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미투 할머니학교 "말 못하고 살았던 시간, 되풀이 말아야죠"

2018. 12. 15.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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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
할머니학교 이야기

드로잉, 인문학, 문화연구 등
1년 동안 다양한 수업들 진행

'미투 운동' 주제로 한 수업에서
"여자도 문제있다"던 할머니들
"초등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회사에서 상사가 내 손을.."
자신들의 경험 되살려내며
공감하고 이해하기 시작해
지난달 30일 할머니학교 마지막 수업에 참여했던 오전반 학생들이 2학기 드레스코드인 갈색으로 옷을 맞춰 입고 사진을 찍었다. 사진 속 ‘미투 할머니학교’는 지난 4월 미투 수업 당시 할머니 학생들이 교실 창문에 테이프로 붙인 글자들이다. 글 신지민 기자 godjimin@hani.co.kr,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할머니학교에서는 일흔에 가까운 할머니들이 미투에 대해 이야기하고, 문화 연구를 하고, 연구 내용을 작품으로 만든다. 기자가 말을 걸자 손을 덥석 잡으며 자신의 인생사를 들려주는 모습은 우리네 할머니들과 같지만 이 낯선 학교에서만큼은 그냥 할머니가 아니다. 학생들과의 개별 인터뷰, 지난달 30일 마지막 수업과 지난 10일 수료식 취재, 수업 녹취록과 학생들의 글과 그림 등을 통해 지난 1년 할머니들의 시간을 재구성했다.

“미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해볼까요?”

2018년 4월6일, 서울 금천구 독산동에 있는 서울시 평생교육센터 ‘모두의학교’ 2층 강의실. 강의를 맡은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가 물었다. 이날 그의 특강에 모인 ‘학생들’은 18학번 학생들과 지난해 수료 뒤 청강하러 온 17학번 선배들이었다. 학생들은 연보라색 점퍼, 보라색 목도리, 진한 보라색 셔츠 등 다양한 보라색 옷을 입고 있었다. 보랏빛은 이 학교의 1학기 드레스 코드였다. 2018년 3월8일 세계 여성의 날 기념행사에 보라색 옷을 입고 참석한 전세계 여성들을 지지하고 연대한다는 뜻에서 보라색을 택했다. 학생들은 실명이 아닌 스스로 정한 닉네임으로 서로를 불렀다.

조한 교수가 ‘미투’ 현상에 대해 설명하자, 학생들이 가장 먼저 보인 반응은 여성들의 옷차림에 대한 지적이었다. 한 학생이 말했다.

“요즘 여성들이 너무 선정적으로 옷을 입는 것 같아요. 문제는 여자에게도 있다고 봅니다.”

다른 학생이 맞장구를 쳤다.

“여성의 옷차림 때문에 일어나는 사건들도 많아요.”

그 학생들이 펜을 들고 보라색 종이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직접 겪은 일들을 문장으로 소환해내면서 그들이 풀어내는 언어의 결들도 조금씩 변화했다. 지난 수십년 동안 잊고 있던 기억들이 떠오른 것이다. 닉네임 ‘동백’은 50년 세월 아래 깔려 있던 ‘그날’을 되살렸다.

“초등학교 다닐 때 복장 검사를 하는데 남자 선생이 윗도리 속을 들춰 보는 거예요. 지금 생각하니 참…. 나이도 젊은 선생이었어요. 스물여섯이었으니까. 손녀가 있는데 그 아이가 앞으로 살아갈 세상이 걱정돼요.”

‘긍순이’도 기억해냈다.

“젊었을 때 한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상사가 물을 갖다 달래요. 갖다 줬더니 먹여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내 손을 잡았어요.”

‘민들레’는 “내 친구는 자신의 아들 친구에게 당했다”며 치를 떨었다.

이 학교의 18학번 학생들은 스무살 청년이 아니다. 최연소자가 64살에 최연장자는 75살인 할머니들이다. 이 학교의 이름은 ‘할머니학교’다. 할머니학교는 지난해 금천구청이 ‘여성의 시선으로 지역사회의 문제를 고민하고 할머니의 인생 경험을 다른 세대들과 나눈다’는 취지에서 설립했다. 수강 대상은 구에 거주하는 만 64살 이상 여성 노인이다. 이 학교에서 그들은 누군가의 아내도, 엄마도, 할머니도 아닌 한 학생, 한 여성, 한 인간으로 배우고 공부했다. 지난 10일, 올해 3월 입학한 2기의 수료식이 있었다.

