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라이프] 억새와 춤을?.. 명성산(鳴聲山)을 오르다 ②

박대영 기자 2018. 11. 2.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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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 <갈대>, 신경림
갈대(또는 억새)는 '흔들려서' 갈대다. 잔바람에도 흔들리며 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그 여린 성정이, 하지만 비록 여릴지언정 부러지지 않는 꿋꿋함이 갈대의 상징이다. 그래서 조용히 울 수 있는 것이다. 그 울음이 삶이라는 처연한 현실의 실체임을, 그가 알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하기야 또 모른들 어떠랴. 굳이 알아서 염세주의자가 될 필요까지야 없지 않겠는가.
명성산에는 억새가 지천이었다.
파스칼이 그러지 않았던가. 인간도 갈대라고... 파스칼은 그의 저작, <팡세(Pensées)>에서 "인간은 자연 가운데서 가장 약한 하나의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말했었다. 차이라곤 '생각한다'는 거 말고는 흔들리는 것은 매 한 가지라는 말이다.

물론 그 한 가지의 차이인 '생각'의 유무만으로도 갈대와 갈대를 닮은 인간 사이의 간극은 더없이 넓고 크긴 하다.

파스칼이 바라보는 인간은 현실적으로는 광대무변한 우주에서 무(無)에 가까운 하찮은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그 '생각', 즉 '사고(思考)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인해 인간은 스스로가 처한 '생(生)의 유한함'이라는 '비참함'을 알고, 나아가 그 생각이라는 것을 통해 비참함 속에서도 자신을 구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존엄성이며, 고로 인간은 위대하다는 것이 파스칼의 생각이다.

그리고 갈대를 닮은 것 중 또 하나는, 바로 '여자의 마음'이다.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의 오페라 <리골레토(Rigoletto)>의 아리아가 아니라도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닮은 구석이 있긴 하다. 아리아 <여자의 마음>의 가사처럼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이 항상 변하는" 그 마음까지는 아닐지라도, 종잡을 수 없는 그 방향성만큼은 어느 정도 닮아 있었던 것이다.

결국 '생각하는 갈대'든 '여자의 마음은 갈대'든 이 두 정의가 주목하는 갈대의 특징은 역시 '흔들림'이다. 연약하기에 그들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억새는 하늘거린다는 표현에 걸맞게 여리고 부드럽다. 하얗게 부서지는 빛살을 담은 이삭을 기억한다면, 그게 억새다.
갈대는 키가 크고 거칠고, 또 억세다.

그런데 이 즈음에서 드는 의문 하나. 지금껏 이야기했던 갈대가 혹시 억새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그것이다.

보통 갈대는 강가나 바닷가에 서식하고, 억새는 들이나 산에서 자란다고 알고들 있다. 대충은 맞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들은 서식지만 다른 것이 아니라 생김새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갈대는 키가 크고 거칠고, 또 억세다. 그래서 이름도 대나무를 뜻하는 갈'대'인 것이다. 반면 억새는 하늘거린다는 표현에 걸맞게 여리고 부드럽다. 하얗게 부서지는 빛살을 담은 이삭을 기억한다면, 그게 억새다. 그렇듯 갈대가 남성적이라면 억새는 여성적이다.

그런데 '생각하는 갈대'고 '여자의 마음도 갈대'라고? 아마도 아닐 것이다. '흔들리는 존재'로서의 역할은 갈대보다는 억새에게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 실제 파스칼이 살았던 프랑스 중남부 지역은 산악지형이 많은 곳이라고 한다. 그러니 짐작컨대, 문학적인 표현에서 억새보다는 갈대가 종(種)의 대표성이나 어감 측면에서 낫기 때문에 통칭 갈대라고 부른 것이 아닐까... 감히 짐작해본다.

하기야 갈대면 어떻고 억새면 어떠랴. 그걸 꼭 구분해야 돼?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은 없다. 다만 그렇다는 말이다. 억새 입장에서는 다분히 서운할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이름이 억세게도 '억새'란 말인가. 조금만 더 부드러운 어감의 이름을 가졌더라면 우리는 갈대라고 말하면서 억새를 상상하는 오류를 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조금은 억울한(?) 억새가 명성산 정상 언저리에 우기(雨期)의 호수마냥 그득하다.

