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건 그후] 12년 만에 '1cm 쪽지문' 주인 찾았지만..'강릉노파 살인 사건' 영구미제 되나

오경묵 기자 2018. 11. 4.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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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노파 살인 사건, 다시 미궁 속으로
‘1cm쪽지문’ 주인 12년 만에 찾아냈지만 무죄
1심·2심 "지문 묻은 경위 알 수 없다"…檢, 항소 포기

A씨가 숨진 현장에서 발견된 1cm짜리 쪽지문. /강원지방경찰청

2005년 5월 13일.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에서 한 구의 시체가 발견됐다. A(당시 69세)씨가 손발이 묶인 채 숨져있는 것을 이웃 주민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

A씨의 입에는 포장용 테이프가 붙여져 있었고, 손과 발은 전화선 등으로 묶인 상태였다. 이웃 주민은 "A씨의 집 현관문과 안방문이 열려있고, TV 소리가 들리는데도 인기척이 없어 들어가 보니 A씨가 숨져 있었다"고 했다.

부검 결과 A씨의 사망 원인은 기도 폐쇄와 갈비뼈 골절 등 복합적 원인이었다. 범인이 포장용 테이프로 얼굴을 감아 숨을 쉬지 못하게 한 뒤 무차별 폭행한 것으로 경찰은 추정했다. 경찰은 금품을 노린 강도가 A씨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살해한 것으로 보고 수사를 벌였다. 안방 장롱 서랍이 모두 열려있었고, A씨의 금반지 등 80여만원 상당의 귀금속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수사는 난항을 겪었다. 주변에 CCTV도 없었고, 별다른 증거도 나오지 않았다. 경찰은 현장에서 지문 17점을 채취해 감식을 의뢰했지만, 대부분 A씨와 가족의 것으로 확인됐다. A씨의 얼굴을 감은 포장용 테이프에 흐릿하게 남은 1cm 길이의 쪽지문이 나왔지만, 당시 기술로는 용의자를 특정하기가 어려웠다.

경찰은 마을 주민 B(당시 45세)씨를 용의자로 판단했다. B씨는 A씨에게 200여만원을 빌리는 등 채무 관계가 있었고, 범행 당일 행적에 대해서도 횡설수설했다. B씨가 무속인을 찾아가 'A씨를 살해한 범인이 언제 잡힐 것 같으냐'고 말한 것도 정황증거가 됐다. 경찰은 B씨에게 자백을 받아냈다.

하지만 사건은 검찰로 송치된 후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B씨는 검찰에서 "A씨를 죽이지 않았다"고 진술을 뒤집었다. 거짓말 탐지기 조사도 이뤄졌지만 B씨의 혐의를 입증하는 데는 실패했다. B씨는 결국 용의 선상에서 제외됐고, 수사는 사실상 중단됐다.

미제로 남아있던 사건은 12년 뒤인 2017년 의외의 돌파구를 찾았다. 1cm 쪽지문과 일치하는 사람을 찾았다는 감정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용의자로 지목된 이는 인근 동해시에 살던 C씨(52)였다. 경찰은 이를 바탕으로 C씨를 중심으로 재수사를 벌였다. C씨가 사건 당시 경제적으로 궁핍했고, 과거에도 유사한 수법의 범행을 저지른 사실이 드러났다. 특히 C씨는 범행 시간대에 지인이 운영하는 강원 동해시의 술집에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경찰은 주변인 수사를 통해 C씨가 당시 술집에 없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거짓말 탐지기 검사에서도 모두 거짓 반응을 보였다.

/김도원 화백

◇"지문, 범행과 무관하게 남겨졌을 가능성"
C씨는 강도살인 등 혐의로 기소됐고, 1심 재판은 지난해 12월 14~15일 이틀간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됐다. 치열한 법정 공방 끝에 나온 결론은 무죄였다. 특히 배심원 9명 가운데 8명이 무죄 의견을 냈다.

핵심 쟁점은 '쪽지문'만으로 C씨의 범행을 입증할 수 있는지였다. 재판부는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증거는 범죄 현장에서 발견된 박스 테이프 안쪽 속지에서 발견된 C씨의 지문이 유일하다"며 "이 지문은 사건 범행과 무관하게 알 수 없는 경위로 남겨졌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재판부는 또 "범행 직후인 2005년 무렵 수사기관은 A씨와 같은 마을에 사는 사람을 용의자로 지목해 수사를 했을 뿐, 마을 사람이 아닌 외부인의 범행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수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범행 무렵 A씨의 집 주변 도로에 어떤 차량이 지나갔는지, CCTV 등에 찍힌 외부인은 없었는지 등에 대한 수사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C씨의 방어권 문제도 지적했다. 재판부는 "C씨는 이 사건으로부터 약 12년 후에야 범인으로 지목됐다"며 "긴 시간이 지나는 동안 여러 증거가 흩어지고 일부 없어져 무죄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제시하기가 어렵게 됐다"고 했다.

◇항소심도 무죄·검찰은 상고 포기…영구 미제 사건 되나
검찰은 항소했다. 핵심 증거인 쪽지문에 대한 C씨의 주장과 1심 법원의 판단을 깨기 위해서였다.

검찰은 "C씨는 ‘(쪽지문이 나온) 포장용 테이프를 오토바이에 넣고 다녔는데 오토바이를 분실했다’며 오토바이를 훔쳐간 인물이 범행을 저지른 것이라는 취지로 주장한다"며 "하지만 C씨와 동거하던 이의 말을 들어보면 오토바이를 도난당한 사실이 없다고 한다. C씨의 주장에는 신빙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도 지난달 24일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공소사실이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증명됐다고 볼 수 없다"며 "이 같은 판단에 명백히 반대되는 충분하고도 납득할 만한 사정이 없다"고 했다.

검찰은 상고심의위원회를 열고 상고를 포기했다. 상고심의위원회의 외부위원 6명 모두가 '(대법원에 상고하더라도) 번복될 가능성이 희박하다'며 상고 포기 의견을 냈기 때문이다. 검찰은 지난달 31일까지였던 상고장 제출 기간 내에 상고장을 내지 않았다.

이로써 C씨의 무죄는 확정됐다. 13년 전 그날, A씨를 살해한 범인은 누구일까. 사건은 다시 미궁에 빠졌고, 영구 미제로 남을 가능성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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