지난 4월 ‘할머니학교’ 학생들은 미투 현상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보라색 종이에 적은 뒤 빨랫줄에 걸어 전시했다. 할머니학교 제공
할머니학교 학생 ‘로사’의 미투. 할머니학교 제공
할머니학교 학생 ‘동백’의 미투. 할머니학교 제공
할머니학교 학생 ‘긍순이’의 미투. 할머니학교 제공

할머니도 알아야 하는 미투

미투 운동이 절정이었던 지난 4월 조한혜정 교수는 ‘미투 운동, 그건 뭐’라는 주제로 3주간 수업을 진행했다. 할머니 학생들의 손주들이 살아갈 세상이 과연 좋아지고 있는지를 놓고 이야기가 오갔다. 조한 교수와 함께 수업을 기획한 최소연 교장은 학생들에게 평소 생각해보지 못한 질문을 던졌다.

“미투에 대한 나의 생각 혹은 마음은?”

“손주 세대에 대한 나의 무기는?”

곧 칠순에 접어들거나 이미 칠순이 훌쩍 넘은 학생들에게 ‘미투 운동’은 생소하고 낯선 단어였다. 최소연 교장과 조한 교수는 할머니들도 시대적 흐름을 알고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알아야 할머니들의 대부분 삶을 규정해온 가부장제의 문제점을 인식할 수 있고 자식과 손주 세대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학생들이 미투 운동에 공감하진 않았다. “남자들에겐 동물적 기질이 있기 때문에 오해할 만한 옷차림과 행동을 한 여자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시각으로 미투를 바라봤다. 하지만 3주간 수업이 이어지고 미투를 자신들의 경험과 연관지어 생각하면서 달라졌다. 왜 “나도 고발한다”(=미투)는 울부짖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대나무’가 말했다. “미투는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엄마들이 가정에서 아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기독교에서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라고 가르치면서 여자는 남자를 존중하라고 가르쳐요. 성당에서 여자에게 미사포 쓰라고 하는 것도 강요일 수 있지 않나 싶어요. 남녀 차별 같아요. 유교도 남성 중심의 문화고요.”

‘햇님’은 고등학생 때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버스에서 한 남자가 제 다리를 만졌어요. 벌떡 일어나 앞으로 나갔어요. 여성들이 싫다고 분명하게 말해야 해요. 얼른 자리를 박차고 나가야 합니다.”

“미투는 장기적으로 보고, 유치원 때부터 교육이 됐으면 합니다.”(오목이)

자유로운 토론이 오가는 가운데 ‘감꼭지’가 노트를 펼치며 자신이 적어온 내용을 소리내어 읽었다.

“미투는 서지현 검사의 용기에서 시작됐습니다. (고은 시인의 성추행을 폭로한) 최영미 시인의 ‘괴물’이란 시의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할머니학교 학생 ‘꼬마’가 ‘시집살이’를 주제로 그린 판화. 할머니학교 제공
할머니학교 학생 ‘꼬마’가 ‘시집살이’를 주제로 그린 판화. 할머니학교 제공

‘할머니의 문화유산’ 주제로

각자 연구해 보고서·판화 만들어

자신과 이웃의 시집살이 연구

상처 치유하고 보듬는 과정

아내, 엄마, 며느리로 산 세월

이젠 ‘작가’ ‘화가’ ‘연구원’

“인생에 처음 월수금 생겨

…남은 인생은 나로 살고 싶어”

“시집살이, 도대체 왜 이러세요”

‘꼬마’라는 닉네임을 가진 박혜순은 1951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노량진초등학교, 숙명여자중·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서울간호학교에 입학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꿈을 포기했다. 1976년에 교사인 남편과 결혼했다. 그때부터 시집살이가 시작됐다.

“1976년 11월26일, 신혼여행에서 예정보다 하루 늦게 돌아왔어요. 그랬더니 시어머니가 울면서 화를 냈어요. 어디 좋은 데 갔다 온 것도 아니었는데도요. 어머님 남동생 집 근처로 신혼여행을 가서 조카들까지 데리고 다녀야 했어요.”

