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년 만의 산안법 전부개정, '아우성 치는 기업들'..'52시간' 재현?

안재용 기자 2018. 12. 12.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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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300 페이스법]⑥여야, '위험의 외주화' 막자 한 목소리, 하도급 안전강화 요구하는 노동계

#나는 산업안전보건법이다.

나는 ‘산업안전보건법’이다. 산업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안전을 책임지고 산업재해를 예방하는 일이 나의 사명이다. 산업안전과 보건에 대한 기준을 정하고 책임소재를 명확하게 하는 일도 맡았다. 산업현장에서 사고가 발생했을 때 누구의 잘못인지를 가리는 일이다.

나는 노동자의 피와 눈물을 먹어야 변한다. 1981년 태어난 나는 1990년 탈바꿈했다. 온도계 공장에서 일하던 미성년 노동자 문송면의 수은 중독, 원진레이온 참사 등이 동인이 됐다.

이번에도 사고가 출발점이 됐고 ‘위험의 외주화’를 막자는 게 명분이다.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 삼성 중공업 크레인 사고 등 하청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위험에 내몰리지 않도록 하겠다는 거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크레인 사고가 발생한지 두달 뒤 “그 어떤 것도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보다 우선될 수 없다”고 말했다. 원청이 파견·비정규직 노동자의 안전을 책임져야 한다는 게 나를 28년만에 바꾸겠다는 이들의 정신이다.

#재해발생 사업장은 모두 멈춰라? 나는 공짜가 아니다

나는 공짜가 아니다. 안전에는 댓가가 필요하다. 28년만에 발의된 개정안에 따르면 고용노동부장관이 중대 재해가 발생한 사업장에 ‘산업재해가 다시 발생할 우려’가 있는 경우 작업중지를 명할 수 있다고 했다. 기업에 대한 가장 강력한 재제다.

기업들은 반발한다. 작업중지가 해당 기업뿐 아니라 산업전체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도 한다. 현대자동차는 완성차 공장과 부품공장의 생산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형태로 자동차를 생산한다.

각 단계별 어느 한 군데에서 생산이 중단되는 경우 자동차 생산 전체가 중단될 수 있다는 얘기다. 현대차처럼 생산과정을 유기적으로 결합시킨 경우가 아니더라도 개별 부품 생산의 중단이 산업 전체에 피해를 입힐 가능성은 존재한다.

한국경영자총연합회(경총)에 따르면 지난해말부터 연초까지 고용부로부터 작업중지 명령을 받은 6개 기업의 경우 사업장당 600억원에서 1200억원의 손해를 본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내 다른 사업장이나 외부 협력사, 원료 납품기업 등에 대한 피해를 고려하면 액수는 더 커질 수 있다.
사망사고로 사업장 전체에 대한 작업중지 명령을 받았던 한 기업은 888억원의 손해를 입고 영업이익의 24.8%가 사라졌다. 작업중지 명령 해제까지는 18일이 소요됐다. 특정구역 전체 작업중지 명령을 받았던 기업도 1100억원의 손해를 봤다. 작업중지가 해제되기 까지는 29일, 약 한달의 기간이 소요됐다.

산업재해가 발생한 사업장이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영업을 계속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노동자의 안전을 위해 필요한 경우에는 조업을 멈추고 안전을 점검하는 일이 당연하다. 그러나 기업들이 예상할 수 있는 명확한 조항을 만들어주는 것 또한 필요하다. 잘못한 사업장을 벌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잘못이 없는 사업장까지 멈추는 것은 과잉제재라는게 기업들의 주장이다.

특히 ‘산업재해가 다시 발생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 ‘산업재해 예방을 위해 불가피한 경우’라는 표현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될 수 있다는게 기업들의 불만이다. 작업중단 여부를 결정하는 고용부 공무원의 힘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 오히려 로비를 잘 하는 대기업은 피해가 적고 그렇지 못한 중견중소기업들은 큰 피해를 입는 역차별이 발생할 수도 있다.

#안전관리 범위, 넓다고 능사는 아니다

정부가 제출한 개정안에는 도급인의 안전보건조치 대상을 생산관련 도급 또는 산업재해가 발생할 수 있는 ‘위험 장소’에서 모든 도급과 모든 작업장소로 확대했다.

원청 사업장에 위치한 식당, 조경, 경비, 통근버스 등 모든 업무에 대해서 안전관리 의무를 부여한 것이다. 한 마디로 원청 사업장에서 일하는 모든 노동자의 안전을 원청 기업이 보장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는 원청의 안전관리 능력이 하청보다 뛰어나다는 인식에 기반한다. 원청의 안전관리 능력이 하청에 비해 뛰어남에도 하청 기업과 노동자에 안전의무를 부과하는 것은 비용절감만을 위한 조치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기업들은 서비스 관련 하청의 경우 하청이 산재 예방 조치를 취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주장한다. 산재발생 위험이 상대적으로 낮고, 안전관리에 대한 전문성 또한 하청에 있는 경우가 많다는 주장이다.

