만들자는 도시계획은 그 발상지였던 서양에서조차 폐기된 지 오래라고 하셨어요.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는 어딘가요? 마라케시? 산토리니?

"제겐 여전히 서울입니다."

-서울이 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고요?

"북악산에 올라가서 남쪽을 보세요.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가 없어요. 산들의 산세가 도시 안에 있고 그 사이로 한강이 흘러요. 건축이 아무리 개판이라도 도시 지형의 풍광에 묻혀 버리죠. 천만 인구의 메타 도시 중 가장 아름다워요. 파리, 런던, 비엔나는 오히려 하이퀄리티가 지루해질 때가 있어요. 서울은 천방지축이에요. 지고의 선과 지고의 악이 공존하고 여전히 꿈틀댑니다."

서울로 7017은 승효상이 서울시 총괄 건축가로 있을 때 진행한 프로젝트다. ‘공중 정원'이라는 애초의 설계안은 일종의 수사적 표현이며, 긴밀한 도시 네트워크가 핵심이다.

-서울역 고가도로를 개조한 ‘서울로7017’의 설계자 위니 마스도 서울의 경관에 감탄하더군요. 다이나믹하다는 거죠.

"서울로 7017은 처음에 박원순 시장이 ‘뉴욕 하이라인'을 거론하면서 오해를 불러일으킨 면이 있어요. 서울로는 공원이 아니라 철도와 도로로 절단된 거리를 잇는 도심 네트워크예요. 제가 설계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는데 위니 마스의 ‘공중 수목원'은 일종의 수사였죠. 나무는 부분일 뿐이었는데 개장 후엔 다들 식재 얘기만 하더라고(웃음). 지금은 산책 보행로로 역할을 잘하고 있어요. 시민들이 서울역, 남산, 남대문 등 17개 연결망을 두 발로 걸으며 느끼는 거죠."

-지금 서양 건축의 트렌드는 어떻습니까? ‘덜 미학적이고 더 윤리적인 건축’이라는 20세기 베니스비엔날레의 명제가 여전히 유효한가요?

"글쎄요. 지금은 사조가 없어요. 시대를 아우르는 메인스트림이 없는 백가쟁명의 시대입니다. 각자의 주장이 얼마나 합리성을 갖느냐 하는 다원적 민주주의 시대가 열린 거죠. 나는 땅의 무늬인 지문을 주장하지만, 누군가는 천문(하늘의 무늬)을 주장할 수도 있어요."

-하늘의 무늬를 보자면 아무래도 높이 올리려는 층수 경쟁이 앞설 텐데요.

"직립형 인간의 욕망이죠. 땅은 좁고 인구가 많으니 가파르게 올리고 그걸 도시의 랜드마크로 만드느라 혈안이 돼 있었어요. 하지만 최고층 건물을 짓겠다는 욕망도 이젠 시들해진 듯합니다. 건축계에선 이미 그런 경쟁이 없어졌어요."

-국내에선 한때 협소주택이 유행이었습니다.

"돈은 없고 소유는 이루고 싶고. 그걸 뭐라 할 수는 없어요. 사실 그보다는 행복하게 잘 살겠다는 희망을 품는 게 더 건강하고 빨라요."

-이를테면?

"임대주택입니다. 행복하게 잘 사는 희망이 거기 있어요. 법적 보호장치만 잘 마련되면 가능합니다. 비엔나는 자기가 머물던 임대 주택을 아들딸에게 물려줄 수도 있어요. 민간이든 조합이든 다 그래요. 임대권을 물려주는 건 물론이고 전세도 재임대할 수 있죠. 소유와 임대가 큰 차이가 없는 건 부동산 가격이 잘 컨트롤 돼서예요."

-하지만 우리 국민들은 당장 어디서 살 지가 고민입니다.

"집을 살 수 있으면 사세요. 살 수 없으면 사려고 목매지 마세요."

-문제는 나만 손해 보거나 뒤처지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인데요.

"주거 담당 공무원과 주택공사, 서울시와 교통부 장관까지 비엔나에 가서 답사를 했어요. 바꿔야죠. 터무니없는 삶은 반드시 바뀝니다. 성경에 그런 구절이 있습니다.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그러니 당장은 불가능해 보여도 희망을 품으세요."

“한나 아렌트 책에 이런 문장이 있어요. ‘고귀한 인간성은 밀실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공공의 광장에 자기 자신을 투여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글을 읽고 공공 영역에 나서는 용기를 냈어요.”/사진=고운호 기자

-지금 집값은 선생에게 어떤 상념을 불러일으키나요?

"집값은 자기 존재값이죠. 하이데거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거주함으로써 존재한다고. 집을 사고파는 것은 자기 존재를 사고파는 거예요. 다만 값이 비싸다고 내 존재값이 올라가진 않아요. 터무니없이 비싼 집은 버블이고, 내 존재도 버블이 되는 겁니다."

-실례지만 선생은 어디 사십니까?

"지금 이 건축사무소 건물의 옥탑방에 삽니다. 이곳에서 4대가 같이 삽니다. 어머니, 저희 부부, 아들과 딸, 손자, 손녀 대가족입니다. 조금 좁지만 부대끼며 사는 게 가족이지요(웃음)."

승효상은 어린 시절을 부산의 피난민촌에서 보냈다. 여덟 가구가 마당을 두고 모여 살던 삶의 풍경은 그에게 ‘즐거운 불편'의 기억으로 남았다. 가난한 자의 미학이 아닌 가난할 줄 아는 자의 미학이란 우리 삶에 어떤 무늬를 남길 것인가. 모든 건물은 언젠가는 허물어지니 거기엔 어떤 진실도 없다고 했다. 결국 같이 어울려 살았다는 기억만이 진실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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