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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수전쟁 현장중계 1 - 요하 전투

임기환 입력 2018. 11. 01.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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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명장면-57] 수양제는 612년 정월에 탁군을 출발했다. 598년 1차 원정 시 6월에 임유관을 출발했던 것과 비교하면 출정 시기를 거의 5개월이나 앞당긴 것이다. 1차 원정이 실패했던 요인 가운데 하나였던 장마와 홍수철을 피하겠다는 나름 계산된 행보였다. 아마도 수양제는 6개월 정도의 시간이면 장마와 더위가 닥치기 전에 충분히 평양성까지 도달하여 고구려를 굴복시킬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백만이 넘는 수나라 육군은 좌우익 24군으로 나뉘어 탁군을 출발하는 데에만도 40여 일이 걸렸다. 그런데 이들 24군의 군명이 흥미롭다. 좌익 12군(軍)은 누방(鏤方)·장잠(長岑)·명해(溟海)·개마(蓋馬)·건안(建安)·남소(南蘇)·요동(遼東)·현도·부여(夫餘)·조선(朝鮮)·옥저(沃沮)·낙랑(樂浪)의 길[道]이름이고 우익 12군은 염제·함자(含資)·혼미(渾彌)·임둔(臨屯)·후성(候城)·제해(堤奚)·답돈(踏頓)·숙신(肅愼)·갈석(碣石)·동이·대방(帶方)·양평(襄平)의 길[道]이름이다. 이름대로라면 이들 수나라 군단은 각각 군단 이름이 붙은 지역으로 진격하는 모양새이다.

그런데 이들 지명 가운데 누방, 장잠, 해명, 조선, 낙랑, 점제, 함자, 혼미, 대방은 낙랑군과 대방군의 군현명이고 요동, 후성, 양평은 요동군의 군현명, 현도, 개마는 현도군, 옥저, 동이는 임둔군의 군현명이다. 이들 군현명 중 당시 고구려에서 사용하는 지명은 요동성, 현도성 외에는 거의 없다고 보인다. 위 군단명 중에서 당시 실제로 사용되는 고구려의 주요 지명으로는 건안·남소·요동·현도·부여 정도를 들 수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수나라 군단명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행군의 경로나 목적지, 또는 점령해야 할 지역을 구체적으로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명분으로 붙여진 허구에 불과했다. 이런 식의 군단명은 수양제의 최측근인 배구(裴矩)가 주장한 군현회복론(郡縣回復論)에서 비롯하는 고구려 정벌의 명분과 관련되어 있다. 607년 돌궐땅 계민가한의 장막에서 고구려 사신을 마주치자 배구는 수양제에게 다음과 같이 고구려 정벌을 건의하였다.

"고구려의 땅은 본래 고죽국(孤竹國)으로 주(周)나라 때에는 기자(箕子)를 봉한 곳이고 한(漢)나라 때에는 3개의 군(郡)으로 나누어 다스렸고, 진(晉)나라 때에도 역시 요동(遼東)을 통치하였습니다. 지금은 (이 땅을) 신하로 여기지 않고 외역(外域)으로 여기고 있는데…그대로 두어 이 의관(衣冠)의 땅을 만맥(蠻貊)의 땅으로 그냥 둘 수 있겠습니까"

배구는 고구려 영토를 예맥(고구려)에게 빼앗긴 의관의 땅, 즉 중국 영토라고 주장함으로써 그 정벌의 불가피성을 역설하였다. 고구려 정벌은 곧 한군현이란 고토(故土)를 회복하는 일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고구려 정벌의 명분은 후일 당나라 때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수나라 군단명이 명분론에 입각한 관념의 산물이기 때문에, 실제로 탁군을 출발한 수나라군은 경로를 나누지 않고 하나의 교통로를 이용해서 모두 진군한 듯하다. 그 경로는 1차 원정의 경로와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즉 612년 1월에 탁군을 출발한 수양제의 군대는 임유관·유성(柳城: 지금의 조양)을 지나 노하진(瀘河鎭) 또는 회원진(懷遠鎭)에서 군량 등 군수 물자를 보급 받고, 대략 3월 초에는 요하(遼河)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요하 일대 지도

당시 요하를 건너는 교통로로는 대략 3개의 경로가 있었다. 북로는 지금의 신민(新民)시에서 심양으로 이어지는 루트, 중로는 대안, 요중(遼中)에서 요양시로 이어지는 루트, 남로는 반산(般山)에서 해성시나 개주시로 이어지는 루트였다. 이 중 북로는 후일 고구려와 당의 전쟁 때 당나라 이세적(李世勣)이 통정진(通定鎭)에서 요하를 건넌 루트였다. 중로는 회원진에서 요하를 건너 요동성에 이르는 루트였다. 수양제가 이끄는 주력부대는 이 중로를 이용하여 요하를 건너고자 한 것이다.

