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징용 판결과 국제사법재판소 [시선]
[경향신문] 일제강점기 징용공들에게 신일철주금이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대법원이 최근 판결했다. 일본 정부가 반발하는 것은 물론 일본 언론도 비난하고 있다. 일본 언론은 “대법원의 결론은 1965년 한·일 양국이 체결한 청구권협정에 반하는 것”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한·일 역사문제를 두고 진보와 보수 언론이 이렇게까지 일치된 의견을 내는 경우는 드물다. 여기에 많은 일본인들이 공감하고 있다. 이에 일본 정부는 “국제사법재판소(ICJ) 제소를 비롯한 다양한 방법으로 국제사회에 대법원 판결과 한국 정부의 부당함을 호소하겠다”는 강경 발언을 하고 있다.
나 역시 일본에서 비슷한 청구권 소송 대리인으로 참여한 적이 있다. 지방재판소, 고등재판소를 거쳐 최고재판소까지 갔지만 소멸시효를 이유로 모두 패소했다. 일본 재판에 한계를 느낀 동료 변호사들은 미국의 주법원에 제소하면 어떻겠냐는 얘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전쟁 피해에 근거한 손해배상 청구권에 대해서는 소멸시효를 인정하지 않았고 관할도 폭넓게 인정해준다. 일본 법원에서는 소멸시효라는 쟁점과 함께 청구권협정이라는 국가 간 조약이 개인의 민사상 청구권을 소멸시킬 수 있느냐는 문제도 쟁점이었다. 이 문제를 오랜 기간 회피하던 일본 최고재판소의 결론은 “청구권협정으로 개인 청구권이 소멸되지는 않지만 외교보호권은 물론이고 재판상 소권(訴權)도 소멸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재판 이외의 청구권은 남기 때문에 피해자들이 재판이 아닌 방법으로는 가해 기업에 청구를 할 수 있다. 소권은 소멸되지만 재판 이외의 청구권은 남는다는 최고재판소의 결론은 법률가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억지였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최고재판소와 기본적으로는 같은 이론이다. 다만 청구권협정이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한 협정이 아니므로 불법행위가 근거인 위자료 청구권은 남아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는 일본 법률가들에게 새로운 쟁점이다. 1965년 한·일회담에서 일본은 한일병합이 국제법상 합법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 식민지배의 불법성에 대해서는 애매하게 남겨둔 채 청구권협정 등 조약들을 체결했다. 그래서 한국에 전달된 무상 3억달러와 유상 2억달러, 모두 5억달러의 명목이 경협자금이지 배상금이 아니었다. 그런데 일본 언론은 ‘완전하고 최종적인 해결’이었다는 당시 문구는 보도하면서도 대법원이 지적한 식민지배의 불법성은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앞으로 한국 정부는 ICJ의 판단을 받아보는 수밖에 없다. 우선 한·일 두 나라 최고 사법기관은 각각 최종 판단을 내렸다. 이제 이런 사건을 일본 재판소에 제소하면 원고는 한국이고 피고는 일본인데 판단은 일본이 하기 때문에 원고가 백전백패한다. 반대로 한국 법원에 제소하면 원고는 한국이고 피고는 일본, 법원은 한국이기 때문에 피고에게 매우 불리하다. 대법원과 최고재판소 판단 가운데 무엇이 청구권협정에 관한 타당한 해석인지 한 나라 사법기관이 결정할 수 없다. 다음으로 한국 정부는 대법원의 다수의견을 존중해야 한다. 설령 한국 정부가 대법원의 별개 의견이나 반대 의견과 마찬가지로 원고들의 위자료 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범위에 포함됐다고 판단한다 해도 이제는 어쩔 수가 없다. 최고 사법기관이 위자료 청구권은 청구권협정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이상 이를 무시하거나 경시하고 일본과 교섭한다면 비난을 피할 수 없다.
한국 정부로서는 일본 정부와 또 그 뒤에 있는 양식 있는 일본인들에게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만들려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청구권협정의 의미를 확정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정부로서는 대법원의 다수의견을 존중할 정치적 의무가 있다. 따라서 양국이 공평함을 확보할 수 있는 ICJ의 판단을 받아보자는 일본 정부의 제안에 동의한다”고 밝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배훈 일본변호사 재일코리안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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