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직장 노동자는 왜 회사와 싸우나

반기웅 기자 2018. 12. 1.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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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한국마이크로소프트 본사에서 한 직원이 광고판 앞을 지나고 있다. / 연합뉴스

HP코리아(옛 한국HP) 영업사원 ㄱ씨는 올해 1월 29일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다. 해고의 발단은 영업과정에서 제품 판매를 대행하는 파트너사를 상대로 이뤄진 인센티브 계약. HP코리아는 ‘ㄱ씨가 사측이 파트너사에 지급해야 하는 인센티브 금액을 자의적으로 판단해 지급 약속을 했다’는 이유로 인사위원회를 열었고 ㄱ씨를 비롯한 4명에 대해 해고를 의결했다.

해고조치를 받아들일 수 없는 ㄱ씨 등 4명은 지난 3월 서울지방노동위원회(지노위)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냈다. 지노위는 HP코리아의 “해고조치가 부당하다”며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사측은 지노위의 판단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중앙노동위원회(중노위)에 재심을 청구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그러자 사측은 대형 로펌을 고용해 중노위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HP코리아, 한국마이크로소프트, 한국오라클 등 내로라하는 글로벌 IT기업 소속 노동자들이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벌이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소송 사유도 부당해고부터 임금체불, 불법파견 등 다양하다. 글로벌 IT기업이라고 하면 흔히 높은 연봉과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기업문화를 누리는 ‘꿈의 직장’으로 불린다. 꿈의 직장에 다니는 이들은 왜 사측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게 됐을까.

■부당해고부터 불법파견 의혹까지

한국HP의 노사관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건 지난 2015년 회사가 분할되면서부터다. 한국HP는 한국HPE와 HP코리아(HPI)로 나뉘었고 이 과정에서 대규모 구조조정이 시작됐다. 사업구조 개편과 함께 본격적인 인력감축이 진행된 것이다. 2015년부터 희망퇴직을 실시한 한국HPE는 올해 26명을 포함해 최근까지 120명이 넘는 직원을 내보냈다. 전체 직원의 18%가 넘는 수치다.

ㄱ씨를 비롯한 4명의 부당해고 역시 인력감축을 강행하는 사측의 경영방침과 맞물려 있다는 게 노조의 판단이다. 김용환 한국HP 노조위원장은 “일할 수 있는 부서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기존 인력을 내보내고 외부인력을 충원하고 있다”며 “영업직원은 실적 내기 어려운 보직에 배치해서 성과급을 지급하지 않는 방식으로 퇴직을 유도한다”고 말했다.

ㄱ씨 등은 중노위 등에서 “파트너사에 대한 인센티브 지급 문제는 그간 사내 관행이었다”며 자신들에게 책임이 없다고 항변했다. 중노위도 이를 받아들여 “ㄱ씨 등의 행위가 관행인 측면이 인정되고, 회사에 피해를 끼친 부분도 없다”고 판단했다. 사측은 그러나 소송을 통해 일단 법원의 판단을 받아보겠다는 입장이다. 소송이 진행되는 기간 동안 피해를 보는 건 ㄱ씨 등 노동자들이다.

한국 후지쯔를 상대로 해고무효 확인소송을 제기한 노동자 명함.

한국후지쯔의 경우 불법파견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IT개발자 ㄴ씨는 지난 2013년 4월 한국후지쯔 본사에서 채용면접을 치렀다. 한국후지쯔는 ㄴ씨를 채용하기로 했고 ㄴ씨는 곧 한국후지쯔에서 지정한 근무지에서 일을 시작했다. ㄴ씨가 하는 업무에 대한 모든 지시와 근태 관리는 한국후지쯔에서 담당했다. 업무지시는 구두지시를 포함해 SNS와 메일 등 다양한 형태로 이뤄졌다. 한국후지쯔 사명과 로고를 넣은 정식 명함도 ㄴ씨 이름으로 발급됐다. 하지만 정작 ㄴ씨가 근로계약을 맺은 곳은 한국후지쯔가 아닌 하청업체였다. ㄴ씨를 고용한 하청업체는 업무지시는 물론 ㄴ씨와는 아무런 교류도 하지 않았다.