이것이 억새의 바다였구나. 더러는 명성산의 억새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도 말하지만, 과문한 여행자에게는 이마저도 차고 넘치는 억새의 낙원이었다.

하늘에서 툭 떨어지기라고 한 양, 느닷없이 펼쳐지는 억새의 장관 앞에서 사람들은 당황한다. 아! 이를 어쩐다?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그와 내가 우물쭈물한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양지바른 언덕에 앉아 흐드러지게 핀 억새의 너울을 바라본다. 유구무언... 달리 무슨 할 말이 있을 것인가. 다만 가만히 바라볼 뿐이다. 잔바람에도 자지러지는 억새들의 몸부림을, 그 너울의 행렬을 무심히 바라본다. 그렇게 그들이 흩어놓는 그들의 이야기를, 그들의 소리를 들으며 무심히 바라볼 뿐이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열리는 풍경이 있다. 명성산의 억새 평원이 그랬다. 억새들의 흰 물결에 마음마저 표백되는 그런 느낌이었다. 억새의 이삭들에 매달려 산란하며 하얗게 터지는 빛들은 눈을 멀게 한다. 가만히 머무르고 싶은 마음 굴뚝같았으나, 넘쳐 나는 인파에 떠밀리는 스스로가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억새들의 하얀 이삭들은 그들의 씨앗주머니다.

사실 억새들의 하얀 이삭들은 그들의 씨앗주머니다. 씨앗들을 멀리 퍼져나가게 하기 위해 그들은 그곳에 아름다운 날개를 달았던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바람에 흔들리면서, 그 바람을 이용해 종족번식이라는 대업을 완성한다.

그렇게 억새에게 '흔들림'이란 생존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자 원천이었던 것이다.

비단 종족번식이 아니라도,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으며, 또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추 세웠"다는 도종환 시인의 정언처럼, 억새도 정작 그러했음을 깨닫는다.

'흔들림'이라는 유연함이 그들을 보존케 하는 바탕이자, 방법이었던 것이다. 휘어질지언정 부러지지 않는, 그래서 힘을 힘으로 받지 않고 비껴 설 줄 아는 지혜가 그들이 온전히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던 것이다.

바람이 불면 억새는 가냘프지만 유려한 움직임으로 바람을 비끼고 또 타고 넘는다.

바람이 불 때 그들은 맞서지 않았다. 가냘프지만 유려한 움직임으로 바람을 비끼고 또 타고 넘는다. 끝없이 밀려드는 바람이건만, 억새는 인내와 끈기로 얼굴 한 번 붉히는 법 없이 살랑살랑 춤이라도 추듯 바람을, 또 비껴낸다. 어쩌면 살아내는 것만이 숙명이었던 이 땅의 전(前)주인들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 땅의 원래 주인은 화전민이었다.

이곳 명성산 정상 일대는 1950년대에 화전민들이 산에 불을 내서 밭으로 일구어 그들의 팍팍한 삶을 이어가던 생존의 터전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이곳은 경작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사람들의 땅이었다. 하지만 화전민들이 산 아래의 마을로 떠난 이후, 억새는 나무와 잡풀과의 기나긴 생존투쟁 끝에 기어이 이 땅을 차지하고 만다.

사람들은 저마다 억새의 자태를 담아내느라 여념이 없다.

지금 명성산에는 그들이 이뤄낸 투쟁의 역사를 알 리 없는 사람들은 그저 즐겁다. 억새들이 긴 세월동안 이뤄놓은 넓은 정복의 결과에만 취해 끊임없이 탄성을 자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어찌 탄성뿐이랴. 사람들은 저마다 억새의 자태를 담아내느라 여념이 없다. 갈대밭의 여기저기는 갈대만큼 많은 스마트폰이 저마다 소리를 지르며 터진다. 억새가 놀라 소스라칠 지경이다.

억새는 바람이 불어도, 사람들이 몰려와 탄성을 터트려도 그저 가만히 흔들리며 미소만 지을 뿐이다.

