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임성한 단독 인터뷰] 하늘이시여.. 아니, 내몸이시여

김미리 기자 2018. 11. 17.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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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책 펴낸 방송작가 임성한 인터뷰
/일러스트= 안병현

지난 13일 사무실로 신간 도서 한 권이 도착했다. 자비 출판 자서전처럼 디자인이 어설펐다. 그림 하나 없는 하늘색 단색 커버. 노안 배려인가. 제목만 큼지막하게 두두둑 박았다. '암세포도 생명-임성한의 건강 365일'. 잠깐, 이 임성한이 설마 그 임성한? 책날개를 펼쳤다. '보고 또 보고' '인어아가씨' '왕꽃선녀님' '하늘이시여'…. 낯익은 드라마 제목이 프로필에 한 다발 적혀 있다. '욕하면서 본다'는 막장 드라마계의 대모 방송작가 임성한(58)이었다.

3년 전 드라마 '압구정 백야'를 끝으로 절필 선언했던 그가 건강 책으로 돌아왔다. 생뚱맞은 조합 아닌가. '막장·엽기' 드라마 양산해 시청자들 정신 건강 해쳤다는 비판의 당사자가 건강을 논한다니.

뜻밖의 컴백에 숨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워낙 인터뷰 안 하기로 유명한 작가다. 기대는 접고 혹시나 해서 책에 적힌 출판사 번호로 수차례 전화를 걸었다. 역시나 신호음만 떨어질 뿐 받지 않았다. 이메일을 보냈다. 얼마 뒤 매니저로부터 문자가 왔다. "서면 인터뷰를 하시겠다고 합니다." 정제된 글이 오가는 서면 인터뷰는 의미가 없다고 답했다. 조금 뒤 전화 인터뷰는 하겠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그날 밤 10시 임성한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차분하고 앳된 목소리였다. 귀청 찢어질 듯 격렬한 톤으로 비속어 쏟아내는 임성한표 드라마 속 캐릭터와는 사뭇 달랐다.

방송작가 임성한

―반신반의했는데 인터뷰에 응하셨네요.

"책에 적힌 번호는 안 쓰는 전화예요. 거기 몇 번 전화하고 메일도 보내고 그 정도 성의 보였는데 인간적으로 하는 게 도리라 생각했습니다. 번거롭고 사람들이 알아보는 게 싫어 그사이 안 했던 건데 '뭐가 대단하다고 인터뷰도 안 하느냐' 보는 시선도 좀 그렇고요."

―책 홍보가 필요하신 건 아니고요?(웃음)

"아니에요. 많이 안 팔려도 되고요. 책을 낸 건 주위 사람들이 건강 비법 알려달라고 늘 그러는데, 매번 말하려니 입이 아픈 거예요. 자세하게 알려주는 것도 힘들고요. 책을 쓴 첫 번째 이유예요."

1인 출판사를 차려 책을 냈다. '북-수풀림'이라는 출판사명은 자신의 성 임(林)에서 온 것. 어머니의 태몽도 숲이었단다. 굳이 출판사를 낸 이유는 "사인회, 간담회 같은 형식적인 거 할 필요 없이 내가 하고 싶은 방식으로 할 수 있어서. 사람들이 얼굴 알아보는 게 싫어서"였다고 했다. 강박적으로 얼굴 공개를 꺼렸다. 인터넷엔 예전 여권용 증명사진 정도만 떠돈다. "얼굴 알면 맘대로 돌아다닐 수 있겠어요? 내 옷 절반 이상은 고터(고속터미널)에서 산 거예요. 그런 데도 편히 못 다니고."

임성한의 신간 ‘암세포도 생명-임성한의 건강 365일’ 표지. “디자인 공해가 싫어” 의도적으로 촌스럽게 디자인했단다./북-수풀림 제공

―책 디자인이 요즘 책 같지 않습니다.

"인위적인 디자인에 멀미가 나서요. 현란하게 화장한 책이 너무 많아요. 촌스러워 보여도 일부러 반대로 가고 싶었어요."

―왜 하필 건강서인가요.

"건강은 평생의 화두였어요. 어렸을 때부터 약골이었어요. 악성빈혈로 고1 때 휴학도 했고요. 개성 출신 어머니는 골골한 막내딸(2남2녀)을 위해 지극정성 몸에 좋다는 건 다 해주셨어요. 작가가 되니 체력이 더 중요해졌어요. 일일극을 많이 썼는데 아파서 하루라도 대본을 못 쓰면 방송이 펑크 나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줍니다. 글 쓰는 기계처럼 살고 수도승처럼 규칙적으로 생활하면서 건강 상식을 공부했죠. 절필한 다음 해인 2016년 운동하다가 심하게 다리가 골절돼 수술받았어요. 건강의 중요성을 다시 깨달았죠."

―전공 분야는 아닙니다.

