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행사 불려다니는 병역특례 요원들

백철 기자 2018. 11. 25.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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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제14회 병역명문가 시상식에서 ‘예술요원들이 꾸민 국악공연’이라는 제목으로 병무청 홈페이지에 올라온 사진. / 병무청 홈페이지

“한 번은 별들 여러 명이 쭉 앉아서 식사하는 그 앞에서 공연한 적도 있죠. 예술요원의 봉사활동 취지에 전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봉사시간을 인정해 준다고 하니까 간 거죠.”

국악분야에서 예술요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ㄱ씨의 말이다. 예술요원은 체육요원과 더불어 병역특례요원이다. 4주간의 군사훈련을 마친 뒤 34개월 동안 544시간의 봉사시간을 채우면 군복무를 인정받는다. ㄱ씨는 봉사활동의 상당 시간을 군 관련 행사로 채웠다.

ㄱ씨 외에도 예술요원 중에 병무청, 한미연합사령부 등 군 관련 기관에서 봉사시간을 채운 이들이 많다. 대표적인 행사가 병역명문가 시상식이다. 지난해 9월 6일, 공군회관에서 제14회 병역명문가 시상식이 열렸다. 3대가 병역의무를 성실히 이행한 가문에 표창장을 주는 행사다.

■“취지 안 맞지만 시간 인정해주니까”

병무청이 홈페이지에 올린 시상식 현장 영상을 살펴봤다. 표창장 수여가 끝난 뒤 병무청 관계자들과 시상식 참여자들은 점심식사를 한다. 그 앞의 무대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이들의 축하공연이 벌어졌다. 거문고와 장구 소리에 맞춰 한 남성이 전통무용을 춘다. 다음 순서로 한 쌍의 남녀가 펼치는 판소리 공연이 이어졌다. 이날 공연을 한 이들 중에는 현재 병역특례로 복무 중인 예술요원도 있다. 한 예술요원은 지방 병무청에서도 이어진 병역명문가 행사에 참여해 총 29시간의 봉사시간을 인정받았다.

ㄱ씨의 말대로 군 관련 행사 참여는 병역특례요원의 봉사활동 취지와 딱 맞지는 않는다. 병역법 시행령에는 예술·체육요원의 봉사활동에 대한 규정이 나온다. 사회적 취약계층의 권익 증진을 위한 활동, 미취학 아동 및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활동이다. 물론 문체부 장관과 병무청장이 인정하는 활동도 시행령에 나오기는 한다.

예술요원들이 군 관련 행사에 동원된 사례는 적지 않다. 일선 군부대는 물론이고 특수전사령부, 육군 정훈공보실, 병무연수원, 한미연합사령부 등 예술요원의 봉사활동을 인정해주는 군 기관은 여러 곳이 있다. 한 예술요원은 모범 사회복무요원 표창장 수여식에서 공연해 5시간의 봉사활동을 인정받았다.

현역 병사들을 대상으로 한 것은 그나마 봉사활동의 취지와 어느 정도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예술체육요원 복무규정이 ‘청소년’을 9~24세로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병들을 대상으로 한 것인지 의문이 가는 활동들도 많다.

한 예술요원은 올해 4월 병무연수원에서 신임공무원 교육수료 축하공연을 하고 4시간의 봉사시간을 인정받았다. 올해 8월 병무청 창설 48주년 기념행사에서 병무청 직원들을 대상으로 판소리 공연을 하고 5시간의 봉사시간을 인정받은 경우도 있다. 올해 9월 기준으로 68명의 예술요원 중 22명이 각종 군 행사에 참여하고 봉사시간을 인정받았다.

복수의 예술요원들은 군 행사 동원이 자발적인 게 아니었다고 말한다. 자신의 모교에서 봉사활동을 했던 장현수·안바울 선수처럼 예술요원 상당수도 출신학교나 소속 기관을 통해 봉사활동 시간을 채운다. 하지만 정기적인 봉사활동 자리를 구하지 못한 경우에는 병무청이나 문예위가 추천하는 곳에서 봉사시간을 채울 수밖에 없다.

