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친구가 딸 살해했는데..댓글은 딸을 비난하고 있었다

입력 2018. 11. 15. 10:56 수정 2018. 11. 15.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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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연인 살해 사건·인천 아내 살해 사건 등
피해자 비난하는 가해자 주장 여과 없이 보도
전문가들 "피해자·유가족 2차 피해 심각"

[한겨레]

그래픽 정희영 기자 heeyoung@hani.co.kr

“딸을 세 번 죽일 수는 없었어요. 가해자가 목 졸라 죽이고 주검까지 훼손했는데 잘못된 언론 보도와 악성 댓글로 또 죽일 순 없었어요.”

김민주(가명·23)씨는 지난달 24일 밤 강원도 춘천시 한 국밥집 2층 옥탑방에서 살해됐다. 같은 날 국밥집 인근 교회에서 긴급체포된 피의자는 심아무개(27)씨. 지난 7월 김씨와 교제를 시작해 최근 결혼 이야기가 오갔던 남자친구였다. 옥탑방은 국밥집을 운영하던 심씨가 살던 곳이다.

서울의 한 대학을 졸업하고 한 달 전 한 대기업 계열사에 입사해 서울 종로에 있는 회사로 출근했던 김씨는 살해된 그 날 “오늘 꼭 춘천으로 와달라”는 심씨의 끈질긴 부탁에 못 이겨 퇴근 뒤 지하철을 타고 춘천으로 향했다. 오후 8시13분께 “(이제) 밥 먹으러 갈 거야”라는 딸의 메시지를 받은 김씨의 어머니 ㄱ씨는 5분 뒤 딸에게 “(돌아) 오는 차는 예약했어?”라고 물었다. 답이 없었다. ㄱ씨가 애를 태우며 딸의 답장을 기다리던 그 시간, 심씨는 자신의 방에서 김씨의 목을 졸라 살해하고 김씨의 주검을 흉기로 여러 차례 훼손했다.

25일 아침부터 김씨의 죽음을 다룬 기사가 쏟아졌다. 심씨가 경찰에서 “결혼 준비 과정에서 신혼집 장만 등 혼수 문제로 여자친구와 다툼을 벌이다 우발적으로 죽였다”고 진술했다는 내용이었다. 한 언론은 ‘혼수가 뭐길래… 여자친구 흉기로 살해한 20대 긴급체포’ 같은 제목을 달기도 했다.

딸의 장례를 치르고 침대에 쓰러져 누워만 있던 ㄱ씨는 27일이 돼서야 이런 보도들을 알게 됐다. “사건 전 혼수·예단 문제는 이야기를 꺼낸 적도 없다”는 게 김씨 가족들의 말이다. 부모들끼리 상견례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딸을 언론에서 ‘예비 신부’라고 표현한 것도 가족들에게는 상처가 됐다. 이유가 있다.

“기사에 달린 댓글을 읽어봤는데 ‘뻔하다’ 이거에요. 모든 원인을 혼수·예단 쪽으로 몰고 가면서 ‘남자들만 (결혼 비용을) 지불하냐’ 이런 이야기도 있었어요. 민주는 그런 아이가 아니에요. 민주가 먼저 남자친구한테 신혼 자금 대출을 받아 서울과 춘천 중간쯤 집을 마련하고 둘이 벌어 천천히 갚아 나가자고 말했어요.”

ㄱ씨는 “살인자 말에만 의존한 기사로 인해 우리 가족과 죽은 민주가 또 한 번 억울함과 슬픔을 겪었다”고 토로했다.

지난달 24일 강원도 춘천시에서 남자친구에 의해 살해된 김민주(가명·23)씨가 생전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어머니 ㄱ씨는 “내게 딸은 친구 이상의 존재였다”며 “딸이 잘못한 것이 있다면 여자로 태어나 (가해자로부터) 빠져나올 힘이 없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사진 유족 제공

친밀한 관계에 있는 남성에 의해 살해당한 여성 피해자가 가해자의 발언을 여과 없이 보도한 언론에 의해 되레 범죄 원인을 제공한 것처럼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이 사건뿐만이 아니다.

