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등산사] 에베레스트서 죽은 남편..의문에 빠진 아내의 추적

김홍준 2018. 11. 2.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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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잉그리트 간너
8700m 지점서 남편의 추락사
한 사람, 한 사람 만나며 캐물어
확인도 안하고 죽었다는 셰르파
마지막 순간을 보살펴준 셰르파
그러다 아내는 마음을 다잡았다

아내는 의문에 빠졌다. 남편은 왜 죽었을까. 그는 어떻게 죽었을까. 그의 곁에는 누가 있었을까. 그들은 남편을 도와줬을까. 아내는 추적에 나섰다.

네팔 4900m의 두글라에 세워진 페터 간너의 추모비. '파상 갤루 셰르파의 품에 안겨 죽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중앙포토
오스트리아의 페터 간너(당시 53세)는 기상 악화로 에베레스트 등정을 계속 미뤘다. 페터는 등반 일정을 열흘 늘렸다. 방송국 엔지니어인 페터는 회사에 휴가 연장을 신청했고 회사는 흔쾌히 수락했다. 아내 잉그리트도 동의했다.
등반 중인 페터 간너. 그는 2001년 5월 24일 에베레스트 남동릉에서 추락해 사망했다. 중앙포토
5월22일 오후 5시, 페터와 아르헨티나의 후앙 베네가스, 스페인의 카를로스 소리아는 사우스콜의 7960m 캠프4에 도착했다, 이들은 남동릉을 통해 정상을 노렸다. 8749m의 남쪽 정상(사우스 서미트) 바로 밑의 가파른 바위·얼음지대와 8760m의 힐러리 스텝이 고빗사위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날은 눈이 적어 바위·얼음 지대 등반이 어려웠다.

5월23일 오후 1시, 소리아가 먼저 정상에 올랐다. 날씨가 나빠지고 있었다. 베네가스는 등정을 포기했다. 페터는 8700m 근처의 바위·얼음 지대에 들어섰다. 하지만 급격히 지쳐갔다. 정상에서 내려온 스페인 여성 등반가 에두르네 파사반이 페터를 도와줬다. 피뇨 셰르파가 앞서가며 계속 페터를 뒤돌아봤다. 어느 순간, 페터가 사라지고 없었다.

당일, 이 등반대를 꾸린 카트만두의 아시안 트레킹은 페터의 아내 잉그리트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페터 간너, 추락으로 사망”
하지만 잉그리트는 25일까지 그 메일을 열지 못했다. 아시안 트레킹은 잉그리트에게 페터의 사망과 관련한 어떤 정보도 알려주지 않았다. 뉴스에서는 계속 남편이 500m 추락해 사망했다고 했다.

5월26일, 에베레스트의 다른 원정대 베이스캠프에서 전화가 왔다. 29일까지 네팔 카트만두로 와서 페터의 시신과 그가 남긴 장비 처리를 협의하자고 했다.

이날 한통의 이메일이 왔다. 남편에 대한 내용이었다.
‘인도군 원정대의 파상 갤루 셰르파가 당신 남편의 마지막을 함께 했습니다.’
에베레스트
네팔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잉그리트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남편의 죽음을 알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을 만나야할 것 같았다. 후안 베네가스, 카를로스 소리아, 에두르네 파사반, 아시안 트레킹 담당자…. 열쇠는 파상 갤루 셰르파와 피뇨 셰르파가 쥐고 있는 것 같았다.

5월 29일 카트만두에 도착하자 베네가스와 소리아가 숙소에 찾아왔다. 그들은 사고 상황을 설명했다.
“(페터와 함께 등반한) 피뇨 셰르파가 페터를 잃은 뒤 캠프4까지 내려왔습니다. 페터가 500m 추락했다고요. 페터의 모습은…”
잉그리트는 손을 내저으며 그만하라고 부탁했다.