위험장소에 집중돼야 할 안전보건활동이 분산돼 오히려 위험도가 높아질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한정된 자원을 모든 작업장소로 확대하려면 무리가 따른다는 것이다. 투입자원을 늘리면 가능하다는 주장도 있지만 필연적으로 비용과 직결된다. 도급자가 법을 잘 지키고 있는지 감시하기 위한 행정력 또한 한정적이다.
원청이 하청 기업 소속 노동자에게 지시할 수 없도록 한 규정도 문제가 될 수 있다. 노동당국에서는 원청이 하청 노동자에 직접지시를 내리는 경우 불법파견의 징후로 판단한다. 안전보건에 관련된 행위라 하더라도 하청 기업 소속 노동자에게 지시하기가 어렵다.

원청에게 모든 관계수급인 노동자에 대한 산재 예방조치 의무를 부과한다는 것도 과도하다는 지적이다. 관계수급인이란 1차 하청에게 다시 재하청을 받아 업무를 수행하는 기업을 말한다.

한 반도체 사업장의 경우 1차 하청이 129개 업체에 달한다. 모든 관계수급인으로 이를 확대하면 원청은 약 5600개의 업체 노동자에게 산재 예방조치를 취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게 기업들의 주장이다. 많은 비용이 들 뿐더러, 안전관리가 오히려 악화될 수 있다.

#물질안전보건자료 제출, 영업비밀 유출로 이어질수도

안전을 위해 물질안전보건자료(MSDS)를 제출·공개하도록 한 규정도 불만이 많다. MSDS 제출의무 신설은 노동자가 화학물질 정보를 취득하는데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영업비밀 노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현행법에서도 고용부가 노동자의 안전을 유지하기 위해 인정하는 경우 화학물질 제조자 또는 취급사업주에게 MSDS 제출을 명할 수 있다.

고용부가 유해한 화학물질을 사업장에서 사용하는 것에 대한 감시인 역할을 하겠다는 취지지만 현행법으로도 화학물질 제출이 가능하다는게 기업들의 주장이다. 모든 화학물질을 제출하도록 강제돼 기업의 부담만 늘어난다는 설명이다.

이미 화학물질관리법과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 제·개정으로 화학물질에 대한 규제가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있는 상황이라는 주장도 있다.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통과되는 경우 비슷한 화학물질 정보를 고용부와 환경부에 중복제출해야 하는 불편함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미국과 유럽 등에서도 의료인과 소방서가 치료목적이나 화학사고 대응을 위해 MSDS를 제출받고 있으나 고용부에 제출하지는 않는다.

영업비밀 누출 우려는 또 다른 문제다. 한 가지 목적으로만 사용되는 화학물질의 경우 수입·제조 정보가 흘러나가도 기업의 경쟁력을 하락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다. 특히 일반인 전체를 대상으로 MSDS가 공개되는 경우는 문제가 심각할 수 있다.

자동차 배터리용 전해액 첨가제로만 사용되는 한 화학물질은 배터리의 수명을 길게하는 효과가 있다. 이는 특정 기업의 노하우다. 해당 기업이 그 화학물질을 수입·제조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경쟁사들에게 해당 정보가 유출될 수 있
다. 사용하는 화학 제품명이 공개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예정된 시한폭탄, 경제냐 안전이냐

나를 둘러싼 국회의 논의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지난달 1일 국회에 제출된 내 법안은 아직 담당 상임위인 환경노동위원회에서 다뤄지지 않았다. 지난 2월 ‘산업안전보건법 전부개정안’이 입법예고된 후 정치권은 환영의 뜻을 밝혔다. 산재를 예방하고 원청의 책임을 강화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올 수 있다는 주장이다.

심상정 정의당 의원은 “위험한 작업은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맡기고 사고나면 노동자와 하청업체가 알아서 수습하도록 하는 관행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원청의 실질적 지시 하에 발생한 산재는 원청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당시 국회 환노위원장)도 지난 3월 “위험의 외주화에 대한 합리적 해법을 국회가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성태 전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도 해당 토론회에서 “‘위험의 외주화’와 ‘안전의 양극화’를 외면한 채 비정규직의 희생을 강요하는 국가의 경제정책을 종식시켜야 한다”며 “다양한 형태의 간접고용 확산으로 균형일터의 산업안전 차별이 심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위험의 외주화’는 안 된다는게 그들의 공통된 입장이다.

그러나 국회가 논의를 시작하면 논쟁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원청의 책임을 강화할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비용 문제가 먼저 걸린다. 투자 위축을 초래할 수 있다는 기업들의 반발, 개정안 수준으로도 부족하다는 노동계의 재반발 등이 예고돼 있다. 실제 노동계는 원안에서 제시됐던 하한형(최소한의 형벌을 규정한 것)이 빠졌다는 이유로 후퇴했다고 지적했다.
주52시간 근로시간 단축과 이를 보완하기 위한 탄력근로제 확대가 산업안전보건법 전부개정 국면에서 반복될 가능성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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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용 기자 poong@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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