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식 강요하는 가부장제..'섹시하다'와 '맛있다'는 둘 다 불평등하다 [책과 삶]

이영경 기자 2018. 11. 16.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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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육식의 성정치
ㆍ캐럴 제이 애덤스 지음·류현 옮김
ㆍ이매진 | 432쪽 | 2만5000원

맨부커상을 수상한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는 어느 날 육식을 거부한 여성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육식주의 사회에서 여자는 점점 미쳐가고, 여자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육식을 강요하는 것은 남편과 아버지로 표상되는 가부장적 권력이다. <채식주의자>는 육식의 폭력성과 가부장제의 폭력성을 연관지어 이야기한다.

한강이 섬세한 문장으로 육식의 폭력성을 그려낸다면, <육식의 성정치>는 육식과 가부장제의 연관성을 신랄하고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 책은 페미니즘과 채식주의의 연관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많은 문학 텍스트들을 언급하는데, 만일 저자가 <채식주의자>를 읽었다면 작품 목록에 당연히 추가되었을 것이다.

페미니스트이자 채식주의자인 캐럴 제이 애덤스가 1990년에 쓴 <육식의 성정치>는 뉴욕타임스가 ‘채식주의자들의 경전’이라고 부를 만큼 출간 이후 반향을 일으켰다. 한국에 2003년 출간됐다 절판됐지만 채식주의자와 페미니스트들 사이에 ‘필독서’로 꼽히며 중고서점에서 한 권에 8만원에 거래될 정도로 품귀 현상을 일으켰다. 2015년 출간 25주년 개정판이 새로이 나오면서 한국에도 다시 출간됐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개정판 출간을 환영하는 글들이 이어지고 있다. 무엇이 <육식의 성정치>를 이토록 뜨겁게 만들었을까.

저자는 ‘육식의 성정치’를 “여성을 동물화하고, 동물을 성애화하고 여성화하는 태도이자 행동”으로 정의한다. 여성은 가슴, 엉덩이, 다리 등 부위별로 분절된 이미지로 성적대상화되며, 고기를 먹는 행위는 종종 성적으로 이미지화된다. 고기를 광고하면서 돼지나 소가 섹시한 여성 이미지로 그려지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육식과 가부장제의 연관성은 비단 이미지로 소비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저자는 육식이 시작되며 가부장제가 출발한 역사적 순간부터 현대의 공장식 축산현장까지 신화와 문학작품, 미디어와 광고와 일상의 대화까지 광범위하게 가로지르며 가부장제와 육식의 관계를 파헤치면서 ‘가부장제-남성 지배와 공장식 축산-육식에 대항하는 페미니즘과 채식주의’의 연결고리를 그려낸다.

“고기는 늘 권력을 쥔 자가 먹었다.” 저자는 육식이 남성지배와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고 분석한다. 유럽 귀족들은 고기를 먹은 반면 노동자들은 합성 탄수화물을 먹었다. 여성들은 채소, 과일, 곡식을 먹었고, 이런 음식은 ‘2류 식품’으로 여겨졌다. 여성들은 고기를 먹는 대신 남자를 위해 요리했다. 1863년 영국의 식생활 습관을 조사한 에드워드 스미스는 “한 가족 안에서 식사와 관련된 남성과 여성의 가장 중요한 차별은 고기였다”고 보고했다. 육식은 성차별뿐 아니라 계급차별, 인종차별과도 연관돼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동물 성폭행, 여성 도살’이라는 도발적인 제목을 단 2장에선 ‘부재 지시 대상’이라는 개념을 통해 동물과 여성에 대한 폭력이 연결돼 있다고 주장한다. 동물은 도살돼 부위별 고기(안심, 등심, 사태 등)로 바뀌면서, 고기를 먹는 행동에서 부재하는 존재가 된다. “살아 숨쉬는 동물은 고기의 개념에서 부재하는 지시 대상이다. 부재 지시 대상은 독립된 실체로서 동물을 망각하게 만든다.” 이는 동물을 죽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고통과 비명, 핏물과 살덩이에 대한 인식 없이 고기를 먹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여성 또한 부재 지시 대상이 된다. 일부 생태주의자들은 자연에 대한 훼손을 ‘지구를 대상으로 한 성폭행’으로 비유하곤 했는데, 이때 여성에 대한 성폭행은 부재 지시 대상이 된다. 또한 강간이나 폭력의 대상이 된 여성은 종종 “자신이 고깃덩이가 된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이때 동물에 가해지는 폭력은 여성폭력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데 사용됨으로써 부재 지시 대상이 된다. 도살당하는 동물의 이미지는 여성을 억압하는 데 이용되기도 한다. 보스턴의 한 정육점에서 고기 대신 부위별로 표시한 여성의 누드 포스터를 붙여놓은 것이 일례다.

어떤 대상에 대한 폭력을 다른 폭력에 대한 은유로 사용할 때, 진짜 폭력은 보이지 않게 된다. 이렇게 여성의 동물화, 고기의 성애화는 ‘부재 지시 대상’을 통해 중첩되며 강화된다.

저자는 공장식 축산으로 이뤄지는 현대식 육식이 암컷 동물을 더 많이 착취한다고 지적한다. 곡류와 채소에 존재했던 단백질은 육식을 통해 동물화된 단백질이 되는 데 이어 우유·달걀의 대량소비를 통해 ‘여성화된 단백질’로 바뀐다. 말하자면 젖소나 암퇘지는 강제로 임신당하고, 출산과 수유를 반복하며, 새끼를 빼앗긴다. “동물의 암컷은 그 여성성 때문에 억압받으며, 생산성이 떨어지면 도살돼 동물화된 단백질이 된다.” 그리고 재생산에 대한 통제권을 빼앗긴 암컷 동물은 여성을 비하하는 멸칭으로 사용된다.

저자가 출간 25주년을 기념해 추가한 글은 책 출간 후 독자들이 보내온 광고와 이미지를 통해 ‘동물화된 여성과 여성화된 동물’의 사례를 생생히 보여준다. 코르셋을 입은 암소, 햄버거 옆에 벌거벗은 여성과 같은 이미지가 도처에 넘쳐난다. 이를 ‘인류학적 포르노그래피’라고 명명하며 죽은 동물을 여성화·성애화하면서 여성과 동물을 향한 폭력을 정상화한다는 점에서 ‘혐오 발언’과 같다고 지적한다. 그리하여 저자의 결론은 이렇다. “ ‘섹시하다’와 ‘맛있다’는 둘 다 불평등하다.”

이 책은 읽기에 불편할 수 있다. 페미니스트 활동가로서 매 맞는 여성을 위해 일하기도 했던 저자가 제시하는 여성폭력 사례들은 끔찍하다. 동물에 대한 폭력은 더 언급할 것도 없다. 이 책은 우리가 외면하고 싶었던 진실과 당연시해온 삶의 방식에 강력한 의문을 제기한다.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이 책은 ‘사실’을 ‘모순’으로 만드는 작업이다.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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