■장현수처럼 모교 봉사해도 검증 불가능

ㄱ씨는 “전적으로 요원들이 알아서 구해야 하는데 전통예술분야는 요원 숫자에 비해 공연이나 강습 기회가 적다. 저처럼 봉사시간을 많이 못채운 사람에게 병무청이나 문예위에서 이쪽에서 공연해보라고 추천을 하기도 한다. 군 행사처럼 이해가 안 가는 곳에 보낼 게 아니라 저희가 제대로 봉사를 할 수 있도록 문예위에서 정보를 충분히 제공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병역특례요원들에게 봉사활동을 사실상 자율로 맡기다 보니 많은 요원들이 출신 학교나 소속기관에서 봉사시간을 채운다. 클래식음악분야인 ㄴ씨는 서울대 음악멘토링 사업을 통해 봉사활동 시간 중 절반 가까이를 이행했다. 2013년부터 진행된 음악멘토링 사업은 서울대 음대 학생들이 경기 시흥시의 초·중등학생을 대상으로 음악을 가르치는 사업이다.

ㄴ씨는 “원래는 음악멘토링 사업에 참가한 학생들에겐 장학금이 수여된다. 하지만 저는 장학금을 받지 않는 조건으로 무료로 봉사를 했기 때문에 봉사시간으로 인정된 것”이라고 말했다.

10월 23일 국정감사에서 기찬수 병무청장이 병역특례 제도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 권호욱 선임기자

하지만 예술요원과 직접 연관이 있는 기관에서 과연 봉사활동을 성실하게 확인했을지 의문이다. 무용분야 예술요원 ㄷ씨는 국내에서 열린 국제 콩쿠르에서 금상을 수상해 병역특례를 받았다. 그는 자신의 모교인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만 340시간이 넘는 봉사시간을 채웠다.

ㄷ씨의 봉사활동 관련 서류를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구석이 있다. ㄷ씨는 지난해 3월부터 5월 19일까지 한예종 안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재능기부 교육을 했다며 봉사활동 확인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확인서에는 작성일자가 ‘5월 11일’로 돼 있다. 봉사활동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류가 작성된 것이다.

또한 ㄷ씨는 대학의 방학기간인 지난해 7월에서 9월까지 청소년 대상 재능기부 교육을 해 총 123시간의 봉사시간을 인정받았다. 그런데 한예종은 일곱 달이 지난 올해 4월이 되어서야 봉사활동 확인서를 발급했다. ㄱ씨, ㄴ씨 등 다른 예술요원의 경우 봉사활동이 끝난 날에 확인서가 발급되거나 늦어도 한 달 이내에 확인서가 나온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ㄷ씨의 봉사확인서에 직접 서명을 했던 한예종 관계자에게 연락해봤다. 이 관계자는 “행정조교가 봉사활동 실적을 올리면 저희가 교수회의를 통해서 충분히 봉사활동으로 인정할 수 있는지 검증을 하고 합당하다고 생각하면 서명을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교수는 “ㄷ 학생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 다만 저희도 서류를 보고 행정조교도 병무청에 연락해서 서류가 통과될 수 있느냐고 물어보고 확인한 다음에 서명을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봉사활동 수행기관에서 요원의 활동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외부에서도 봉사활동을 제대로 검증하기 어렵다. 예술위원회가 작성한 예술요원 봉사활동 내역에 따르면, 예술요원 중에 사진 등 별도의 첨부자료를 전부 제출한 사람은 10명도 채 되지 않는다. ㄱ씨, ㄴ씨, ㄷ씨 역시 자신의 활동에 대한 사진 첨부자료를 거의 제출하지 않았다.

ㄴ씨처럼 서류에 구체적으로 어떤 사업을 통해 봉사활동을 했는지 명시했다면 사후에 검증하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러나 ㄷ씨처럼 막연하게 ‘청소년 대상 봉사’라고만 했다면 검증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병무청, 문체부 등 병역특례 관련기관은 매해 연말에 예술체육요원의 복무실태에 대한 조사를 벌인다. 병역특례요원들이 편입 당시 특기분야에 꾸준히 종사하고 있는지, 군사교육소집 등은 이행했는지를 확인한다. 봉사활동 실적확인용으로 제출한 자료에 대해서도 검토한다.

