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아동은 가정에서 자랄 권리가 있다"

정현주 입력 2018. 11. 26. 10:21 수정 2018. 11. 26.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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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홀트아동복지회 이사장' 말리 홀트, 하루도 청춘이 아닌 날이 없었다

[오마이뉴스 정현주 기자]

 
▲ 1959년 부산에 있는 고아원에서 봉사하던 당시 말리 홀트 1956년 말리가 한국에 왔을 당시 상황은 매우 열악했다. 시설마다 고아들은 넘쳐났고, 의사와 간호사는 턱없이 부족했다. 병원과 아동 보호 시설이 구분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매일 계속해서 아동들은 밀려들어 왔고, 매일 질병과 굶주림으로 죽어나가기도 했다.
ⓒ 홀트아동복지재단 제공
"스무 살 때였어요. 간호학교를 막 졸업했을 때, 아버지께서 한국으로 건너와 홀트 아동병원 일을 도와 달라고 하셨어요." 

입양인들의 기억 속에 감동으로 남아있는 해리와 버서 홀트 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부부는 1954년 한국의 전쟁고아에 대한 다큐멘터리 시청을 계기로, 이미 6명의 친자녀가 있음에도 한국 아동 8명을 입양했다. 그런데도 한국에 남아있는 많은 고아가 눈에 밟혀 한국으로 건너왔다. 이후 부부는 개인재산을 털어 일산 홀트 복지원과 홀트아동복지회를 설립, 고아와 장애인을 돌봤다. 언제 들어도 감동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10월 22일 깊어가는 가을,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기자는 부부의 자녀인 말리 홀트가 있는 일산 홀트 복지원을 찾았다.
  
▲ 복지원 정문에서 ‘말리의 집’으로 가는 길에 있는 빨간 벽돌로 만든 계단  59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 한 해리 홀트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쉰 아홉 개로 이어져 있다.
ⓒ 정현주
 
복지원 정문에서 '말리의 집'으로 가는 길에는 빨간 벽돌 계단이 단풍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가을 풍경을 자아낸다. 안내해 주신 분의 설명에 의하면 이 계단은 59세를 일기로 사망한 해리 홀트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계단이었다. 계단의 숫자가 59개인 이유도 이 때문이다. 말리의 집은 매우 작고 소박했다. 아버지 해리가 지었을 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말리는 일생을 함께한 동료이자 친구인 조병국 박사와 함께 살고 있었다. 조병국 박사는 홀트 부속병원의 의사로, 평생 홀트 복지원에서 고아와 장애인들을 돌봤다.

고민할 틈 없이 뛰어들 수밖에 없던 절박했던 현실
 
1956년 말리가 한국에 왔을 당시 상황은 매우 열악했다. 인터뷰가 시작되자 말리와 조병국 박사는 당시 상황을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의 기억 속에서 60년 세월은 한순간에 무색해졌다. 긴박했던 현실 모습이 눈앞에 생생히 펼쳐졌다. 시설마다 고아들은 넘쳐났고 의사와 간호사는 턱없이 부족했다. 매일 아동들이 밀려들어 왔고, 매일 질병과 굶주림으로 죽어 나갔다. 2018년의 눈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 '해외 입양'의 의미는 '아이들에게 가정을 찾아준다'기보단 '생명을 구한다'라는 표현이 더 적절해 보였다.
 
인터뷰 전에 '평범한 미국인으로서의 삶을 선택하지 않고 먼 이국땅에서 봉사하는 삶을 살고자 한 결정'에 관해 묻고 싶었으나, 나는 이 질문을 끝내 하지 못했다. 할 필요가 없었다는 말이 더 적절하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말리의 이야기 속에는 도움이 필요한 한국의 아동들, 장애인, 어려운 이웃들이 가득했다. 끊임없이 도와야 하는 손길들이 그의 삶에 펼쳐졌다.

젊은 말리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학업과 선교 활동을 계속했다. 홀트에만 머물렀던 것도 아니었다. '한국 컴패션'(Compassion Korea, 국제 어린이 양육기구 한국지부)이나 한국 정부와 연계해 전국의 보육원과 무의촌을 돌며 봉사활동도 했다.

"아마 1970년쯤이었을 거예요. 1968년 유례없는 흉년으로 한반도 남쪽에 고아들이 많이 생겼을 무렵이었죠. 컴패션 활동을 위해 광주에 있는 보육원에 갔습니다. 그런데 100명이 넘는 아이들이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어요. 원장 선생님은 '독감'이라고 하셨죠. 제가 아픈 아이 몇 명을 병원에 데리고 갔어요. 그런데 진단을 받아보니 사망률이 높은 고열의 전염병 '장티푸스'였어요. 다급히 격리치료를 했습니다."
 
