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존경하는 판사님, 사람을 죽였습니다"..'5만원짜리 대필 반성문' 의뢰해보니

한동희 기자 2018. 11. 12. 19:0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살인범도 살리는 반성문’ 대필 의뢰해 보니
重범죄도 장당 5만원에 ‘하루 완성’
"존경하는 재판장님"…반성문에도 공식
"결국 ‘판사 아부’ 아니냐" 비판도

"존경하는 재판장님! 죽을 죄를 지은 제가 존경하는 재판장님께 죄를 처절히 뉘우치면서 고개 숙여 반성문을 올립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쓴 저의 서툰 글을 재판장님의 넓으신 이해와 용서로 거두어주세요."

대필(代筆) 작가는 ‘반성문’을 이렇게 시작했다. 절절한 사연이 뒤따랐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외동아들, 두 살배기 딸, 거동이 불편한 부모님까지 등장했다. 5분 간의 전화상담만으로 대필작가는 2200여자(字)에 달하는 ‘판사님 전(前) 상서(上書)’를 써내려 갔다. 대가로 수고비 9만원이 청구됐다.

그래픽=정다운

폐지 줍던 여성을 때려 살해한 혐의로 구속된 ‘거제 살인사건’의 피의자 박모(20)씨가 법원에 반성문을 제출하면서 ‘반성문 감형(減刑)’ 반대 여론이 일고 있다. 반성문·탄원서 대필을 전문으로 하는 법률사무소가 성행한다는 것이다. 조선일보 디지털편집국이 "음주운전으로 사람을 치어 죽였다"는 내용으로, 모두 세 곳의 대필업체들에 반성문 대필을 의뢰했다. 22만원의 비용이 들었다.

반성문 수신자는 뜻밖에도 피의자 유가족이 아니었다. 판사였다. 세 곳에서 넘겨 받은 반성문의 첫 문장은 각각 "존경하는 재판장님!" "존경하는 재판장님께 올립니다" "존경하는 판사님"으로 시작한다.

◇수고비 5만원, 제작기간 하루… 반성문 나오기까지
본지가 의뢰한 ‘가상 사건’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김모(24)씨가 만취상태로 운전하다 횡단보도에 서있던 피해자(66)를 치어 숨지게 했다. 여기에 가중처벌 요소를 추가했다. "119에 신고하라"고 목격자가 재촉했지만, 김씨는 차를 버리고 달아났다. 도주 끝에 김씨는 직장에서 체포됐다. 범인 김씨는 이혼한 뒤 홀로 두 살배기 딸을 키우고 있다. 법률적으로는 음주운전, 뺑소니, 도주치사 혐의가 적용되는 중범죄를 저질렀다.>

반성문은 대필업체들의 손에서 하루 만에 완성됐다. 각기 다른 곳에 의뢰한 세 편의 반성문에서는 일정한 공식이 있었다. ①우선 ‘존경하는 재판장·판사님’으로 문장을 시작한다. ②반성문 초반부는 사건 경위를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③다음으로 정상 참작사유를 여러 각도에서 조명한다.

반성문 대필업체들은 ‘불우한 가정사(史)’에 필력을 집중했다. 실제 반성문 작성 전 전화상담 과정에서 집중적으로 이 부분을 질의했다. 현재 경제적 형편이 어떤지, (가상범죄에 적어낸)두 살 난 자녀는 누가 부양하는지, 부모님이 여유가 있는지를 꼼꼼히 따져 묻는 식이었다. 반성문 대필업계 관계자들은 "재판부 정상참작에서 중점적으로 보는 부분이 바로 가정환경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A 대필업체는 이렇게 썼다. "이제 두 살 먹은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앞이 캄캄합니다. 저 때문에 급격하게 건강이 나빠질 어머님과 아이를 생각하면 밤잠도 이룰 수 없습니다."

범행이 ‘우발적’이라고도 했다. 뺑소니 혐의에 대해서 "순간 당황했다" "순간의 판단착오로 현장을 이탈했다" "피해자가 죽을 줄은 몰랐다"고 적어내는 식이다. B대필업체는 ‘초범(初犯)’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같은 잘못으로 조사를 받아 본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판사가 부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개인사는 촘촘하게 방어논리를 세웠다. 가상의 범죄자 김씨가 이혼한 배경은 ‘성격 차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C대필업체는 "의뢰인(범죄자)이 가정생활에 소홀했다는 인상을 (판사에게) 줘서는 안 된다"고 설명했다.

대필업체들은 ‘어떻게 하면 감형 받을 수 있는지’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모든 업체가 "죄질이 나쁠수록 유가족과의 합의가 관건"이라고 했다. B대필업체 측은 "매일 (판사에게) 반성문을 내는 것 이외에도 유가족에게 전할 사과문도 쓰는 성의가 필요하다"며 "패키지로 계약하면 요금을 깎아주겠다"고 말했다.

필자가 전문행정사인지, 전문작가가 쓴 것인지에 따라 내용은 다소 달랐다. 본지가 의뢰한 세 군데 대필업체에서 A·C업체는 작가가, B업체는 행정사가 썼다. 작가가 쓴 반성문은 전반적으로 극적(劇的)이었다.

행정사가 "지난 1주일간 잘못을 뒤돌아 봤습니다. 어떠한 변명으로도 면해지지 않는 일입니다"고 한다면, 작가는 "지난 1주일간은 제 생에 가장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오는 시간이었습니다. 모든 게 저 한 사람의 잘못입니다. 어찌 고개를 들고 말씀 올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쓰는 것이다.

◇"판사에게 아부해서 감형 받는 것 아니냐"
"저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아르바이트로 어머니와 누나를 부양하며 생활하다가 최근 입대를 앞두고 심리적 압박을 느꼈습니다." 재판을 앞둔 ‘거제 살인사건’ 피의자 박모(20)씨의 반성문을 뜯어보면, 대필업체가 강조하는 요소가 두루 포함되어 있다. 수사기관에서는 "‘자필 반성문’"이라고 했다.

박씨의 반성문 제출 소식을 계기로 "진정으로 반성한다면 목숨으로 갚으라"는 분노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한국에서 사람을 죽이려면 일단 취하고, 그 다음에 반성문을 쓰면 된다’는 조롱까지 나오는 형편이다. 직장인 김미정(33)씨는 "반성이 아니라 솔직히 판사에게 아부하는 것 아니냐"면서 "살인해도 술에 취했다, 지금은 후회한다고 해버리면 감형되는 현실에 염증을 느낀다"고 말했다.

거제 살인사건 피의자 박모(20)씨는 재판을 앞두고 반성문을 세 차례 제출했다. /CCTV 영상 캡처

반성문 대필업체가 성행하면서 "더 이상 반성문을 믿어선 안 된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법에 나와있는 감경 참작요소를 짚어서 써내는 ‘기술적인 글’에 진정성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들은 반성문 수신인이 피해자가 아니라 ‘판사’인 점을 지적한다. 서울 일선 경찰관의 얘기다. "반성문 시작은 늘 ‘존경하는 판사님’이에요. 피해자나 그 유가족이 아닙니다. 범죄자가 재판부에 바라는 것은 ‘감형’말고 뭐가 있겠습니까. 이런 게 무슨 반성문입니까. ‘감형요구서’가 더 정확한 표현일 겁니다."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