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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초 '시한폭탄' 비격진천뢰, 고창 땅속서 '우르르'

입력 2018.11.15. 09:16 수정 2018.11.15. 21:16
고창 무장현 옛 읍성터 발굴조사 성과
조선 최초의 시한폭탄 비격진천뢰 11점 발굴
살상력 높아 임진왜란 때 큰 수훈 세워
현전해온 비격진천뢰 유물은 6점 불과해

[한겨레]

전북 고창 무장현 읍성 군사시설 터의 구덩이(수혈) 안에서 발견된 비격진천뢰 유물들. 역대 최대규모인 11점이 무더기로 나왔다.

포탄이 툭 떨어진 뒤 조금 지나고 나서야 무서운 굉음을 내며 폭발한다. 화약만 터지는게 아니라, 탄 속에 잔뜩 든 날카로운 철조각들이 사방에 섬광과 같이 흩어진다. 이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닌 조선시대의 ‘시한포탄(혹은 폭탄)’이 바로 500여년전 임진왜란 시기 신무기로 나온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다.

비격진천뢰는 오늘날 한국인에게도 비교적 익숙하다. 오래 전부터 티브이 다큐물이나 드라마에도 조선을 대표하는 무기로 많이 소개됐다. 포구가 확 벌어진 대완구 소완구란 화포로 발사하는 모습을 기억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살상력 등의 성능이 강력하고 섬광 등의 이미지 효과도 강렬하다. 임진왜란 등에서도 큰 전공을 세운 것으로 이름난 조선의 첫 ‘시한폭탄’ 비격진천뢰가 최근 남도의 고창 땅속에서 줄줄이 세상에 나왔다.

호남문화재연구원은 전북 고창 무장현 옛 조선시대 관아와 읍성터를 최근 발굴조사한 성과를 15일 발표했다. 최근 조사과정에서는 군사 훈련장 터와 무기창고 건물터들, 수혈(구덩이), 도로시설 등이 잇따라 드러났다. 특히 수혈 안팎에서 국내 최초의 시한폭탄으로 꼽히는 알 모양의 비격진천뢰가 역대 최대규모인 11점이나 발견됐다. 무더기로 나온 비격진천뢰들은 모두 무쇠로 만들어졌다. 한점의 지름이 21㎝, 무게는 17∼18㎏에 달한다. 안에 빈 공간을 파서 화약과 철 조각, 대나무통에 심지줄을 감아 불을 붙이는 신관(발화 장치)을 넣는 얼개로 되어있다. 또, 수혈 옆에는 비격진천뢰를 쐈던 걸로 추정하는 지름 170㎝ 정도의 원형 포대시설 터도 드러났다. 기존에 전해져온 비격진천뢰 실물은 국가보물인 국립고궁박물관 소장품을 비롯해 하동군 고현성지, 진주성지 등에서 출토된 6점에 불과하다. 포탄 11점이 포대시설의 흔적과 함께 한꺼번에 확인된 건 이번 발굴이 유일한 사례다.

비격진천뢰는 임진왜란 직전인 선조 24년(1591)에 화포장인 이장손이 발명했다고 전해지는 조선 특유의 신무기다. 중완구라는 화포에서 발사돼 표적지에 날아간 뒤 시간이 지나서 터지는 일종의 작렬 시한폭탄으로 분류된다. 섬광, 굉음과 함께 수많은 철파편을 사방에 흩날리는게 특징이다. 그 시대 다른 포탄들은 발사되어 성벽이나 시설물을 우선 파괴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지만, 비격진천뢰는 날아간 뒤 적병들 사이에서 폭발하는 인마살상용 무기라는 점이 다르다. 강력한 살상력을 갖고있어 임진왜란 당시 경주성 탈환전, 진주성·남원성 싸움 등 실전에서 큰 위력을 발휘했다는 기록들이 옛 사서에 숱하게 전해진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의 일부인 ‘선조수정실록’의 선조 25년(1592) 9월1일 기사에는 이 조선판 시한폭탄의 위력에 얽힌 박진감 넘치는 현장기록이 담겨있다. 왜군이 부산포를 침략하면서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4월 이후 불과 4달여만에 경상좌병사 박진이 경주성을 탈환한 승전의 기록이 소개되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비격진천뢰가 혁혁한 전과를 올리는 대목이 보인다.

‘박진이 경주를 수복하였다.…밤에 몰래 군사를 다시 진격시켜 성 밖에서 비격진천뢰를 성 안으로 발사하여 진 안에 떨어뜨렸다. 적이 그 제도를 몰랐으므로 다투어 구경하면서 서로 밀고 당기며 만져보는 중에 조금 있다가 포(砲)가 그 속에서 터지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쇳조각이 별처럼 부서져 나갔다. 맞아 넘어져 즉사한 자가 20여 명이었는데, 온 진중이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신비스럽게 여기다가 이튿날 드디어 성을 버리고 서생포(울산)로 도망하였다. 박진이 드디어 경주에 들어가 남은 곡식 만여 석을 얻었다. 일이 알려지자, (박진을) 가선 대부로 승진시켰다.’

무장 읍성에서 나온 비격진천뢰도 연안을 노략질하거나 침략하는 왜구나 왜병의 존재를 상정하고 비축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언제 만들고, 어떤 용도로 썼는지는 아직 확실하게 모른다. 19세기말 동학농민전쟁 당시 수세에 몰리던 관군이 묻어놓은 것이란 추정도 나오지만, 유물의 재질과 성분, 문헌을 좀더 연구해야 실체가 잡힐 것으로 보인다.

고창 무장 관아와 읍성은 태종 17년(1417)에 왜구를 막기위해 쌓은 이래 오랫동안 지역의 행정 군사 요충지 구실을 했다. 고창군 쪽은 2003년 이후로 연차발굴 조사를 지속하며 관련 유적들의 복원정비사업을 벌여왔다. 이번에 군사시설터가 나오면서 희귀유물인 비격진천뢰를 무더기 수습했고, 당시 포대의 구체적인 배치 얼개 등도 파악할 수 있게 됐다. 조선시대 군사시설·무기류 등의 배치상황과 사용 내력을 밝히는 데 큰 도움을 주는 실물 자료를 얻은 셈이다.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호남문화재연구원 제공

하늘에서 내려다본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 터의 전경. 성곽으로 둘러싸인 영역 가운데 아래 오른쪽 구석의 누런 맨땅 드러난 구역이 최근 조사된 훈련청과 군기고 추정터 유적이다. 여기서 비격진천뢰 11점이 무더기로 나왔다.
읍성터 안에서 확인된 포대 터. 돌들로 기반을 다진 뒤 중완구 등의 화포와 포를 놓은 거치대를 설치하고 비격진천뢰를 쏘았을 것으로 보인다.
현장에서 수습한 비격진천뢰 한점을 측면에서 찍은 모습.
출토된 비격진천뢰 3점을 단층(CT)촬영한 사진이다. 위 왼쪽 유물의 내부에 신관을 넣는 공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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