모든 아동은 가정에서 자랄 권리가 있다
 
▲ 일산홀트복지타운에서 장애인들과 함께 살고 있는 말리 홀트 말리는 2013년 골수암 판정을 받았다. 이미 주님의 뜻에 따라 봉사하는 삶을 살기로 한 말리에게 병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받아들이며 치료했다. 다만 살아있는 동안 돌봄이 필요한 아이들, 장애인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은 마음 뿐이다.
ⓒ 홀트아동복지재단 제공
 
1990년대 이후 한국의 '해외입양'은 '고아 수출국'라는 국제적 비난을 받았다. 해외 입양을 주도해 온 홀트 역시 그 비난의 중심에 있었다. '고아 수출'이란 단어를 꺼내자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가던 말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런 이야기 들으면 아주 섭섭하고 속이 상해요. 수출이라니요? 우리 부모님은 개인재산을 털어 이 사업을 했어요. 그런 말 하는 분들에게 부탁하고 싶어요. '그런 얘기하기 전에 본인이 먼저 입양을 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아이들이 가정이 아닌 보육원에서 자라기를 바라는 건가요? 시설이 아무리 좋고 제도가 나아져도 가정이 아닌 곳에서 자란 아이들은 사랑받기도, 삶을 배우기도 힘들어요. 그런 주장 때문에 요즘엔 2살 미만의 아기들까지도 입양이 잘 안 되고 있어요." 

말리는 2013년 골수암 판정을 받았다. 이미 주님의 뜻에 따라 봉사하는 삶을 살기로 한 말리에게 병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않았다. 겸허히 받아들이고 치료에 임하고 있다. 다만 살아있는 동안 돌봄이 필요한 아이들, 장애인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길 바랐다.

그가 있는 동안 일산에는 날이 갈수록 장애아동이 많이 들어왔다. 당시 정부는 해외 입양을 줄이고, 국내 입양을 늘리는 정책을 시행했다. 이후 일산 홀트 복지원은 장애아동이 넘쳐났다. 한국인의 정서로 볼 때 장애아동을 입양하는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말리는 몸이 불편한 아이들과 24시간 생활하며 아이들에 대한 끊을 수 없는 애정이 생겼다고 했다. 특수교육의 전문 인력이 부족함을 느꼈던 말리는 1976년 미국으로 건너가 오리건 대학에서 특수교육 6개월 과정을 수료하기도 했다.
 
▲ 말리의 공책 공책에 무언가를 메모하기도 하고 메모한 것을 찾아보기도 하며 이어진 말리의 이야기는 인터뷰 내내 쉴 틈 없이 계속되었다. 말리의 공책에는 자신의 메모뿐 아니라, 방문객들이나, 지인들이 쓴 인사말, 카드도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 정현주
부모가 남긴 개인 재산이 한국에 남아 있는지를 묻자, 말리는 아버지의 꿈 하나를 이야기해 주었다.

"개인 재산은 없어요. 전부 홀트 재단의 것입니다. 현재 한국 지부가 여덟 군데 있어요. 미국에 있던 땅을 팔아 지부 설립에 사용했어요. 아버지가 물려주신 땅도 많고 돈도 많아 홀트를 이용하려는 사람도 있었지만 헌신적인 분들, 고마운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버지 유언을 잊지 않고 있어요. 복지타운 주변 땅이 홀트의 것인데, 이곳에 장애인을 위한 아파트를 짓고 싶어요. 장애인들을 시설에 수용하는 게 아니라 자기 집에서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버지의 유언이었습니다. 그냥 아파트가 아니라 장애인을 위한 시설을 갖춘 집을 짓는 거죠. 가까이 있는 복지원 시설들을 왕래하면서 사용할 수 있게 말이에요. 사실 돈, 사람, 땅 모두 있는데 법이 없어서 못 짓고 있어요. 건축 허가가 아직 안 나서요."
    
말리는 공책에 무언가를 적기도 하고, 메모한 것을 찾아보기도 하며 쉴 틈 없이 인터뷰를 이어갔다. 고령의 환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골수암 투병 중인 84세의 말리는 새로운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여전히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 속에 소박한 모습으로 숨 쉬고 있었다. 스무 살 처음 한국 땅을 밟던 그때부터 6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말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루도 청춘이 아닌 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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