예술요원들은 애초 감독기관에서 사진 등 별도의 첨부자료를 요구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한국무용분야의 ㄹ씨는 “병무청에서 불시에 제가 속한 기관을 찾아와 근무를 잘하고 있는지 물어보고 간 적은 있었다. 하지만 사진 같은 걸 제출하라는 말은 장현수 선수 건이 터지기 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었고, 기관에서 문제를 삼은 적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소속기관에서 봉사활동을 한다고 해서 문제제기를 받은 적도 없고, 활동 사진을 꼭 넣으라는 말도 없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과거 사진까지 제출하라고 하니 복무기간이 연장되는 게 아닌가 불안감이 든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는 병역특례제도를 아예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일고 있다. 병무청과 문체부는 지난 10월 병역특례제도 개선TF를 설립하고, 1년 이내에 병역법 개정안을 낼 예정이다. 예술·체육요원 봉사활동에 대한 전수조사도 진행하고 있다.

■콩쿠르 병역특례 선발, 시대착오적 발상

예술요원들은 봉사활동에 대한 철저한 검증은 필요하지만, 제도 자체를 없애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ㄹ씨는 특히 전통문화 보존을 위해서라도 병역혜택을 축소·폐지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다른 예술분야보다도 특히 전통예술분야는 점점 지원자가 줄어들기 때문에 병역혜택마저 없다면 신입생들이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는 “지금은 병역혜택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경쟁을 하는 분위기가 있다. 안그래도 한국무용뿐만 아니라 전통예술분야에 지원하는 남성들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병역혜택마저 없다면 전통예술이 과연 맥을 이어나갈 수 있을지 걱정된다”고 말했다.

예술요원들을 콩쿠르 결과로 뽑는 현실을 바꾸자는 의견도 있다. 한예종 출신의 한 현대무용가는 콩쿠르에서 좋은 성적을 낸 것과 해당 분야에서 우수한 것은 엄연한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이 무용가는 “세계적 추세는 예술가들의 기술보다는 창의성을 따진다. 분야를 막론하고 유명한 아티스트 중에는 콩쿠르 수상경력은 없지만 실력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람들도 많다”며 “콩쿠르에서는 창의성보다는 얼마나 팔다리를 잘 뻗는지, 정해진 동작을 멋지게 수행하는지를 중점적으로 평가한다. 콩쿠르를 갖고 등수를 매겨서 병역면제 혜택을 준다는 발상 자체가 시대적으로 뒤떨어진 발상”이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현대무용가 김모씨는 콩쿠르 결과에 대해서도 철저한 검증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제발레대회 실적으로 병역특례를 받은 전모씨의 경우 솔로분야 수상이 아니라 듀엣(파드되) 분야에서 수상했다. 김씨는 “파드되는 여성 선수의 비중이 80% 정도는 차지한다. 전씨와 함께 팀을 이룬 여성 선수가 여성 솔로분야에서도 대상을 탈 정도로 실력이 좋았기에 전씨도 상을 받은 것”이라며 “애초에 주최 측에서 한국의 특수한 상황을 알고 시상이 끝나고 추가로 상을 준 것이라서 다른 예술요원들과의 형평성 문제도 있다”고 지적했다.

무용가 김씨는 순수예술분야에만 한정된 예술요원 선발이 ‘국위선양과 문화창달’을 내세운 병역특례제도의 취지와도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실제로는 ‘순수예술 보호’의 목적으로 운영됐다는 거다. 그는 “세계적으로 순수예술분야는 침체되고 있고 즐기는 연령대도 높아지고 있다. 순수예술분야를 보호하려면 병역혜택이 아니라 다른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씨는 “한국 선수가 국제 콩쿠르에서 1등을 했다고 나라의 위상이 높아지는 게 아니다. 한국 비보이가 세계대회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대중가수가 전세계적으로 인정을 받는 게 훨씬 파급력이 크다. 바뀐 시대에 맞게 제도가 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상헌 민주당 의원은 “병역특례 봉사활동 제도가 요식행위처럼 됐다. 문체부, 병무청 실태조사 결과를 토대로 체계적인 봉사 인증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백철 기자 pudmak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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