11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구월동 살인사건의 세 자매입니다(아빠의 심신미약 주장 반대)’라는 제목의 청원 글에도 피해자인 엄마를 비난하지 말아 달라는 자녀들의 호소가 담겨있다. 7월13일 이혼 소송으로 별거 상태인 아내를 찾아가 흉기로 살해한 40대 남성의 딸이라고 자신을 밝힌 10대는 이 글에서 “기자들과 아빠는 엄마가 이혼 소송을 하면서 (우리에게) 아빠를 만나지 못하게 했다고 하는데 사실이 아니다. 엄마는 절대 친가족을 만나지 말라는 강요를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 40대 남성은 아내를 살해한 다음 날 경찰에 자수한 뒤 “아내가 척추 질환으로 아픈 나를 두고 자녀 3명과 함께 집을 나갔고 자녀를 만나지 못하게 했다”고 주장했다. 경찰이 밝힌 그의 주장은 기사에 그대로 실렸고 “아픈 사람 버리고 가니 벌 받았다”, “자식도 못 만나게 하고 죽이고 싶은 심정이 이해가 간다”와 같은 댓글이 잇따라 달리며 숨진 피해자를 비난했다.

이처럼 가해자의 말이 일방적으로 보도되고 세간에 사실처럼 퍼지면서 유가족들은 가족을 잃은 슬픔을 채 추스르기도 전에 이를 바로잡기 위해 직접 나서야 하는 상황에 부닥치고 있다. 김민주씨의 어머니 ㄱ씨도 지난달 31일 직접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심씨의 계획범죄임을 엄밀히 수사하고 엄벌에 처해달라는 내용이지만, ㄱ씨는 “만약 처음부터 사건의 진상이 알려졌다면 청원까지 올리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ㄱ씨의 말, 그리고 생전에 피해자 김씨와 피의자 심씨가 나눈 카카오톡 대화 내용을 종합하면, 심씨는 출신 대학을 속이고 김씨에게 접근했고 사건 약 한 달 전부터는 결혼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 심씨는 사건 이틀 전 ㄱ씨에게 전화를 걸어 “결혼하면 민주는 직장을 그만두게 하겠다”고까지 말했다. 자신이 운영하는 춘천 국밥집 2층 옥탑방에 신혼집을 차리겠다고 말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ㄱ씨는 “자기가 원하는 쪽으로만 밀어붙이는 느낌이었다”며 “(사건 당일도) 평일에다 옷차림이 불편해 춘천까지 가기 힘들다는 민주에게 계속해서 오라고 했다. 자신이 계획하고자 했던 게 안 되면 뭔가 ‘액션’을 취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계획범죄’라는 주장이다. ㄱ씨는 “가해자는 민주를 사랑한 게 아니다. 그저 자기 인생 성공의 증표처럼 옆에 두고 싶어 한 것”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이런 내용을 담은 ㄱ씨의 청원 글(▶바로 가기 :https://goo.gl/eiTvs8)은 14일 오후 3시 기준 15만5000명의 동의를 얻었다.

김민주(가명)씨의 어머니 ㄱ씨는 “청와대 청원을 올린 뒤에는 딸에 대한 악성댓글이 크게 줄었다”며 “편견과 오해로 보는 사람이 없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사진 청와대 청원 게시판 갈무리

전문가들은 “언론과 경찰 모두 문제가 있다”며 피해자와 유가족에 대한 ‘2차 가해’가 손쉽게 일어나는 현실을 비판했다. 김언경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은 “언론과 경찰 모두 가이드라인이 있지만 이와 상관없이 경찰은 불필요한 내용까지 언론에 공개하고, 언론 특히 온라인 매체들은 이를 문제의식 없이 받아쓴다”고 말했다. 한국기자협회 인권보도준칙을 보면, 언론은 범죄 발생의 원인이 피해자 쪽에 있는 것처럼 묘사해서는 안 된다. 김 사무처장은 “과거에는 ‘여자가 예뻐서 성폭행했다’는 피의자의 말이 뉴스에 그대로 나왔다. 여성을 상대로 한 살해 사건 보도에 있어서 ‘여자가 잘못했다’는 식으로 범행 동기를 설명하는 행태도 이제 그만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여성 살해’라는 사건의 본질을 직시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조재연 한국여성의전화 인권정책국장은 “가해자들은 범죄 원인을 피해자에게 전가하지만 사실은 여성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았다는 데에 대한 분노가 깔려 있다”고 지적했다. 조 국장은 “여성 살해 사건은 우발적이거나 홧김에 발생하지 않는다. 여성에 대한 통제, 협박, 집착, 폭력의 연장 선상”이라며 “가해자의 반성 없는 일방적 주장이 퍼지는 건 피해자를 모독하고 유가족들의 고통을 가중하는 ‘2차 피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유진 기자 y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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