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쓸신세] 300년 앙숙 스페인·영국..이번에는 '추로스 전쟁'

황수연 입력 2018. 12. 9. 01:00 수정 2018. 12. 9.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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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개념 추로스 등장?..SNS서 "문화도용" "기괴한 것" 비난
나라 간 자존심 건 원조 경쟁에 프렌치프라이·파블로바·후머스 '수난'
영국과 스페인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흐릅니다. 양국은 오랜 시간 ‘스페인 속 작은 영국’으로 불리는 지브롤터를 두고 신경전을 벌여왔지요. 인구 3만명가량의 작은 항구 도시 지브롤터는 스페인 최남단에 붙어있지만 영국 영토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영국으로 바뀐 지 300여년이 흘렀는데 스페인은 여전히 ‘내 땅을 돌려달라’고 요구하지요. 최근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를 계기로 갈등이 다시 불붙었다가 지브롤터 문제는 향후 두 나라가 직접 협의키로 하면서 일단락됐습니다.
영국 모리슨스가 판매할 예정인 치즈 추로스. [사진 모리슨스]
그런데 또다시 스페인이 영국에 단단히 뿔이 났다고 합니다. 바로 ‘치즈 추로스(churros)’ 때문인데요. 영국 가디언은 “이것은 전쟁을 의미한다. 치즈 추로스가 영국과 스페인의 관계를 파괴할 것”이라고 했고, CNN 역시 “영국과 스페인의 관계가 최악의 수준에 도달했다”고 썼습니다.

대체 어떤 사연인 걸까요. [알고 보면 쓸모 있는 신기한 세계뉴스, 알쓸신세]가 스페인의 속사정과 나라 간 음식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으깬 감자로 만든 영국식 추로스…“모독이다”

“어디서부터 이런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네. 스페인 사람들은 추로스를 디저트로 먹지 않는다. 시큼하지도 않다. ‘완전한 모독’이다. ”

한 스페인 출신 여성 번역가가 최근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글입니다. 분노가 전해지나요? 첨부한 사진에는 먹음직스러운 추로스가 놓여 있는데요. 영국 4대 수퍼마켓 체인인 모리슨스가 크리스마스를 맞아 선보인 3.5파운드(약 5000원)짜리 치즈 추로스입니다.

주문을 받아 20일부터 팔 예정인데 스페인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벌써 수난을 겪고 있지요.
크리스마스를 맞아 새롭게 출시된 치즈 추로스가 영국 모리슨스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다. [사진 모리슨스]
스페인 출신 매튜 베넷은 트위터에 “모리슨스는 이 ‘기괴한(monstruosidad)’ 걸 추로스라 부른다”고 혹평했고, “지브롤터를 지키되 제발 이것은 하지 말아달라”라고 쓴 이도 있습니다. “문화도용이다”, “피시앤칩스(영국 전통음식)에 메이플 시럽과 숙주를 얹어 반격을 가할 것”이라는 반응도 나왔지요.
반감을 드러내는 밈(meme·인터넷상 재미있는 이미지)은 물론이고, 영국과의 전쟁을 선언하는 이미지도 등장했습니다.
한 트위터 사용자가 영국 모리슨스가 판매할 치즈 추로스에 반발하며 올린 게시물. [사진 트위터 캡처]
현지 매체인 더 로칼의 피오나 고반은 “모리슨스는 감히 완전히 새로운 콘셉트를 고안했다. 나는 이것이 스페인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썼지요. 영국 데일리메일에 따르면 일부 영국인들조차 치즈 추로스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한 사용자가 트위터에 밈을 올려 치즈 추로스에 반감을 드러냈다. [사진 트위터 캡처]