하지만 억새 입장에서야 그들이 자신들의 업적을 몰라주면 또 어떤가. 그들이 이뤄놓은 결과에 이토록 즐거워하는 것을...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세상사에서 자신의 생존을 위한 분투의 결과가 남에게도 즐거운 일이 몇이나 있었던가. 억새가 해낸 일은 모두에게 즐거운 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억새는 바람이 불어도, 사람들이 몰려와 탄성을 터트려도 그저 가만히 흔들리며 미소만 지을 뿐이다. 다만 바라노니, 그들의 생존의 터전이 사람들로 인해 훼손되는 일은 없기를... 억새는 눈으로만 보고, 가슴으로만 느끼면 충분할 일이다.

바람을 타고 넘는 그의 품새는 유연했고, 또 부드럽다.

바람이 분다.

산 아래에서 시작된 바람의 물결은 산 정상을 향해 내달린다. 억새들은 파도를 타고 넘는 서핑하는 그를 닮았다. 긴 세월을 단련한 그의 품새는 유연했고, 또 부드럽다. 등성이를 따라 흐르던 너울은 자유자재로 방향을 바꾸고, 억새는 바람이 이끄는 대로, 그렇게 넘실대며 흐르고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서로 어깨를 걸고 서로에게 몸을 기댄 채로 단체 줄넘기를 하듯, 혹은 강강술래 춤을 추듯, 바람과 더불어 어우러지고 있었다.

세월의 더께가 더해지고, 결국 무언가를 아는 시점이 되면, 그렇게 부대끼던 악연도 결국 인연이 되는 사실을, 바람도, 억새도 알고 있는 듯했다.

산 정상에서 휘몰아치던 바람이 계곡으로 내처 달릴 즈음, 우리도 바람을 따라 아쉬운 작별을 고한다. 가야할 시간이다.

산을 내려가는 길에, 억새와의 감격적인 만남이 가져다준 감동이 아직도 남아있음인지, 문득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이란 고은 시인의 시구(詩句)가 떠오른다. 이유는 억새의 휘황한 행렬에 갑자기 눈이 뜨였음인지, 내려가는 길에 만나는 단풍이 더 곱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산을 내려가는 동행의 흥겨운 발걸음들 속에서 산에 온 보람을 느낀다. 즐거운 누군가를 바라보는 것은, 나 또한 즐거워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새삼 나는, 또 우리는 '더불어' 살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렇게 우리는 '같이' 살고, '같이' 걷고 있었다.

아, 그런데... 명성산이 끝이 아니었다. 산정호수(山井湖水)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와서 산정호수를 모른 채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산 속의 우물'이란 이름을 가진 산정호수는 일제 강점기인 1925년 농업용수 공급을 목적으로 축조된 관계용 저수지가 그 시작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하나, 한국전쟁 이전에는 이곳이 북한 땅이었다는 사실이다. 전쟁 후 휴전선이 그어지면서 산정호수는 우리 영토가 된 것이다. 그런 이유로 산정 호수 제방 끝 지점에는 김일성 별장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안내문만이 그곳이 과거 김일성 별장 터였음을 증언하고 있다.

산정호수를 따라 에둘러 이어져 있는 1km남짓한 나무데크 산책로를 걸었다. 그야말로 물 위의 산책이다. 걸으며 바라본 산과 호수는 적당히 거리를 둔 채로 물끄러미 서로를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다가갈 수 없는 평행의 철로처럼 그들은 앞으로도 긴 세월동안 지금껏 그래왔듯이 그렇게 바라보며 그리움만 키울 것이다.

호수의 둘레길이 끝나갈 즈음, 말을 탄 채로 어디론가 달려가고픈 궁예의 동상이 보인다. 이곳은 궁예가 패망 후 잠시 몸을 의탁했던 그의 땅이었음을 새삼 깨닫는다. 그도, 우리도 그렇게 왔다가 간다. 이제 와서 돌아보면 명성산을 울렸던 그의 통곡도 다 부질없는 일이었음을 그도, 이제는 알리라.

호수 위로 가을이 저물고, 사람들은 다시 그의 길을 간다.

호수 위로 가을이 저물고, 사람들은 다시 그의 길을 간다.

● 명성산 가는 길

<버스>
- 의정부역에서 138-6번 좌석버스 (의정부역 – 산정호수)
- 포천시내버스 10번, 10-1번 (영북면사무소 - 산정호수)

<자가용>
- 산정호수 상동주차장    

▶ [라이프] 억새와 춤을?…명성산(鳴聲山)을 오르다 ①
 

박대영 기자cyumin@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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