시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박혜순은 그의 요구대로 두달 동안 한복을 입고 다녔다. 고개를 들면 시어머니가 화를 내 고개를 숙인 채로 다녔다. 시어머니는 가마솥에 김이 서리면 솥이 반질반질해질 때까지 닦도록 시켰다. 남편 월급 17만원을 시어머니에게 모두 드리고 나면 박혜순의 손엔 1000원만 남았다. 그는 그중 200원을 목욕탕비로 썼지만 시어머니는 그조차 못 하게 했다. 박혜순은 도저히 이렇게는 못 살겠다 싶어 친정으로 돌아가려고 옷을 입었지만 임신으로 배가 불러 옷이 맞지 않았다. 결국 그는 떠나지 못했다.

큰아들 출산 4개월 뒤 시어머니가 태몽을 꿨다며 조산소에 가자고 했다. 조산원이 검진을 해보더니 임신이라며 “내일 오라”고 했다. 다음 날 가보니 조산원이 “잘됐다, 끝났다”고 했다. 무슨 말인가 했더니 시어머니가 아이 떼는 약을 넣어달라고 했던 것이다. 시어머니는 출산 4개월 만에 또 아이를 가지면 분가를 한다고 할까봐 겁이 났다고 했다. 그래서 뱃속에 아이를 가진 며느리 몰래 아이를 지워버리기로 작정했다. 박혜순은 친정어머니에게 이야기하며 울었다. 친정어머니는 아이를 지웠으니 몸조리가 중요하다고 했지만, 시어머니는 모른 척하고 집안일을 시켰다.

분가해 시어머니와는 따로 살게 된 뒤에도 시어머니는 수시로 호출했고 밥을 하라고 했다. 박혜순은 그렇게 30년을 살았다. 그는 지금도 생각하면 울컥울컥한다고 했다. 그는 할머니학교의 수업 중 하나인 ‘문화기획’에서 자신이 진행할 연구의 주제를 ‘시집살이’로 정했다.

지난 9월부터 석달 동안 할머니학교 학생들은 모두 ‘연구원’으로 살았다. 문화기획 수업은 ‘할머니의 문화유산’이라는 큰 주제 아래 할머니들 스스로 주제를 잡아 한 학기 동안 ‘연구’를 진행하도록 했다. “처음부터 무언가를 생산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스스로 연구원이 되어 지역사회를 돌아보면 무언가 눈에 띄는 주제가 보이게 된다”는 것이 최소연 교장의 생각이었다. 나를 둘러싼 사회와 이웃들 속에서 ‘할머니의 문화유산’을 발굴하는 것은 세심한 관찰을 요구했다. 자기 주제를 정한 학생들은 지역의 할머니들을 찾아다니며 인터뷰했다. 수집한 내용들은 빠짐없이 기록했다. 이 기록들은 다시 고무 판화로 만들어 시각화했다. 어떤 이들에게 그림은 글보다 쉽게 공감에 이르는 통로가 된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렇게 이웃 할머니들에 대한 ‘보고서’가 만들어졌고, 그 할머니들 중 한명이기도 한 학생들이 스스로를 들여다보게 됐다. 박혜순은 두살 많은 이미자(가명·69)의 시집살이도 보고서에 기록했다.

“울진에서 시흥동으로 시집와 딸 둘을 낳았는데, 단칸방살이로 힘든데 시어머님만 오실 때마다 ‘망할 년, 우리 집에 시집와 아들을 안 낳다니’ 하고 타령을 하셨단다. 좌판대에서 국화빵을 팔고 계셨는데 결국은 5년 만에 아들을 낳았다. 남편도 없는 속에서(사우디 갔음) 잘 낳고 살았다. 지금 방앗간 하신다.”

이미자와 동갑인 임승희(가명)의 시집살이도 전했다.

“경북 예천에서 부농의 딸로 살다가 초교 3학년 때 엄마가 돌아가셔서 새엄마가 오셨는데 구박이 심해 결혼을 일찍 하였단다. 나 좀 빨리 데려가 달라고 남편한테 재촉하였단다. 독산동 단칸방에 사는데도 시어머니는 1년씩 안 가시고 함께 살았단다. 수돗물 소리 나면 돈 나간다고 계속 쫓아다니면서 끄고, 노는 꼴을 못 보고 걸레를 코앞에 놓고 계속하라신다. 잔소리를 눈떠서 잠들 때까지 하셨다.”

박혜순 자신의 눈물 나는 삶도 연구 사례로 삼았다.