6월 1일, 에두르네 파사반을 만났다.
“남편 분은 당시 등강기와 로프 매듭을 조정하느라 애를 먹고 있었어요. 그는 등정을 포기하고 하산 중이었습니다.”
잉그리트는 놀랐다. 일정을 열흘 늘리면서 의욕을 보였던 페터가 등반을 포기했다. 페터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려고 했던 것이다.

같은 날 오후, 파상 갤루 셰르파가 찾아왔다. 오스트리아 대사관의 연락을 받은 파상 갤루는 남체 바자르에서 루클라를 거쳐 카트만두로 달려왔다.
“5월 24일(페터가 추락한 다음날) 오전 7시경이었습니다.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르고 하산하면서 사우스서미트에 진입했어요. 그런데 루트에서 떨어진 지점에 뭔가 보였어요. 조금씩 움직이는데,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8000m 이상 ‘죽음의 지대’에서 예정된 루트를 벗어나는 건 체력적으로, 안전상으로 큰 위험이 따른다.
“그(페터)는 말을 못했어요. 장갑이 벗겨진 손으로 뭔가 설명하려는 것 같았어요. 부축해서 몸을 바로잡아줬어요.”
한참 말을 않고 있던 잉그리트가 입을 열었다.
“페터는 루트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었나요.”
“100m 가량이었습니다. 제가 100m 가량 클라이밍다운 했으니까요.”
잉그리트는 페터가 추락한 거리가 100m라고 판단했다. 알려진 500m가 아니었다.

2001년 6월. '히말라야의 기록자' 엘리자베스 홀리 여사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파상 갤루는 페터를 돕기 위해 클라이밍다운을 했다. 파상 갤루는 새 로프를, 이미 수많은 원정대들이 사용한 메인 고정 로프에 묶었다.’
파상 갤루는 루트 상의 다른 셰르파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로프를 페터의 하네스(안전벨트)에 연결해 줬다. 그 순간, 페터는 눈을 감았다. 20분. 파상 갤루와의 짧은 만남이었다. 파상 갤루는 혼란스러웠다. 평평한 곳을 찾았다. 그리고 페터의 몸을 에베레스트 정상으로 향하게 한 뒤 손을 모아줬다. 지구의 최고봉을 향한 인사말, ‘나마스테’의 의미였다.
비쩍 마른 몸매, 히말라야의 자외선에 검게 그을린 피부, 눈바람에 딱딱하게 굳은 손등. 산소부족으로 하얗게 변한 손톱.... 강인하고도 차분해 보이는 파상 갤루는 페터를 만난 상황을 잉그리트에게 얘기했다. 중앙포토
2002년 4월 12일. 잉그리트는 히말라야에서 우연히 미국의 산악 가이드 루이스 베니테즈를 만났다. 페터의 사고 당시 베니테즈는 맹인 등반대를 이끌고 있었다. 베니테즈는 자신의 셰르파가 “당시 고정 로프가 끊어졌고 한 명이 추락했다”며 “베이스캠프에서 (에두르네) 파사반과 많은 얘기를 나눴다”고 말했다.