"온갖 건강 서적을 닥치는 대로 봤어요. 제목 보고 사면 하나같이 알맹이가 없었어요. 의문만 남았어요. 제 몸을 (실험용) '마루타' 삼아 쑥뜸도 직접 떠보고 부항도 해보고 별걸 다 해봤어요. 나름의 지식을 쌓게 됐습니다. 시청자 관심으로 이름값을 얻었는데 그들에게 보답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건강 노하우를 나누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책은 두통, 불면증, 위궤양, 빈혈, 요통, 스트레스 등 20개 장으로 구성돼 있다. 장마다 자기 경험을 들려주면서 체득한 건강 상식과 식단, 그를 통해 체질 개선한 지인들 얘기가 있다.

―신정아씨 체질 개선에 도움 준 얘기가 있던데요.

"'압구정 백야'를 준비하면서 미술계 얘기를 취재하러 만났어요. 외모만 세련됐지 입맛은 '초딩'이더라고요. 과자만 계속 먹는 거예요. 결국 제 조언으로 과자 끊고 모델 몸매로 바뀌었어요." 미술계 인사 중 왜 신정아를 찾았을까. 논란을 즐기는 건 아닐까. "저 같은 미술 문외한에게 미술계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니까. 저는 사람에 대한 선입견이 없어요."

―당신을 향한 대중의 선입견도 강합니다. 황당한 드라마 내용을 보면 정신세계가 이상한 사람일 거란 말도 많습니다.

"'임성한'이 아니라 '실성한'이라는 악플이 있더군요. 빵 터졌어요. 다 자초한 거죠(웃음)." 임성한은 책날개에 "사실 신경정신과 진료 기록이 있어 건강보험 가입하려면 제약이 있을 수도 있다"고 고백(?)했다. 농담 한 스푼 버무려 밝힌 이유는 "첫 작품 '보고 또 보고' 쓸 때 불면증에 시달려 응급 신경정신과를 찾은 기록이 남아 있어서"란다.

―자초했다는 건 비난을 예상했다는 건가요?

"드라마는 시청률이 가장 중요해요. 한 드라마에 수많은 스태프가 매달려 있어요. 시청률이 몇 퍼센트라도 떨어지면 제작진 얼굴이 어두워져요. 당장 금전적 손실이 나고요. 방송국에서 땅 파서 드라마 만들 수는 없으니까 제작비는 나와야 합니다. 감동과 재미까지 주면서 수익 내면 좋겠지만, 제 역량이 감동까지 주기엔 부족해요. 둘 다 잡기 어려우면 재미라도 잡자는 주의입니다. 재미없어 채널 돌리게는 하지 말자고 맘먹고 세게 갔지요."

―방송국 요구도 있었나요?

"시청률이 생각보다 안 오를 땐 '작가님 독약 풀어주세요~'라고 전화 와요. 그러면 집에 있는 운동 기구에 올라 고민하다가 '쎈' 내용을 넣습니다. 그래 내가 욕먹고 시청률은 살리자는 심정으로. 나중에 비난 쏟아졌을 때 발 싹 빼는 연출자도 있었어요."

―이런 신랄한 비판도 있습니다. '시청률에 목매는 방송사 시스템이 낳은 기형적인 산물인 동시에 과연 예술이 무엇이고 재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해주는 존재'라고.

"드라마 대본은 예술이 아닙니다. 기술에 가깝지요. 드라마로 예술까지 논하는 것은 오버예요. 방송사 입장에선 수익 올리는 게 중요하고요."

임성한 드라마는 막장 논란은 있었지만 흥행엔 모두 성공했다. 위부터 최고 시청률 57.3%를 기록한 첫 작품 ‘보고 또 보고’(1998~1999), 247부작이었던 ‘인어아가씨’(2002~2003)./MBC

―현실적이시네요. '막장 대모' '막장 창시자'. 이런 수식에는 이골이 났습니까.

"문영남 작가하고 둘이 세트죠(웃음). 그런데 신내림('왕꽃선녀님')이나 겹사돈('보고 또 보고') 이런 건 우리 주위에서 찾아볼 수 있는 소재입니다. 문 작가가 주로 쓰는 불륜 소재도 일상에 널렸어요. 그런데 막장이라고 해요. 할리우드 수퍼 히어로물에서 사람이 공중으로 뜨고, 손에서 거미줄 나오는 비현실적인 얘기는 황당하다고 하지 않으면서."

―욕과 악플이 아픕니까?

"'내가 쓸 때마다 기자들 투표해서 최악의 드라마로 뽑아? 그럼 보는 시청자들 수준이 다 최악이란 얘긴가?' 이렇게 사사건건 따졌으면 화병 났을 거예요. 전 개의치 않습니다. 드라마를 썼어도 적당히 썼으면 아무도 관심 안 가졌을 것을 최선을 다해 썼고, 매번 시청률 잘 나와 관심받으면서 악평도 많이 받았어요. 제가 선택한 삶이에요. 얻어지는 것, 잃는 것 둘 다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은 견디는 거예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책의 클라이맥스인 마지막 장 '스트레스' 편에 가장 많은 분량으로 속마음을 에둘러 쏟아냈다. 억울한 맘이 전혀 없진 않아 보인다.

―첫 직장이 컴퓨터 회사였다고요.

