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은 구석기시대에 시작되었다

2018. 12. 14.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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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생각] 강인욱의 테라 인코그니타
②구석기시대 문명

문명은 갑작스러운 발명품이 아니다. 후기 구석기시대 현생인류가 등장하면서 천천히 걸어온 과정에서 발달한 것이다. 마치 겨울에 뿌린 씨앗이 봄여름에 꽃을 피우듯 후기 구석기시대부터 일구어낸 인간의 진화가 이어진 것이다.
터키 남부에서 발견된 1만5000년 전에 만들어진 대형 신전 괴베클리 유적. 사냥과 채집을 하며 떠돌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조상을 기념하고 장례를 지내기 위해 정기적으로 모여서 거대한 제사터를 만든 것이다. 출처 위키피디아

구석기시대라고 하면 보통 우리는 미개한 원시인이 돌을 깨 돌칼이나 돌망치를 만드는 모습을 떠올린다. 문명은 토기를 사용하며 마을을 일군 신석기시대부터 시작해, 5000년 전 거대한 신전과 도시를 세우고 글자를 사용한 4대 문명에서 꽃을 피운 걸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최근 이런 선입견을 깨부수는 여러 후기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견되고 있다. 터키 남부에서 발견된 대형 신전인 1만5000년 전에 만들어진 괴베클리 유적과 동아시아에서 2만년 전에 발견된 토기가 그 좋은 증거이다. 구석기시대에서 나왔다고는 선뜻 믿기 어려운 유적이 계속 발견되면서 이제 고대 문명의 기원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있다.

극적인 변화를 유도한 대표적인 유적은 1994년부터 지난 20여년간 조사된 괴베클리 유적이다. 이 유적은 인공적으로 쌓은 높이 15m에 너비 300m 정도의 넓은 언덕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고학자들이 이 유적을 발굴해보니 200여개 돌기둥과 돌담으로 만든 원형 제단을 발견했다. 돌기둥 각각은 고도의 석조기술을 사용하여 티(T)자형으로 세심하게 조각하여서 세운 것이었다. 돌기둥 하나가 보통 10톤 정도이며 큰 것은 50톤이 넘는다. 겉에는 황소, 여우, 새 등이 새겨졌는데, 아주 사실적이어서 유라시아 초원 일대에서 3000년 전에 유행한 동물장식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괴베클리 유적은 수십 차례에 걸쳐서 연대측정을 한 결과 1만3000년~1만년에 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현재 전체의 5% 정도만 조사되었으니 대체로 구석기시대 후기인 1만5000년 전부터 이미 사용했다고 보아도 틀림없을 것이다. 당시는 금속도 몰랐고 바퀴 같은 운송수단은커녕 제대로 된 마을도 없었던 시절이다. 사냥과 채집을 하며 떠돌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조상을 기념하고 장례를 지내기 위해 정기적으로 모여서 거대한 제사터를 만든 것이다. 상식을 깬 발견을 두고 고고학자들은 회의적인 시각을 쉽게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괴베클리에 대한 국제적인 공동연구로 다양한 인물 조각상과 해골들이 발견되었고, 그 연대도 확인됐다. 명실상부한 인류 최초의 구석기시대 신전이라는 점을 인정받아 2018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괴베클리 유적의 돌기둥 각각은 고도의 석조기술을 사용하여 티(T)자형으로 세심하게 조각하여서 세운 것이었다. 돌기둥 하나가 보통 10톤 정도이며 큰 것은 50톤이 넘는다. 겉에는 황소, 여우, 새 등이 새겨졌는데, 아주 사실적이어서 유라시아 초원 일대에서 3000년 전에 유행한 동물장식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출처 위키피디아

유라시아의 서쪽에서 괴베클리가 나올 때 동아시아에서는 세계에서 최초로 토기를 사용했다. 토기는 빙하기가 끝나고 신석기시대가 시작되면서 사용한다고 보는 것이 상식이었다. 하지만 동아시아에서는 토기가 1960년대 일본 열도를 필두로 1990년대 러시아 극동지역, 2000년대 중국 송화강 중류에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에 고고학자들의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토기는 신석기시대가 되어야 등장한다는 것이 고고학계의 상식이었다. 심지어 토기가 발견된 곳은 세계 문명사에서 변방으로 꼽히던 동아시아지역이었다. 러시아에서 구석기시대의 토기를 처음 보고한 메드베데프 교수는 1980년대 하바롭스크 근처의 구석기시대 유적인 가샤를 발굴할 때 구석기 유적과 함께 자꾸 토기가 출토되어서 고민했다고 한다. 고민 끝에 그 결과를 발표하자 바이칼 일대에서 발굴을 한 다른 고고학자도 구석기시대 발굴을 하다 토기를 발견했는데, 본인이 실수를 한 줄 알고 발표를 하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이후 1990년대 러시아가 개방되어 그 연구가 알려졌고, 급기야 2012년에는 중국 셴런퉁 유적에서 2만년 전 토기가 발견되었다는 연구가 <사이언스>에 실렸다. 이제 후기 구석기시대 토기는 상식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구석기시대의 지층에서 토기가 발견된 확실한 사례는 아직 없다. 다만, 제주도 고산리에서 비슷한 형태의 토기가 출토된 바가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발견될 것으로 기대한다.