새로운 소식이었다. 페터의 실수가 아니라, 사고였다. 잉그리트는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그녀는 사고를 페터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2003년 1월 26일. 홀리 여사는 피뇨 셰르파를 인터뷰했다. 피뇨는 이렇게 말했다.
“(2001년 5월 23일) 오후 2시30분과 3시 사이, 우리는 사우스 서미트는 2시간 거리에 있었다. 날씨는 급격히 나빠졌다. 페터는 하산해야 한다고 했다. 산소통은 하나 남아 있었고 페터와 나는 3m 정도로 떨어진 채 쉬고 있다가 일어났다. 크램폰(아이젠)이 심하게 긁히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페터가 사라졌다. 난 캠프4로 복귀했고 페터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홀리 여사는 “그래서 페터의 조난 수색이 없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2003년 3월 6일. 파사반은 피뇨의 설명과 조금 다른 내용의 이메일을 잉그리트에게 보냈다.
“정상에 오른 뒤 하산 중에 페터를 만났다. 그는 혼자였다. 셰르파는 50m 이상 떨어진 곳에 있었다. 셰르파(피뇨)에게 페터를 주시하라고 일렀다. 그런데, 하산 중에 그 셰르파를 다시 만났다. 페터가 어디 있냐고 묻자, 그는 죽었다고 답했다. 다른 하산 팀이 있어 그들에게 페터를 보지 못했냐고 물어보니 못 봤다는 대답뿐이었다. 언어 장벽으로, 셰르파와 나의 대화에 오류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못 봤다’는 것은 당일의 나쁜 날씨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셰르파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사우스서미트 근처에서 추락은 캉충(에베레스트 동벽) 바닥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2003년 3월 17일. 파사반의 원정대 일원이었던 실비오 몬디넬리도 “미안하다, 나쁜 날씨 때문에 아무것도 못 봤다”고 했다. 파사반의 의견은 달랐다. “날씨는 나빠지고 있었지만 내가 페터를 만났을 때는 시계가 좋았다.”

2003년 3월 18일. 사고 당일 가장 늦게 하산한 카를로스 소리아도 “바람은 셌지만 시계는 좋았다”고 했다.
왼쪽부터 에두르네 파사반, 카를로스 소리아, 후앙 베네가즈, 루이스 베니테즈, 이냐키 오초아, 엘리자베스 홀리. 파사반은 2010년 5월 여성 첫 14좌 등정자가 됐다. 이냐키 오초아는 2008년 안나푸르나 등반 중 사망했다. 히말라야의 기록자 홀리 여사는 2018년 1월 9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중앙포토
2003년 3월 21일. 잉그리트는 드디어 피뇨 셰르파를 만나게 됐다. 스페인 등반가인 이냐키 오초아가 신신당부한대로,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그는 영어를 거의 하지 못했다. 파사반이 에베레스트에서 그를 만났을 때 우려했던 ‘소통’의 어려움이 있었다.

“추락한 페터를 도저히 찾을 수 없었어요. 추락한 지점이 너무 가팔랐습니다. 사우스콜 발코니에서 여성 등반가(파사반)를 만났는데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피뇨는 잉그리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 “예스”를 되풀이했다.
피뇨는 사고 뒤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갔고 1년간 셰르파 역할을 못했다. 그는 “모든 상황이 너무 슬펐다”고 했다.

잉그리트는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피뇨가 사고 직후 “페터가 사망했다” 대신 “페터가 추락했다”고 보고했어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몰 후 캠프4에서 7시간 걸려 추락지점까지 구조하러 갔다면….
지치고 산소도 물도 떨어진 누군가 하산 중에 페터를 발견해 구조했다면….
잉그리트는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목숨을 걸었어야 했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을 탓할 순 없었다.
잉그리트 간너와 네 명의 자녀들. 페터 간너가 에베레스트에서 사망한 이듬해 크리스마스 때 찍은 사진이다. 중앙포토
잉그리트는 페터의 장례식 조의금을 받지 않았다. 찾아오는 친지와 지인들에게 조의금 액수만큼 네팔의 어린이들에게 기부해달라고 요청했다. 한화로 700만원 가량이 네팔에 보내졌다. 잉그리트는 두 명의 네팔 어린이를 후원했다. 페터의 추모비는 해발 4900m의 네팔 두글라에 세워졌다. 추모비에는 메리 엘리자베스 프라이의 시가 새겨져 있다.

내 무덤 앞에서 울지 말아요.
나는 그곳에 없답니다. 잠들지 않았답니다.
나는 천 갈래 바람이 되어 불고
눈송이 되어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답니다.
Do not stand at my grave and weep,
I am not there, I do not sleep.
I am a thousand winds that blow
I am the diamond glints on snow.

“페터, 2시에는 하산한다는 약속 지켜줘서 너무 고마워요.”
잉그리트와 4명의 자녀는 슬프나, 슬프지 않았다.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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