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농단 수사에 잇단 반격..오만한 '사법 기득권'

2018. 11. 1.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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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헌 구속으로 수사 전환점 맞자
고위법관들 자성커녕 "기본권 침해"
법원 내부통신망에 지적 글 쏟아내

[한겨레]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건물 법원 문양 위로 빛이 쏟아지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판사는 판결로만 말한다’며 길게는 30여년간 법대 위에서 유무죄만 선고했던 일부 고위법관이 뒤늦은 ‘국민 걱정’을 하고 나섰다. 검찰이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을 구속하는 등 수사 성과를 내며 고삐를 죄자, 잘못된 검찰 수사 관행을 지적하고 국민의 기본권 침해를 우려하는 의견 등을 법원 내부 통신망에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법원 안팎에선 사법농단을 자초한 상황에 대한 부끄러움이나 자성의 목소리도 없이, 국민도 아닌 법원 내부를 향해 항변하듯 ‘입바른 소리’를 내놓는 것 자체가 국민적 공분을 키우는 일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승승장구하며 잘못된 관행을 방치했던 고위법관들이 법원과 제 식구들을 겨냥한 수사가 시작되자 비로소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는 곱지 않은 시선도 있다.

김시철 서울고법 부장판사(사법연수원 19기)가 대표적이다. 그는 지난 29일 검찰이 대법원 전산정보센터에 보관된 자신의 이메일을 압수수색한 직후 법관은 물론 법원 직원 전체가 볼 수 있는 내부 통신망에 ‘서울중앙지검 사법농단 의혹 수사에 관해 법원 가족들께 드리는 글’을 올렸다. 자신에 대한 압수수색은 “제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법원 가족 전체에 대하여, 나아가 일반 국민 모두에 대하여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1만4700여자짜리 장문의 글은 검찰 수사의 위법성을 지적하는 ‘법률적 외관’을 갖췄지만, 실상은 자신이 받고 있는 재판거래 의혹에 대한 ‘변론’이 목적으로 보인다는 평가가 나온다.

김 부장판사는 2015~16년 서울고법 형사7부 재판장으로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댓글 여론조작 사건을 맡았다. 앞선 재판부에서 법정구속됐던 원 전 원장 석방부터 결정한 김 부장판사는, 공판 과정에서도 <손자병법>을 거론하며 ‘국정원 댓글공작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탄력적 용병술로 보인다’는 취지로 발언하는 등 편파적 재판 진행으로 도마에 올랐다. 그는 1년7개월간 재판을 끌었고, 결국 선고도 하지 않고 다른 부서로 떠났다. 이와 관련해 대법원 자체 조사와 검찰 수사에서 당시 법원행정처가 형사7부의 ‘의중’을 파악한 문건 6건이 확인됐다. 검찰 압수수색은 이와 관련한 것이다.

지난 16일엔 임종헌 전 차장의 고등학교·대학교 동문 선배인 강민구 서울고법 부장판사(사법연수원 14기)가 전날 검찰에 출석했던 임 전 차장이 새벽에 귀가하자 법원 내부 게시판 등에 “검찰의 밤샘수사 관행은 위법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밤샘조사로 작성된) 조서의 증거능력을 배척하면 단박에 고칠 수 있다. 법관의 결단이 남았다”고 했다. 피의자 인권을 중시하는 강 부장판사의 글에 대해 법원 내부 반응은 대체로 싸늘했다고 한다. 한 판사는 “그동안 밤샘수사를 받은 시민들은 잘만 재판해놓고 갑자기 고위법관 출신이 밤샘조사를 받았다고 위법하다며 무죄 판결을 내리라고 주문하니, 어떻게 호응할 수 있겠느냐”고 분위기를 전했다.

임 전 차장과 사법연수원 동기인 최인석 울산지방법원장(사법연수원 16기)도 임 전 차장이 구속된 뒤인 지난 29일 내부 통신망에 “법원은 검사에게 영장 발부 해주는 기관이 아니다. 판사라는 직업이 고귀한 이유는 장삼이사의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검사의 업무에 협조하는 데만 몰두했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는 데는 소홀했다”며 법원 전체의 자성을 촉구했다.

이와 관련해 한 부장판사는 “그렇게 오래 법관 생활을 해오는 동안 압수수색 문제나 밤샘수사 문제를 말 안 하다가 왜 이제야 하는지 모르겠다. 재판거래 등 위헌적 행동에 대한 반성이나 사과도 하지 않으니 누가 저런 주장을 진실하게 받아들이겠느냐”고 꼬집었다. 판사 출신 변호사는 “임종헌 구속에 충격이 컸고, 특별재판부 도입에 탄핵까지 거론되자 일부 고위법관이 위기감을 느낀 것 같다”고 했다. 또 다른 판사 출신 변호사는 “(김시철 부장판사는) 재판에 나가 해야 할 얘기를 판사라는 지위를 이용해 전국 법관들에게 미리 ‘억울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국민이 보기에 법원을 더 불신하게 만드는 글들”이라며 “이런 모습이 오히려 특별재판부가 필요한 상황을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 판사는 “고위법관들이 ‘사법부 붕괴 직전’이라며 분노하는 분위기인데, 중구난방이어서 집단행동까지는 할 수 없을 것으로 본다”고 했다.

김양진 고한솔 최우리 기자 ky029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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