“나는 시어머니가 오셨을 때 왜 그러시냐고 화가 나 나의 배를 쳤다. 나 몰래 임신중절시킨 생각이 나 울화가 났다. 경찰서 가자고 나는 말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자손들한테 처신하냐고. 어머니는 뒤도 안 보고 가셨다. 말한 게 후회되었다.”

2남1녀를 둔 그에게도 며느리가 있다. 호된 시집살이를 해봤기 때문에 며느리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호주에서 큰아들과 살고 있는 며느리가 혼자 한국을 방문해 집에 오면 박혜순은 이야기한다.

“얼굴 봤으니 됐다. 너도 귀한 딸이잖아. 얼른 친정에 가라.”

시집살이를 연구 주제로 정하고 판화로 만드는 작업은 박혜순에게 즐거운 일만은 아니었다. 힘들었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니 가슴이 쓰렸고 눈물도 났다. 교수와 동료들에게 이야기하면서 많이 울었으나 그 과정에서 치유를 받기도 했다.

“지금의 젊은이들이 과거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 살펴봐줬으면 합니다.”

이번 작업을 하면서 박혜순은 자신이 기록한 인물들의 고향에서 그들의 삶을 발표하고 싶다는 바람을 갖게 됐다. 앞으로도 누군가의 삶을 듣고 쓰고 전하겠다는 목표도 생겼다.

지난달 30일 서울시 금천구 독산2동 공상미술관에 전시된 할머니학교 학생 ‘백목련’(본명 박정옥)의 작품. ‘폐지 줍는 할머니의 패션’이 주제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폐지 줍는 할머니 패션

‘백목련’은 올해 일흔 두살이다. 백발의 머리를 곱게 묶고 다니는 모습이 하얀 목련 같다고 해서 닉네임을 백목련이라고 지었다. 그는 1982년부터 36년째 금천구 독산4동에 살고 있다. 그는 아들 하나와 딸 셋을 키우면서도 일을 해야 했다. 신문 배달을 했고 봉제 공장과 식당 등에서도 일했다. 오래전 남편과 헤어졌지만 온전히 홀로 지낸 지는 1년도 되지 않았다. 손자손녀를 13년 동안 키웠기 때문이다. 최근 막내 손주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비로소 혼자 살게 됐다. 혼자가 되면서 할머니학교에도 등록할 수 있었다.

미투 특강을 들으면서 백목련은 손녀를 걱정했다. 오후 6시가 넘어도 손녀가 집에 오지 않으면 그는 항상 학원 앞에서 기다리곤 했다. 수업시간에 그는 청강을 하러 온 구청장에게 질문했다.

“여자들도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남자들도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잘못의 비중은 남자가 더 높잖아요. 구청장님,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구청장에게 너무 직설적으로 말했나 싶기도 했지만 그때 백목련에게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의 이웃 중엔 딸에게 ‘못된 짓’을 한 남편이 있었다. 아이 엄마가 힘들어하며 백목련에게 고민을 털어놨다. 자신이 ‘일하러 간 사이에 무직인 남편이 딸에게 그러는 것 같다’고 했다. 참다못한 엄마가 방을 따로 얻어 딸이 나가 살도록 했다.

“옛날에 우리 여자들은 참는 게 미덕인 줄 알았어요. 그동안 여성들이 자기 소리를 못 냈잖아요. 가정이 깨지거나 직장에서 퇴출될까 걱정하면서요. 이번만큼은 여성들이 당당하게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말 못 하고 살았던 시간을 더는 되풀이하지 말아야지요.”

백목련은 할머니학교가 상상해왔던 노인대학과 달라서 처음엔 적응하기 힘들었다고 했다. 할머니학교는 인문학을 기본으로 교육한다. 학생들이 누군가의 아내, 어머니, 할머니가 아닌 여자로서 자존감을 회복하고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기존 노인복지관이나 경로당이 체조, 노래교실, 컴퓨터 교육 등을 위주로 가르칠 때 할머니학교의 수업은 다른 길을 택했다. 지난 4~7월, 9~11월 두 학기 동안 주 3회(월·수·금 오전반·오후반 하루 2시간씩) 운영된 할머니학교는 ‘대화와 드로잉’ ‘자연과 함께 천천히 살다(인문학·생태학)’ ‘문화기획’ 등 3가지 과목으로 학생들을 만났다.