ㄴ씨는 하청업체 소속으로 재계약을 거듭하며 한국후지쯔에서 4년 넘게 일했다. 그러나 한국후지쯔는 지난해 3월 ㄴ씨에게 돌연 ‘재계약 불가’ 통보를 했다. ㄴ씨는 사유를 물었지만 사측은 답하지 않았다. ㄴ씨는 “지노위에 해고가 정당한지 이의를 제기하겠다고 했더니 사측은 오히려 대형 로펌을 거론하며 협박조로 말을 해왔다”고 밝혔다.

결국 ㄴ씨는 회사에서 퇴출됐다. 해고과정에서 협박을 당하면서 우울증도 생겼다. 1년 동안 무직상태로 있던 ㄴ씨는 올해 3월 한국후지쯔를 상대로 ‘해고 무효 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한국후지쯔 관계자는 “ㄴ씨는 한국후지쯔 정규직원보다 높은 급여를 받았다”며 “ㄴ씨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고 시시비비는 법정에서 가릴 것”이라고 말했다.

■임금체불 의혹 휩싸인 한국MS

한국마이크로소프트(이하 한국MS) 노동자들도 수당 지급을 두고 회사를 상대로 소송전을 벌이고 있다. 한국MS 노동자 12명은 지난 4월 회사를 상대로 연장·야간·휴일 근로수당을 달라며 법정수당 지급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수당 지급 갈등의 발단은 한국MS가 제공하는 365일 24시간 장애 해결 서비스다. 고객사의 IT 시스템에 장애가 발생하면 항시 대응을 하는 게 노동자들의 주요 업무 가운데 하나다.

장애 신고가 들어오면 1시간 이내에 고객사와 연락을 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 때문에 사측은 엔지니어 등 노동자들의 순번을 정해 업무시간이 끝난 야간·심야시간대와 휴일에도 비상대기 근무를 지시했다. 해당 업무를 담당하는 노동자들은 한 달에 많게는 일주일 넘는 비상대기 근무를 소화했다. 비상대기 근무 중에는 항상 회사에서 지급한 노트북 등 장비를 챙기고 인터넷이 가능한 장소에 머물러야 했다. 빠른 작업이 이뤄져야 하기 때문에 장거리 이동도 할 수 없었다.

업무강도도 높다. 지난해 해당 노동자들은 비상근무 중 하루 평균 0.79개의 장애를 처리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통상 근무시간 중 업무 처리건수 1.08개와 비교해도 적지 않은 수치다. 야간과 휴일 들어오는 고객사의 장애 신고는 서버다운 등 중대 장애가 대부분인 것을 감안하면 오히려 업무강도가 더 세다는 게 노동자들의 주장이다.

문제는 근로시간과 수당을 셈하는 한국MS의 ‘계산법’에 있다. 그동안 한국MS는 비상대기 근무시간 가운데 노동자들이 실제로 장애 기술지원 업무를 한 시간에 대해서만 근로시간으로 인정해 시간외근무수당을 지급했다. 나머지 대기시간은 평일 1만원, 휴일 3만원으로 책정해 일괄 지급했다. 이 같은 방침에 노동자들은 조합을 결성해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자 한국MS는 올해 2월 비상대기 근무를 중단시켰다. 비상대기 근무 운영의 위법성을 인정한 셈이다.

비상대기 근무 중단과 별개로 노동자들은 그동안 받지 못한 연장·야간·휴일 근로수당을 지급할 것을 요구했다. 금액은 임금채권 소멸시효를 감안한 최소 3년치로 특정했다. 한국MS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거부했고 결국 수당 지급 문제는 법정으로 옮겨졌다. 민주노총 법률원 김세희 변호사는 “근로기준법에서는 사용자의 지휘·감독 아래 있는 대기시간도 근로시간으로 본다”며 “아파트 경비원의 야간 휴게시간도 근로시간으로 인정한 판례가 있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수당 지급 요구는 정당하다”고 말했다.

지난 6월 파업에 참가한 한국오라클 노동조합 조합원들이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 한국오라클 노동조합

■영업직원 성과급 깎은 한국오라클

한국오라클은 3년째 내부 영업직원과 성과급 지급을 두고 민·형사소송을 벌이고 있다. 사측에서 일방적으로 영업직원의 성과급을 적게 지급하면서 생긴 다툼이다. 한국오라클 영업직원 ㄷ씨는 지난 2015년 6월 사측과 ‘개인보상플랜’ 합의서를 썼다. 여기에는 성과급 지급률을 비롯한 실적에 따라 받을 수 있는 성과급 수준과 관련한 내용이 담겼다.

