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에 폭발한 그들, 그뒤엔 2000년대 학번 취업좌절

이지영 2018. 12. 7.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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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홍보 메일에 '한남' 단어 논란
남성 독자들 "회원 탈퇴" 이어져
2000년 이후 학번 취업난 심각
남녀 모두 "내가 피해자" 주장
일자리 경쟁이 적대감 부추겨
지난달 3일 서울 태평로 파이낸스센터 앞에서 열린 ‘스쿨 미투’ 행사. 청소년 참가자들이 학교에서 들었던 혐오 발언 등을 적고 있다. [연합뉴스]
인터넷 서점 예스24의 ‘한남’ 파문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발단은 지난 2일 예스24가 웹진 ‘채널예스’ 회원들에게 ‘어쩌면 그렇게 한(국)남(자)스럽니’라는 제목으로 보낸 e메일이었다.

신간 『한국, 남자』의 저자인 사회학자 최태섭씨 인터뷰 기사를 소개하면서, 기사 첫 문장 “‘어쩌면 그렇게 한(국)남(자)스럽니?’라는 말 앞에서 태연할 수 있는 한국남자는 몇이나 될까”에서 메일 제목을 딴 것이다. ‘한남’은 한국 남성을 비하해 일컫는 속어다. 메일을 받아 본 남성 독자들은 발끈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 회원 탈퇴 인증샷 등을 올리며 탈퇴 운동에 들어갔다. 3일 예스24는 공식 사과문을 발표하며 사태 수습에 나섰지만 탈퇴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다. 불똥은 엉뚱한 곳으로도 튀었다. 3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한남들 주목”이라며 『한국, 남자』 소개 글을 올렸던 커피 브랜드 ‘커피 리브레’ 서필훈 대표도 비난 댓글이 줄을 잇자 5일 사과글을 게재했다.

우리 사회에서 젠더 이슈는 언제 폭발할지 모를 폭탄 같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수역 폭행사건, 불법 몰카, 미투 폭로 등의 사회문제가 모두 ‘여혐’ ‘남혐’의 프레임 속으로 들어가 소모적인 성 대결로 확산되는 형국이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

문화인류학자인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는 “‘스펙 세대’의 좌절과 불안 때문”이라며 “남녀 모두 ‘내가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증오·혐오를 생산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가 말하는 ‘스펙 세대’는 IMF 외환위기 당시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다 2000년대 이후 대학에 들어간 20대 중반~30대 중반의 청년층이다. 이들은 진학과 취업 등에 대비해 10여 년을 스펙 쌓기에 몰두했지만 정규직 일자리도, 결혼도, 집도 모두 얻지 못했다. 조한 교수는 “자신이 무력하다고 느끼는 상황에서 이성에 대한 공격으로 자기 힘을 확인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특히 ‘결혼 대신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여성에 비해 결혼하지 않으면 온전한 사람 취급을 못 받는 남성들이 어딘가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은 욕구를 더 크게 느낀다”고 말했다.

이번 예스24 파문에서 보듯 혐오 논란이 실력 행사로 이어지는 경우도 잦다. 지난 3월 게임 ‘트리 오브 세이비어’의 원화가가 트위터상으로 여성단체 계정을 팔로우하고, 페미니즘 관련 글을 공유했다는 이유로 남성 게임 유저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페미니즘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출간 2년여 만에 100만 부 넘게 팔리는 등 여성 소비 파워가 큰 문화계에선 ‘여혐’ 논란에 발 빠르게 대응하는 모양새다. 지난해 방탄소년단은 ‘사이퍼 파트 3’의 가사 중 여성 비하 논란이 제기된 ‘남자는 담배, 여자는 바람필 때’를 ‘누구는 담배, 누구는 바람필 때’로 수정해 불렀다.

역사학자인 전우용 한양대 동아시아문화연구소 연구교수는 우리 사회의 젠더 갈등을 두고 “결국은 일자리 문제”라고 했다. “일자리를 둘러싼 치열한 경쟁이 남녀 사이의 적대감을 부추겼다”는 것이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불러 시누이 집 화장실 청소를 시키는 장면을 보여주는 예능 프로그램(MBC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 등 남녀 갈등을 조장하는 문화 콘텐트의 범람 문제도 지적했다. 전 교수는 “이는 실제 성 차별을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들에게 ‘내가 손해를 보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한다”면서 “혐오 범죄로 이어질 우려도 있다”고 짚었다.

전문가들이 말하는 해결책은 기성세대의 각성이다. 조한혜정 교수는 “국가·사회가 청년 세대에게 최소한의 안전망을 제공해야 한다”면서 “시민배당을 청년부터 지급하라”고 제안했다. 또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여성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체화된 기성세대 남성들이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지영 기자 jy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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