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피해 부부 자살사건' 유죄로 뒤집혀..대법 "1·2심, 성감수성 결여"

한광범 2018. 10. 31.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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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피해자 사정 고려 없는 증명력 배척은 잘못"
"1·2심, 양립가능한 상황 이유로 피해자 진술 배척"
피해자 부부, 1심 무죄 선고되자 "죽어서 복수" 자살
대법원. (사진=방인권 기자)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친구의 아내를 강간한 혐의로 기소됐던 30대 남성에게 1심에서 무죄를 선고하자 피해자 부부가 동반자살한 ‘논산 성폭행 피해 부부 동반자살’ 사건에 대해 대법원이 유죄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무죄를 선고한 하급심에 대해 “성폭력 사건을 심리할 때 요구되는 ‘성인지 감수성’이 결여됐다”고 질타했다.

31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1부(주심 박정화 대법관)는 강간·폭행 등의 혐의로 기소된 박모(38)씨에 대해 강간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대전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충남 논산의 조직폭력배인 박씨는 과거 자신과 가까웠던 A씨의 아내 B씨를 강간한 혐의 등으로 기소됐다. 그는 A씨가 해외 출장을 가자 B씨를 불러내 지속적으로 협박한 후 강간한 혐의를 받는다. 이 사건은 30대 부부가 아내를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남편의 옛친구인 박씨에게 무죄가 선고되자 지난 3월 억울함과 함께 “죽어서도 복수하겠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동반자살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1심 재판부였던 대전지법 논산지원 형사1부(재판장 조영범)는 지난해 11월 박씨에게 강간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A씨 부부 자살 4개월 전이었다. 당시 1심 재판부는 사건 전후의 B씨 태도를 이유로 주장의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특히 재판부는 “B씨가 구체적 협박 내용과 이를 피하기 위한 어떤 행동을 했는지 진술하지 않는다”고 했다. 또 B씨의 피해 상황 진술에 대해서도 “일반적으로 상정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이유를 들어 배척했다.

아울러 사건 전후에 CCTV에 찍힌 B씨의 모습에 대해서도 “피해자의 모습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자연스럽다”고 평가하며 이를 B씨 진술 배척 이유로 들었다. 또 B씨가 피해 사실을 수사기관에 신고하거나 외국에 있는 남편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점도 지적했다.

◇1·2심 재판부, 판결문 곳곳에 ‘피해자 탓’

1심 재판부는 여기서 더 나아가 “B씨가 박씨와 A씨 사이의 다툼을 오해하고 불륜 사실이 발각돼 신변에 위협을 받게 될 것을 염려해 먼저 남편에게 허위로 피해사실을 말했을 여지도 있다”는 추측도 덧붙였다.

2심 재판부인 대전고법 1부(재판장 권혁중)도 지난 5월 1심 판단을 유지하며 두 사람이 성관계를 가진 후 10여분 간 가정 관련 대화를 나눈 점을 판단의 근거로 들기도 했다.

대법원은 이 같은 하급심의 판단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대법원은 “B씨 진술은 수사기관에서부터 제1심 법정에 이르기까지 일관될 뿐만 아니라 매우 구체적이며 경험칙에 비춰 비합리적이라거나 진술 자체로 모순되는 부분을 찾기 어렵다”며 B씨 진술을 받아들이지 않은 원심 판단을 뒤집었다.

이어 “원심이 B씨 진술 신빙성을 배척하는 이유는 B씨의 구체적인 상황이나 박씨와 B씨 관계 등에 비춰 B씨 진술과 반드시 배치된다거나 양립 불가능하지 않다”며 “그럼에도 원심이 B씨 진술 신빙성을 배척한 것은 성폭력 피해자의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아 ‘성인지 감수성’을 결여한 것이라는 의심이 든다”고 비판했다.

아울러 사건 전후 CCTV에 찍힌 B씨 모습에 대해서도 “박씨와 신체 접촉 없이 각자 떨어져 앞뒤로 걸어간 것뿐인데 이런 사정을 들어 ‘B씨가 겁을 먹은 것처럼 보이지 않고 나아가 폭행·협박 등이 있었는지 의문이 든다’고 판단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또 성관계 후 가정에 대해 대화를 한 것에 대해선 “박씨 부부와 A씨 부부가 과거 자주 어울렸던 점을 고려하면 자연스럽다”며 “B씨가 오로지 박씨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을 의도로 진행된 대화‘라고 판단했다.

◇대법 “피해자 사후적 태도로 섣불리 단정 안돼”

대법원은 “법원이 성폭행이나 성희록 사건을 심리할 때는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며 “우리 사회 가해자 중심의 문화 등에 비춰보면 피해자의 대처 양상은 피해자 성정이나 가해자와의 관계 및 구체적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개별적, 구체적 사건에서 피해자가 처해 있는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가볍게 배척하는 것은 정의와 형평의 이념에 입각해 논리와 경험의 법칙에 따른 증거판단이라고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대법원은 또 “강간죄 성립을 위한 가해자의 폭행·협박 여부는 폭행?협박의 내용과 정도는 물론 유형력을 행사하게 된 경위, 피해자와의 관계, 성교 당시와 그 후의 정황 등 모든 사정을 종합하여 피해자가 피해 당시 처했던 구체적 상황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이어 “사후적으로 보아 피해자가 피해 이전에 범행 현장을 벗어날 수 있었다거나 피해자가 사력을 다해 반항하지 않았다는 사정만으로 가해자의 폭행·협박이 피해자의 항거를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에 이르지 않았다고 섣불리 단정해선 안 된다”고 밝혔다.

아울러 “피해자 진술이 유일한 경우에 피고인 진술이 경험칙상 합리성이 없고 그 자체로 모순돼 믿을 수 없다고 해 그것이 직접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공소사실을 뒷받침하는 간접정황이 될 수 있다”고 했다.

한광범 (totoro@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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