ㄷ씨 영업매출 실적이 예상보다 잘 나오자 한국오라클은 2016년 4월 ㄷ씨의 영업목표를 2배 넘게 올렸다. ㄷ씨와 합의나 동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일방적인 조치였다. 이후 사측은 재산정한 요건에 맞춰 ㄷ씨의 성과급을 지급했다. 실적에 따라 한 해 수입이 결정되는 ㄷ씨는 큰 타격을 입었다. ㄷ씨는 사측의 영업실적 조정이 성과급을 지급하지 않기 위한 의도적인 행위라고 판단해 2016년 6월 고용노동부 서울 강남 고용노동지청에 한국오라클 대표이사와 호주 국적의 오라클 아시아·태평양지역(APAC) 애플리케이션사업 담당 부사장을 고소했다.

ㄷ씨의 고소와 관련해 검찰 지휘를 받아 수사를 진행한 노동부 강남지청은 해당 사건을 지난해 2월 불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한국오라클의 대표이사가 ㄷ씨의 임금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지에 대한 소명이 부족하다는 게 이유였다. ㄷ씨가 고소한 APAC 애플리케이션 담당 부사장에 대해서 노동부는 “호주인이기 때문에 국내법 적용을 할 수 없어 불기소 의견을 냈다”고 밝혔다.

사건은 검찰로 송치됐지만 검찰은 여전히 ‘보강수사’를 이유로 결론을 내지 않고 있다. 그 사이 한국오라클은 ㄷ씨를 업무에서 제외시켰다. ㄷ씨는 아무 일 없이 사무실 자리를 지키는 ‘유령’ 신세가 됐다. ㄷ씨는 “검찰에서 불기소든 기소든 결과를 줘야 할텐데 3년째 사건을 쥐고 있다”며 “항고도 못하고 그냥 결과를 기다리는 신세”라고 말했다. 결국 ㄷ씨는 지난해 6월 한국오라클을 상대로 체불임금을 지급하라는 내용의 민사소송을 추가로 제기했다. 한국오라클은 “해당 사안은 소송 중이기 때문에 답변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내왔다.

한국에 자리잡은 글로벌 기업들이 부당해고를 비롯한 구조조정, 성과급 축소 문제가 발생하는 데에는 최근 IT산업 구도의 급격한 변화와 관련이 있다. IT산업이 클라우드 중심으로 바뀌면서 서버를 팔거나 소프트웨어를 단순 판매하던 방식으로는 예전과 같은 수익을 기대할 수 없는 형편이다. 이 때문에 글로벌 기업들은 구조조정과 성과급 삭감 등으로 국내 지사의 비용을 최소화하고 본사 매출과 이익을 올리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국내 고용안전성과 노동자에 대한 처우는 하락하는 한편, 영업압박은 더 강해지고 있다. 류한석 기술문화연구소장은 “클라우드 시대에 대비하지 못한 외국계 IT기업들이 구조조정을 통해 비용을 줄이고 있다”며 “본사의 후한 보상정책은 버리고 쉽게 사람을 자르는 나쁜 방침만 들여왔다”고 말했다.

글로벌 IT기업 가운데 유한회사인 한국MS와 한국오라클, 한국HP는 주식회사와 달리 기업정보 공개의무가 없고 외부 감사를 받지 않는다. 이 때문에 국내에서 상당한 규모의 매출을 올리면서도 실적과 배당금 등 경영·회계정보를 공개하지 않는다. 해당 기업들은 ‘사정이 좋지 않아 대규모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면서도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노동자들은 강제 구조조정을 당하며서도 영문조차 알 수 없다. 깜깜이 인력감축을 비롯해 수익은 극대화하고 책임은 최소화하는 행태가 글로벌 IT기업에서 반복되는 이유다. ‘주식회사 등의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 개정으로 내년부터는 유한회사도 외부감사를 받고 회계정보를 공개하도록 했지만 여전히 법망을 피해갈 소지가 많다. 조형수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장은 “일부 글로벌 IT기업의 경우 허술한 법 규정을 악용한다”며 “미국이나 프랑스에서는 하지 못하는 일을 한국에서는 쉽게 벌인다”고 말했다.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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