문화기획자 출신인 할머니학교의 최소연 교장이 진행하는 문화기획 수업은 ‘할머니의 문화 유산’ 연구, ‘몸 도서관’ 등으로 구성됐다. ‘몸 도서관’ 수업은 책 속에서 몸에 관한 글을 인용한 뒤, 그림을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쓰는 시간이다. ‘거시기’ ‘자궁’ 같은 단어가 제시어가 되기도 했다. 정규수업과 별도로 진행된 특강에서는 조한혜정 교수의 미투 강의 외에도 심보선 시인이 ‘노인의 언어’에 대해 이야기했다. ‘파쿠르 강의’도 있었다. ‘파르쿠르’(Parkour)는 프랑스어로 맨몸으로 도심과 자연환경의 장애물들을 뛰어넘는 운동이다. 할머니들은 기본동작인 ‘기어가기’ ‘도약하기’ ‘균형잡기’ 등을 실습하며 몸의 한계에 도전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할머니들은 모두 각자의 노트가 있었다. 여기에 수업 내용을 필기하고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적었다. 분홍색인 노트 표지에는 처음으로 학교를 다닌 해, 마지막으로 학교를 다닌 해, 다시 학교에 온 2018년,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썼다. 다소 생소한 수업 내용과 방식에 포기한 학생도 많았다. 지난해에는 수강생 26명 중 10명이 중도 포기했다. 올해도 마지막까지 남아 수료한 학생은 40명 중 18명이었다.

백목련에게도 학교에 그만 나가고 싶은 고비가 있었다. 큰딸이 할머니학교의 드레스코드인 보라색 반팔티를 선물하며 용기를 줬다. 다시 마음을 다잡은 그는 교수의 말을 전부 필기하고 시간 날 때마다 느낀 점을 노트에 적었다. 손에 익지 않은 판화를 잘 마무리하기 위해 수업이 없는 날에도 짝꿍 ‘긍순이’와 만나 함께 작업했다.

그들은 연구하고, 기록하고, 판화를 만드는 과정을 통과하며 그들 스스로를 알아나갔다. 평생 아내의 도리, 며느리의 도리, 엄마의 도리에 묶인 채 가부장 질서 속에 갇혀 살아온 그들이 할머니가 돼서야 한 여성으로 당해온 차별과 그들 삶에서 누락돼온 권리를 알게 됐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그동안 몰랐던 사실들로 혼란스러워했고, 각자 겪어온 시간들을 나누며 분노했으며, 새로 깨닫게 된 것들로 기뻐했다. 그 혼란과 분노와 기쁨 속에 아직은 매끈하게 정의되지 않은 ‘그들의 미투와 페미니즘’이 있었다.

백목련의 연구 주제는 ‘폐지 줍는 할머니의 패션’이었다. 그는 “잘살고 옷 잘 입는 사람이 많은 세상”이라며 “애들이 중학생이 되면 보통 브랜드에 신경 쓰게 되는데, 다행히 우리 아이들은 뭐 사달라는 말 한마디 안 하는 착한 아이들”이었다고 했다. “예쁘고 좋은 옷 입고 싶어도 참고 사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고 백목련은 생각했다. 그의 눈에 들어온 폐지 줍는 할머니들의 패션은 늘 똑같았다. 추우면 외투 하나 걸치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는 그들의 옷에서 빈부격차를 봤다. 그렇게 폐지 할머니들의 ‘패션’을 연구하게 된 그는 특히 한옥순(가명)의 옷에 주목했다.

한옥순. 79살. 금천구 독산본동에 살며 가족은 4명. 남편은 알코올 중독으로 요양병원에 입원 중. 아들 한명과 딸 한명. 남편 요양비는 아들딸이 매월 80만원 정도 부담. 생활비는 기초연금과 폐지·재활용품을 팔아 마련. 여건이 안 좋아도 항상 웃고 말도 잘함. 주위를 상처 주지 않고 배려하는 따뜻함이 감동적….

“남문시장 가는 길 옆에서 3시경에 만났다. 많이 쌀쌀하다. 빨간 목 티셔츠를 입어 따뜻해 보인다. 파란 카디건을 입고 전에 2천원에 구입한 검은색 바지 입었다. 겨울 바지가 아니라 추울 것 같다. 오늘도 실내화다. 추우니 모자 쓰면 좋지 않을까 하니 안 춥다 한다.”(백목련의 연구 결과인 작품 17개 중 ‘목 티셔츠’ 그림 설명)