밀가루와 소금, 물, 버터로 만든 반죽을 기계로 길쭉하게 짜낸 뒤 기름에 튀긴 ‘추로’는 스페인의 전통요리로 추로 여러 개를 뜻하는 게 바로 추로스입니다. 스페인에서는 아침에 식사 대용으로 또는 낮 동안 간식으로 먹습니다. 해장할 때도 추로스를 찾을 정도이지요. 초콜릿에 찍거나 걸쭉한 초콜릿 음료와 함께 먹기 때문에 단맛이 강합니다.
모리슨스가 내놓은 추로스는 반죽이 아닌 매쉬 포테이토(으깬 감자)로 만드는데다 안에 치즈가 가득하고 이를 또 토마토소스, 고추 살사(소스)와 곁들여 먹는 게 특징입니다. “우리의 치즈 추로스는 스페인 레시피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면서도 “대신 짭짤한 버전을 원했던 것뿐”이라는 게 모리슨스 측의 주장인데요. “우리 고객들은 대중적인 고전(음식)을 변형했을 때 감동한다”라고도 설명합니다. 하지만 가뜩이나 영국과 해묵은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는 스페인 입장에서 달가울 리 없겠지요.
스페인에서 추로스는 초콜릿과 함께 먹는다. [AP=연합뉴스]
앞서 영국의 셀럽 요리사인 제이미 올리버는 또 다른 스페인의 대표 먹거리인 빠에야(paella) 속에 초리조(스페인 소시지)를 넣었다가 맹비난을 받았습니다. “제이미 올리버가 양국을 거의 전쟁의 위기에 처하게 했다”는 반응까지 나왔지요.
영국 셀럽 요리사 제이미 올리버. 스페인 대표 요리 파에야에 변형을 시도했다 비난을 받았다. [사진 가디언 캡처]


‘후머스’ 전쟁…원조 싸움하다 기네스 기록 경쟁으로

“새로운 전쟁이 레바논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깨뜨렸다. 이번엔 총과 영토라기보다 병아리콩과 파바콩(누에콩)에 관한 것이다.”

실제 전쟁을 벌였던 두 나라가 중동 음식의 대표선수인 후머스(hummus)를 두고 충돌한 걸 두고 2008년 가디언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후머스는 이집트콩인 병아리콩을 으깬 뒤 레몬주스와 소금, 참기름으로 조미하는 것으로 빵에 묻혀 먹는 음식입니다. 소스와 같지요. 이들 지역서 매일 식탁에 오르다시피 하는 우리네 김치 같은 존재랄까요.
이스라엘과 레바논은 후머스(hummus)의 기원을 두고 논쟁을 벌여왔다. [사진 위키피디아]
후머스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두고 양국은 팽팽히 맞섭니다. 2008년 레바논은 이스라엘을 상대로 국제 소송까지 제기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후머스를 마치 자국의 전통음식인 양 마케팅한다”며 EU 법원에 판단을 요구한 것이지요. 레바논 관광 장관이던 파디 압부드는 “이스라엘이 레바논 요리를 ‘훔치고 있다’”며 “수백만 달러를 손해 보고 있다”고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레바논은 다소 엉뚱한 방향으로 전투를 선언합니다. 2009년 10월 ‘대형 후머스 만들기’ 행사를 연 건데요. 세계 최대 크기의 후머스를 만들면 소유권을 널리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 판단했나 봅니다. 당시 2000㎏ 넘는 거대한 후머스가 탄생했고 이전 이스라엘이 세운 기네스 기록이 깨졌지요.

이스라엘이 가만있을 리 없습니다.

3개월 뒤 방송국에서 빌린 대형 위성방송 수신 접시 위에 4000㎏ 넘는 후머스를 만드는 데 성공했지요. 그로부터 넉 달 뒤 레바논이 반격에 나서 또다시 신기록을 세웁니다. 요리사 300여명을 투입해 무려 1만450㎏의 후머스를 만든 건데요. 이후 이스라엘의 대응은 없었고 레바논은 기록을 보존해왔습니다.
레바논이 2010년 1만450 ㎏ 에 달하는 후머스를 만들어 기네스 기록을 세웠다. [사진 CNN]

미련을 못버린 이스라엘은 관광지에서 전 세계인을 상대로 후머스를 ‘이스라엘의 국가 간식’이라 쓴 엽서를 팔기 시작했다고 하지요. 영국 BBC는 “많은 사람에게 후머스가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한 질문은 애국심과 정체성의 문제”라고 전했습니다.

후머스의 기원은 여전히 논란거리입니다. 가디언은 “한 전설에 따르면 후머스는 12세기에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치하던 술탄, 살라딘에 의해 처음 나왔다”고 하는데요. 중세 아랍 음식 전문가인 찰스 페리는 시리아의 수도인 다마스쿠스가 후머스의 기원일 가능성이 크고, 중세 시대 풍부한 레몬 공급지였던 베이루트(레바논의 수도)가 두 번째로 유력한 원산지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전통 디저트 ‘파블로바’도 시끌…프렌치 프라이? 벨지언 프라이?
뉴질랜드와 호주의 국민 디저트 ‘파블로바’. [사진 CNN]

‘오지(호주인)’와 ‘키위(뉴질랜드인)’간 분쟁도 만만치 않습니다. 한국과 일본만큼 가깝고도 먼 두 나라는 머랭(계란 흰자와 설탕을 저어 만든 거품)을 기초로 한 ‘국민 디저트’ 파블로바(pavlova)의 원조가 어디인지를 두고 30년 넘게 논쟁을 벌여왔지요.

