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카슈끄지가 예멘 내전의 총성 멎게 하나

정시행 기자 입력 2018. 11. 2.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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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의 최대 후원자 美·英, 사우디에 휴전 압박 "빨리 손떼라"

사우디아라비아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의 죽음이 예상 밖의 '성과'를 세계에 안겨줄지 모른다.

3년 넘게 수만 명의 사망자를 낸 예멘 내전의 종식이다. 제주도에 들어온 예멘인들이 이 내전으로 발생한 난민들이다. 예멘 내전을 이끌어온 사우디에 미국·영국이 돌연 "휴전하고 빨리 손을 떼라"고 압박하고 나섰다. 사우디가 카슈끄지 사태로 입지가 약해진 상태에서 서방이 예멘 내전과 관련해 사우디를 압박한 첫 움직임이다. 영국 가디언은 "카슈끄지의 가장 위대한 유산은 기아에 허덕이는 예멘인 수천만 명을 구해내는 것일 수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지난 30일 밤(현지 시각) 차례로 성명을 내 "30일 이내에 예멘 내전의 당사자들은 휴전 협정을 맺기 바란다"고 밝혔다. 영국 테리사 메이 총리도 지난 31일 "예멘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한 미국의 요청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두 나라의 발표는 이례적이다. 미·영 정부는 예멘전에서 사우디의 최대 후원자였고, 지난 3년반 동안 휴전 요청은커녕 예멘의 참상을 인정한 적조차 없다.


아라비아반도 남단의 소국 예멘 내전은 2015년 3월 시작됐지만 그 실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잊힌 전쟁'으로 불렸다. 2011년 아랍의 봄으로 사우디와 가까운 예멘 독재자 살레 전 대통령이 축출된 뒤 또 사우디의 대리인인 하디 정권이 들어서자 후티(Houti)족이 반란을 일으킨 게 시작이다. 이란이 같은 시아파인 후티 반군을 지원하고, 수니파인 사우디가 뛰어들었다. 병력이 부족한 사우디는 아랍에미리트와 이집트 등 주변국을 연합군으로 끌어들였고, 미국·영국 등도 이란과 테러세력 봉쇄를 명분으로 사우디에 전투기를 공급하며 국제전으로 비화했다.

군사 강국들이 다 달라붙었는데도 산악지역 게릴라전에 능한 반군이 현재 수도 사나와 홍해 연안 등 주요 거점을 모두 장악한 상태다.

당장 휴전이 이뤄지면 사우디로선 패전 선언임은 물론 전쟁 범죄의 책임을 뒤집어쓰게 된다. 사우디가 학교·병원·스쿨버스까지 무차별 공습을 벌인 데다, 반군이 점령한 호데이다항(港)을 봉쇄해 예멘 국민의 절반인 1400만명이 해외 원조조차 못 받고 아사할 위기다.

내전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UN이 2년 전 집계한 수치가 1만여 명이며, 영국 서섹스대 연구팀은 5만6000여 명, 일부 인권 단체는 7만~8만명까지 추산한다.

사우디의 예멘전 개입은 무함마드 빈살만(33) 왕세자의 작품이다. '예멘 내전의 최고 설계자'로 불리는 빈살만은 2015년 국방장관에 오르자마자 예멘전 개입을 결정, 공습과 해상 봉쇄 등을 지휘했다. 젊은 나이에 왕권을 차지하려 '중동 수니파 맹주 입지 확보'라는 대외 업적에 집착했다.

올 초부터 국제사회에선 앰네스티 리포트 등을 통해 예멘 실태가 알려지며 "빈살만은 매우 폭력적인 인물"이란 경고음이 울렸다. 카슈끄지가 지난 9월 11일 워싱턴포스트에 마지막으로 기고한 칼럼도 "사우디가 시리아 내전을 획책하는 러시아·이란과 다를 바가 뭔가"라며 "빈살만은 예멘 내전을 끝내고 이슬람의 품격을 회복하라"는 내용이었다.

지난 10월 2일 카슈끄지 살해 사건은 수면 아래 예멘 내전을 처음 건져올린 계기가 됐다. 영국 가디언이 "카슈끄지만 문제라고? 예멘 내전은 왜 놔두는가?"라며 포문을 열더니, '빈살만의 예멘 민간인 원조는 생색내기용이었다'는 UN 내부 보고서를 폭로했다.

이어 미 뉴욕타임스는 예멘 첫 현장 취재에 돌입, 앙상한 뼈만 남은 채 죽어가는 어린이들 모습을 공개했다. 지난 31일 CNN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국제 여론 악화에 당황했고, 미 정부 내에서 "더 이상 예멘 문제를 모르는 척하면 우리에게 부메랑이 된다"는 공감대가 급속히 형성됐다고 한다. 일각에선 미국이 카슈끄지 살해의 진상을 덮는 조건으로 사우디의 예멘 내전 종식이라는 '빅 딜'을 이룬 것 아니냐는 전망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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