“4시경에 마트 다녀오다 만나다. 재활용품 싣고 온다. 오늘은 캔이 많다. 옷은 전에 입었던 것이고 재킷은 많이 컸고 브라운 톤 기모바지 입었다. 장갑을 한쪽은 빨강, 다른 쪽은 검은색을 끼었고 마스크는 검은색으로 썼다. 신발 오늘도 같다. 운동화를 권하니 이 신이 가벼워 좋다 한다. 목이 추워 보여 옷깃 올려 옷핀으로 여며줬다. 집에 목도리 있다며 멋쩍은 듯 웃는다.”(‘옷핀’ 중)

비가 많이 내린 날이 있었다. 일을 나가지 못한 한옥순이 “놀러 왔다”며 박정옥을 찾아왔다. 남색 재킷에 꽃무늬 누비바지를 입었다. 예쁜 흰색 운동화도 신고 있었다. 빨간 스카프를 매고 반짝이 붙은 머리띠를 했다. 옷과 어울리는 천가방도 들었다.

“멋져요.”

백목련이 말했고, 한옥순은 활짝 웃었다.

“(그의) 웃는 모습이 순수하여 마음을 평화롭게 한다.”(‘멋스럼’ 중)

백목련은 학교를 평생 제대로 다녀본 적이 없었다. 그가 할머니학교에서 ‘작가’이자 ‘화가’가 됐다. 마이크도 한번 잡아본 적 없던 그가 지난 1일 행정안전부가 개최한 ‘사회혁신 한마당’(전북 전주)에서 학생 대표 중 한명으로 나가 발표했다. 그는 노트에 이렇게 썼다.

“아침의 시간은 아침을 열지만, 마음의 아침은 내일을 밝힌다는 말이 떠오른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고 함께 비를 맞는 것이다. 내 마음을 꺼내어 나눌 수 있는 친구, 소중한 이웃으로 살아가는 할머니들이 새벽을 가르고 온다.”

나를 찾는 할머니학교

두 학기 동안 수업에 참여한 학생들은 차츰 자신을 변화시켜 갔다. ‘실상화’(본명 김승희)는 재료 가게를 부지런히 찾아다녔다.

“물감 하나, 펜 하나 제대로 마련하려고 문방구도 가고 재료상도 다니게 됐어요. 화집도 구해서 방학 내내 그렸어요. 아무도 과제로 내어준 적 없지만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어요. 가족은 물론이고 동네에선 ‘화가 할머니’라고 부르는데 평생 생각도 못 해본 일이에요.”

내가 달라지자 가족도 달라졌다. 2남6녀의 장녀로 태어난 ‘동백’(본명 권인순)은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남자 형제들만 공부해야 되는 줄 알고 살았다. 그런 그가 요즘은 판화에 빠져 산다. 남는 시간엔 연극도 하고 우쿨렐레 배우느라 시간이 없다. 결국 남편에게 ‘가사노동으로부터 해방’을 선언했다.

“수업이 없는 날에도 하루 종일 판화 그리느라 시간이 없어요. 더 이상은 남편 밥 못 챙겨주겠다고 했어요. 제가 너무 푹 빠져 있으니 남편도 그러라고 하더라고요. 이제 남편이 알아서 밥 챙겨 먹어요.”

할머니학교의 오전반 반장인 박순웅은 “주위에서 항상 긍정적이란 평가를 받는다”며 닉네임을 ‘긍순이’로 지었다. 시아버지가 96살로, 올 초 시어머니가 99살로 사망하기까지, 70대인 그가 90대 시부모를 모시고 살았다. 박순웅은 “인생에 처음으로 월, 수, 금이 생겼다. 여기서 나는 더 이상 할머니가 아니”라고 했다.

“할머니학교를 다닌 후에야 비로소 나를 찾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동안 누구의 며느리,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로만 살았던 세월이 아까워요. 남은 인생은 나로 살고 싶어요.”

박순웅이 손에 꼭 쥐고 있던 노트에 눈길이 갔다. 노트에 직접 지어 붙인 이름은 ‘나를 찾는 노트’였다.

신지민 기자 godjimin@hani.co.kr

지난달 30일 할머니학교 2기 수료생들이 각자 자신들의 노트를 들고 찍은 사진을 자치회관 교실 창문에 붙여놓았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할머니학교 학생들의 노트. 한해 동안 수업 내용과 자신의 생각을 적었다. 노트 표지에는 처음으로 학교를 다닌 해, 마지막으로 학교를 다닌 해, 다시 학교에 온 2018년, 이름을 썼다. 할머니학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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