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신 철거민 유서 "추운 겨울 3일간 길에서..내일이 두렵다"

김찬호 기자 2018. 12. 5.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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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어머니 “꿈 많던 아이…5만원 주며 찜질방에 가라 했는데”
ㆍ철거민 단체 “사람 잡은 불법 강제집행, 용산참사 떠올려”

“내 아들 살려내라” 5일 서울 마포구청 앞에서 개최된 빈민해방실천연대 기자회견에서 아현동 재건축지역에서 강제철거당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세입자의 어머니가 울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국가가 아현동 철거민을 죽였다. 살인개발 중단하라.”

강제집행 뒤 집을 잃고 거리를 전전하다 한강에 투신해 숨진 채 발견된 철거민 박준경씨(37)의 죽음을 두고 정부를 규탄하는 집회가 열렸다. 빈민해방실천연대, 용산참사 진상규명위원회 등 단체는 5일 서울 마포구청에서 집회를 열어 개발과 관리 감독 문제를 제기했다.

이들 단체는 고인에 대한 묵념으로 이날 집회를 시작했다. 이어 박씨 유서를 공개했다. 유서엔 “저는 마포구 아현동에 월세로 어머니와 살고 있었는데 3번의 강제집행으로 모두 뺏기고 쫓겨나 이 가방 하나가 전부입니다. 한겨울에 씻지도 먹지도 자지도 못하며 갈 곳도 없습니다. 3일간 추운 겨울을 길에서 보냈고 내일이 오는 것이 두려워 자살을 선택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단체에 따르면 박씨는 지난 8~9월 진행된 두 차례의 강제집행으로 살던 집이 철거됐다. 이후 박씨는 함께 살던 어머니와 떨어져 3개월 동안 개발지구 내 빈집을 전전하며 노숙인 생활을 했다. 지난달 30일 진행된 강제집행으로 임시로 머물고 있던 빈집에서도 쫓겨난 박씨는 사흘 동안 거리에서 노숙하다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지난 3일 한강에 투신한 박씨는 하루 뒤인 4일 오전 11시25분쯤 한강 양화대교와 성산대교 사이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박씨의 어머니도 집회에 나왔다. 박씨 어머니는 “착하고 꿈도 많은 아들이었는데 내가 형편이 안돼 가게를 하겠다는 꿈을 들어주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마지막 철거가 있던 11월30일에도 아들에게 5만원을 주며 추우니까 찜질방에 가 있으라고 당부했는데 다른 데를 가서 3일 동안 엄마 걱정만 하다 죽은 것 같다”고 말했다.

박씨는 유서에서 “저는 이대로 죽더라도 어머니가 걱정이다. 저희 어머니께는 임대 아파트를 드려 저와 같이 되지 않도록 해달라”는 당부를 담았다. 박씨 어머니는 “임대 아파트도 필요 없다. 서른살부터 혼자 키운 내 힘이었고 꿈이었던 아들만 살려달라”며 흐느꼈다.

이들 단체는 아현동 철거민에 대한 강제집행이 불법적으로 진행됐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지난 10월30일 강제집행은 오후 4시부터 시작됐다. 용역 120여명이 철거민의 집을 순식간에 에워싸고 문을 뜯은 뒤 안으로 진입했고, 집주인이 집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강제로 철거했다고 했다. 11월1일 강제집행 때는 용역이 폭력을 행사했다고 했다. 당일 오후 2시 100명이 넘는 용역들이 옥상을 타고 철거민들 집으로 진입했고 일부 옥상에 남아 있던 용역들은 사람을 향해 소화기를 난사했다고 전했다.

이들 단체는 11월1일의 강제집행은 절차상으로도 문제라고 말한다. 서울시 공문에 따르면 이날 강제집행 시간은 오후 3시30분이었으나 오후 2시 집행이 시작됐고, 이를 관리·감독하는 집행관이 없었다는 것이다. 안전을 책임져야 할 경찰도, 서울시 담당 공무원도, 인권지킴이도 없는 상황에서 불법 집행이 진행됐다고 이들은 말했다.

이들은 “10여년 전 용산 학살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며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변함없이 국가는 철거민들을 죽이고 있다. 용산참사 10주기를 앞둔 지금 살인적인 강제수용, 강제철거로 피해자들이 더 속출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박씨의 죽음에 대해 1차적으로 관리·감독권자인 마포구청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했다. 서울시가 지난 10월29일과 11월2일 두 차례 마포구청에 ‘강제철거 금지를 어긴 조합에 대해서는 철거중지 및 인가취소 등의 행정조치를 취하라’는 공문을 발송했음에도 마포구청이 무시했다는 것이 그 이유다. 이들은 “마포구청이 살인적인 강제철거를 방치하고, 마포경찰서가 폭력적인 불법 강제집행을 수수방관하며 박준경씨를 죽인 것”이라고 말했다.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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