물론 북로와 남로도 이용했는지는 문헌상으로는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북로는 접어두더라도 남로를 이용해서 요하를 건넜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왜냐하면 수양제가 최전방에 해당하는 회원진과 노하진에 군량 등 군수물자를 집적하도록 하여, 이 두 곳을 거쳐 대군이 요하 방면으로 진군하였는데, 노하진을 경유할 경우 남로를 이용하는 것이 이동거리가 가장 짧은 경로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나중에 별동대를 구성하는 부대 중에 이 남로를 이용하여 요하를 건넌 부대가 포함되었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요하에 이르기까지는 대체로 수의 경내였기 때문에 진군이 순조로웠다. 그런데 요하에 다다르자 거기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항복하려는 고구려왕이 아니라 고구려 수비군이었다. 이 장면부터가 수양제의 기대를 벗어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수양제는 엄청난 규모의 수나라 대군이 진군한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고구려 영양왕이 요하까지 달려와 무릎을 꿇고 빌기를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그동안 고구려는 과연 무얼하고 있었을까?

몇 년에 걸쳐 수양제가 대규모 군대와 물자를 동원하여 고구려 원정을 추진하는 저간의 사정을 고구려가 결코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고구려는 수나라에 대해 외교적 유화책을 취하는 그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수양제의 침공을 기다리겠다는 태도였다. 백만이 넘는 압도적인 수나라의 군대가 동원되리라고는 미처 예측하지 못했던 것일까? 당시 수의 동향에 예민한 정황을 보면 아마도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과연 뭘 믿고 그렇게 의연할 수 있었을까?

우선 고구려는 수나라의 국내 사정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수양제의 무리한 토목사업과 사치로 백성들의 원성이 높고, 파행적인 정국 운영으로 인해 지배층의 불만도 적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수의 군대는 장기전을 수행할 수 없었다. 고구려는 수의 대군을 맞아 성을 지키는 전략으로 대응하면서 장기전으로 가면 승리를 보장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던 듯하다.

"시간을 끌고 최대한 버텨라."

이것이 최선의 방어 전략이었던 것이다.

요하

고구려군은 우선 요하를 막고 수 대군의 도강을 저지하였다. 도강을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수양제는 공부상서 우문개(宇文愷)에게 명령하여 세 개의 부교(浮橋)를 만들게 했다. 부교가 완성되자 끌어다 요하 건너편까지 이어지게 하였으나, 부교가 한 길 남짓하게 모자랐다. 요하 동쪽에서 수나라군을 기다리고 있던 고구려 수비군은 수군의 도강을 막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수나라 선봉군 지휘관인 맥철장(麥鐵杖)과 전사웅(錢士雄)·맹차(孟叉) 등 여러 장수들이 전사할 정도로 첫 전투는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수양제는 다시 부교를 완성하고 도하를 시도했다. 계속되는 전투에서 마침내 고구려군의 저항선도 무너지고 말았으며, 수나라군은 가까스로 요하를 건넜다. 그러나 1개월 가까이 지체한 다음 4월에야 겨우 대군이 요하를 건널 수 있었다. 고구려 요하 수비대는 수양제군의 도하를 저지하면 1개월 이상의 시간을 벌었다. 이 기간은 후방의 고구려군이 전선을 준비하고 방어망을 재구축하는 데 매우 요긴한 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그동안은 기록이 너무 소략하다 보니 이 요하 전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지나갔다. 그런데 3월 초에 요하에 다다른 수군이 5월에 들어서야 요동성을 포위 공격하기 시작했음을 보면 두 달 가까운 시간을 늦출 수밖에 없는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요하의 도하에 많은 시간을 쓰고 지체했던 때문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기록이 없어도 가능한 추론으로 이 요하 전투가 갖는 의미를 다시 평가할 필요가 있다.

50만 대군을 이끌고 장강(양자강)을 건너 진나라를 멸망시키는 지휘관이었던 수양제는 이제 백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요하에 이르렀다. 요하를 앞에 두고, 그리고 요하를 건넌 뒤에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버지 문제가 평원왕에게 보낸 협박성 국서의 한 구절이 떠올랐는지도 모른다. "그대는 요수의 넓이가 장강과 비교하여 어떠하며, 고구려 인구가 진나라와 비교하여 어떠하다고 생각하는가?"

어렵사리 요하를 건너 뒤에도 수양제는 고구려 정벌의 길이 쉽다고 생각했을까?

※려수전쟁이란 용어가 혹 낯설지도 모르겠다. 고구려-수 전쟁이라고 부르는 게 가장 적절하지만, 약칭으로 칭할 경우 고수 전쟁이라는 용어도 사용하곤 한다. 그런데 삼국사기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약칭을 마지막 자에 따라 '려(麗)' '제(濟)' '라(羅)'로 불렀다. 이에 따라 그동안 나제동맹, 나당전쟁, 나당동맹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이러한 방식에 따라 고구려-수 전쟁도 약칭으로 려수전쟁으로 부르고자 한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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