2008년 존 키 뉴질랜드 총리가 집권 후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가 호주의 주장을 “완전히 우스운 것”이라고 깎아내리며 동맹국들에 파블로바의 기원을 뉴질랜드로 인정해달라고 촉구하는 것이었습니다.

호주에선 1935년 호텔 주방장 버트 사치스가 러시아의 전설적인 발레리나 안나 파블로바의 호주 방문을 기념해 파블로바를 개발했다고 믿는데요. 호주 국립사전에도 파블로바는 ‘가장 유명한 호주 디저트’로 소개돼 있습니다.

뉴질랜드는 나름의 논리로 반박합니다. 오타고대학의 헬렌 리치는 수 백개의 파블로바 레시피가 담긴 책들을 분석한 결과 호주에서 파블로바가 등장하기 이전 이미 뉴질랜드 서적에서 요리법이 나와 있었다고 주장하지요.
러시아 발레리나 안나 파블로바가 뉴질랜드를 찾았을 당시의 모습. [사진 위키피디아]
2010년 영국 옥스퍼드 사전이 1927년 뉴질랜드에서 최초로 파블로바 레시피가 기록되었다고 밝힌 데 따라 논쟁은 마무리되는 것 같았는데요. 2015년 뉴질랜드의 예술역사가와 호주의 프로덕션 회사 사장이 2년 가까이 수만 권의 요리책과 뉴스를 샅샅이 뒤진 결과 파블로바의 발상지는 의외로 미국과 영국이라는 사실을 밝히면서 새 국면을 맞습니다. “1901~1926년에 파블로바 같은 머랭 케이크는 150가지가 넘었고, 대부분의 요리법은 미국에서 시작됐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었지요.
패스트푸드의 대명사인 프렌치프라이를 두고도 설전이 끊이지 않습니다. 벨기에는 원조를 주장하며 벨지언 프라이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올리려 했는데요.
벨기에에서 파는 프렌치프라이. [EPA=연합뉴스]
20세기 초 벨기에 왈로니아 지역서 물고기를 잡아 튀겨 먹던 어부들이 날이 추워 낚시를 하기 어려워지자 튀긴 감자를 먹었고, 미군이 이를 접한 뒤 불어를 쓰는 왈로니아를 프랑스로 착각해 프렌치프라이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습니다.
미국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 프랑스에서 팔던 감자튀김을 먹은 뒤 프랑스 요리로 소개했다는 얘기도 있지요.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에서 각각 자국 요리라 주장하는 ‘이상‘(또는 ‘유셍‘). [사진 홍콩 SCMP]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는 ‘이상(yee sang)’ 또는 ‘유셍 (yusheng)’이라 불리는 전통음식에 자존심을 걸고 있습니다. 큰 쟁반 같은 접시에 생선(주로 연어)과 야채들을 놓고 소스와 먹는 일종의 샐러드인데요.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믿어 춘절 때 먹는 대표 음식이지요. 물론 싱가포르가 한때 말레이시아에 속했다가 1965년 독립한 만큼 원조 논쟁이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에는 김치 대첩이 있었지요. 1996년 일본은 국제식품규격 표준으로 ‘기무치(kimuchi)’를 등록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지만 국제식품규격위원회(CODEX)가 결국 한국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2013년 유네스코에서는 우리 김장 문화를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올렸지요.

CNN은 “모든 시대, 모든 대륙에서 나라들은 전통음식의 기원을 두고 싸웠다. 외교적 불화로까지 번졌고, 위협이 있었다. 정치적 동맹이 깨지기도 했다”고 전합니다. 음식은 문화와 역사를 품고 있지요. 많은 나라가 음식으로 브랜드 가치를 높입니다. 나라 간 종교전쟁 못잖게 음식전쟁이 치열한 이유일 겁니다.

황수연 기자 ppangsh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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