중국 셴런퉁 유적에서 발견된 2만년 전 토기. 강인욱 제공

공동체로 빙하기 극복한 구석기인

도대체 빙하기가 끝나지도 않은 구석기시대에 이런 문명의 여러 요소가 발달한 배경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그 답은 바로 3만년 전에 번성했던 현생인류에 있다. 3만년을 기점으로 그 전에 번성했던 네안데르탈인은 멸종했고 현생인류는 살아남았다. 네안데르탈인이 특별히 미개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네안데르탈인의 뇌 용적은 현대인과 큰 차이가 없고 신체 구조도 비슷해서 현대인의 옷을 입히면 큰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 다만 현생인류는 인간들끼리 서로 접촉하고 소통하는 다양한 시도를 하여 사회적인 진화를 이룩했다는 차이가 있었다. 공동체를 이루어서 다양한 정보를 교환하고 협력하여 위기를 극복했던 것이다.

옥스퍼드대학의 로버트 던바 교수는 후기 구석기시대에 현생인류가 생존할 수 있었던 비결로 노래와 춤, 신화(스토리텔링), 종교(샤머니즘)를 꼽았다. 괴베클리 신전은 각지에 흩어져 살던 수렵민들이 한데 모여서 조상을 기억하는 신전을 만들고 축제를 벌이며 공동체를 강화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괴베클리의 돌 하나를 세우기 위해서는 최소한 500여명이 필요하다고 한다. 실제 근친혼의 위험이 없이 공동체가 유지되려면 적어도 500여명의 사람이 한 집단을 이루어야 한다는 연구와도 일치한다. 이외에도 2~3만년 전 프랑스 알타미라와 라스코 동굴벽화, 5천개의 장식이 발견된 러시아 순기리 무덤 유적 등은 구석기 사람들의 종교 및 축제 문화가 얼마나 높은 수준이었는지 보여주는 증거다. 1만5000년 전 빙하기가 끝나가며 기후가 급변할 때에 사람들은 더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고 주변 사람들과 네트워크를 만들어서 빠르게 환경에 대처했다. 반면, 변화에 뒤처지고 소통하지 못했던 네안데르탈인은 멸종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었다.

동아시아 구석기시대의 토기도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단합을 한 증거이다. 다른 어떤 그릇보다 토기는 조리에 유리하다. 사람들은 같이 모여서 불을 사용하여 토기로 음식을 만들어 잔치하며 공동체 의식을 강화했다. 메드베데프 교수가 발굴한 토기가 발견된 가샤 유적 바로 앞에는 사카치-알리안이라는 암각화가 있다. 이 암각화엔 다양한 샤먼(주술사)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런 동아시아의 샤머니즘 종교와 문화는 1만5000년을 전후해 베링해를 거쳐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해간 현생인류와 함께 건너갔다. 사실, 1950년대 이래로 중국과 신대륙 마야문명의 종교와 문화에서 많은 유사성이 보인다고 지적됐는데, 그 유사성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샤먼(주술사)이 새겨진 사카치-알리안 암각화. 사진 강인욱

4대 문명론은 제국주의의 발명품이다

완전히 빙하기가 끝난 1만년을 기점으로 현재와 같은 따뜻한 날씨가 되면서 사람들은 마을을 만들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초기 농사는 우리 생각과 달리 위험한 모험이었다. 초기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체구도 훨씬 작아졌고, 영양 상태도 불량했다. 식량 대부분을 일부 곡식에만 의존했고 흉년에 쉽게 대처할 정도의 농사기술도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때까지 각자 떠돌며 살던 사람들이 모여서 살게 되었으니 전에 없었던 갈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조선 시대 사람들이 아파트에 모여 사는 셈이었다. 이런 어려움을 소통과 공동체 의식으로 극복해나갔다. 괴베클리 이후인 지금으로부터 약 9500년 전 터키 아나톨리아 고원에 형성된 인류 최초의 마을 차탈회위크가 그 상황을 보여준다. 서로 밀집해 집을 만들어 살았던 차탈회위크 사람들은 집 안에서 제사를 지내고 벽화를 그려서 자신들의 신화를 보존했다. 이렇게 사람들은 자신의 조상을 기억하고 공동체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9500년 전 터키 아나톨리아 고원에 형성된 인류 최초의 마을 차탈회위크 유적. 서로 밀집해 집을 만들어 살았던 차탈회위크 사람들은 집 안에서 제사를 지내고 벽화를 그려서 자신들의 신화를 보존했다. 이렇게 사람들은 자신의 조상을 기억하고 공동체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사진 강인욱

문명은 갑작스러운 발명품이 아니다. 후기 구석기시대 현생인류가 등장하면서 천천히 걸어온 과정에서 발달한 것이다. 마치 겨울에 뿌린 씨앗이 봄여름에 꽃을 피우듯 후기 구석기시대부터 일구어낸 인간의 진화가 이어진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여전히 4대 문명만을 기억하고 있을까. 사실 4대 문명론은 20세기 초반 제국주의가 전 세계를 활보할 때 만들어진 것이다. 4대 문명으로 유명한 지역들은 공통적으로 서구 열강들이 자기 앞마당처럼 마음대로 조사하던 지역이었다. 문명은 극히 일부 지역에서만 발달했고, 나머지 지역은 여전히 미개하게 살았다는 생각은 사실 일부 발달한 선진국이 다른 후진국을 침략하여 식민지화한다는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최근 다양한 연구로 고대 문명은 구석기시대를 거쳐서 빙하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 현생인류 공동의 자산이라는 점이 밝혀지고 있다. 그동안 변방으로만 치부되었던 세계 곳곳에서 인류 문명사를 새롭게 쓸 자료들이 우리를 기다린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다.

강인욱 경희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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