"고1 때 휴학했죠. 그전에는 불문과에 가고 싶었는데 결국 대학은 전산과를 들어가게 됐어요. 1984년 컴퓨터 회사에 들어갔어요. 8년간 초등학교 특별활동 컴퓨터 강사도 했고요. 그때 학교 양호실에 갔다가 여성 잡지에 실린 모 방송작가 인터뷰를 읽었어요. 이 직업 참 멋지다 싶은 거예요. 작가협회에 가서 6개월 공부하고, 1991년 KBS 드라마 게임 '미로에 서서'로 데뷔했어요. 재능은 좀 있구나 싶었는데 허투루 할 일이 아니었어요. 6년 동안 글공부를 한 다음 1997년 MBC 베스트극장 공모전에서 '두 여인'이 당선했어요."

초등학교 강사 시절 제자를 캐스팅하기도 했다. "하루는 TV 시상식에서 '옥승일'이라는 신인이 상을 받는데 가르친 애 같았어요. 남편(고 손문권 PD)한테 좀 알아봐 달라 했는데 그 친구가 맞았어요. 나중에 '아현동 마님'에 캐스팅했어요." 세상 떠난 남편 얘기가 나와 더 물어보려 했더니 "부탁인데, 그 얘긴 하고 싶지 않다"며 강하게 선을 그었다.

―3년 전 절필 선언을 했습니다. 이제 드라마는 안 쓸 건가요?

"정말 안 쓸 겁니다. 기사에 꼭 써주세요. 아직도 자꾸 방송사에서 연락이 오는데 이걸 보면 안 오겠죠(웃음)."

―책 말고 다음 계획은요?

"쓰고 싶은 건 참 많아요. 영화 시나리오 소재도 두 개 가지고 있어요. 하나는 '쎈' 거, 하나는 '나 홀로 집에' 같은 가족 영화요. 드라마와는 전혀 다를 거예요. 희곡, 수필도 쓸 거고요."

드라마 쓸 펜을 꺾었지 글 쓸 펜이 멈춘 건 아니었다. 새 계획 얘기에 한껏 밝아진 임성한이 난데없이 물었다. "그런데 김 기자는 키, 몸무게가 어떻게 되나요." 허를 찔린 채 무방비로 몸무게를 공개하고 말았다. "커피와 밀가루부터 끊어보세요. 자세한 체질은 만나 봐야 알겠고." 당할 수만은 없다. "저, 작가님은 어떻게 되세요?" "저는 정말 날씬해요. 백화점 가도 점원이 '어머 어쩜 이리 날씬하세요' 그래요. 고기 먹고, 식사량 줄이고, 커피 안 마시고, 많이 걷고." 잠시 잊었다. 건강 책으로 돌아온 작가 임성한이었다.

◆ 암세포도 생명, 눈에선 초록 레이저… 막장 드라마의 레전드 장면

무리수 설정의 전설로 꼽히는 ‘신기생뎐(2011년)’ 빙의 장면. 등장인물 아수라가 빙의할 때 눈에서 초록색 레이저가 나왔다./SBS


'자학 개그'인가, 오기인가. 임성한의 책 제목 '암세포도 생명-임성한의 건강 365일'은 '오로라 공주' (2013년) 118회에 등장해 논란을 일으켰던 대사에서 따왔다. 등장인물 설희가 암 치료를 거부하면서 "암세포들은 어쨌든 생명이에요. 내가 죽이려고 하면 암세포들도 느낄 것 같아요. 이유가 있어서 생겼을 텐데…"라고 말한 것이다. 당시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다. 5년 전 일이건만 여전히 여러 설문 조사에서 '무리수 설정' 수위를 다툰다.
임성한은 "비난을 예상해 바꿀까 고민했지만 암에 대해 취재하고 공부한 걸 부정할 수 없어 안 바꿨다"며 "암세포가 생명이 아닌 죽은 거면 이미 암이 아니다"라고 했다. 굳이 다시 이 대사를 끌고 나온 이유가 뭘까. "건강 책인데 암세포란 단어가 있으면 받아들이기 쉽고, (논란을 아는 이들은) 임성한이 쓴 건강 책이라는 걸 바로 알 테니까"라고 했다. 대사를 했던 배우 서하준은 예능 프로에 나와 "그 대사를 받고 5분간 얼음이 됐다"고 말했다. 임성한은 "그 친구도 많이 시달렸다"면서도 "그래도 인지도를 얻지 않았느냐.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게 있다"고 했다.
'암세포' 발언과 함께 '임성한 막장 레전드'로 꼽히는 게 '신기생뎐'(2011년) 빙의 장면이다. 등장인물 아수라가 빙의할 때 눈에서 초록색 레이저가 나왔다.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악평이 빗발쳤다. 임성한은 "시청률이 23%를 넘지 않자 드라마 국장이 전화해서 '임 작가님 25%만 부탁해요'라고 하더라. 욕먹을 게 뻔했지만 무리수를 뒀다"고 했다. 그때로 되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하겠느냐고 묻자 주저 없이 "그렇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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