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개혁 가로막는 관료의 벽

반기웅 기자 2018. 12. 15.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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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2월 9일 강원 강릉시 운산동의 강릉선 KTX 열차 사고 현장에서 코레일 관계자들이 기중기를 이용해 선로에 누운 객차를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다. / 정지윤 기자

달리던 KTX가 멈춰섰다. 한 달 사이 충돌과 단전, 탈선으로 이어진 사고는 안으로 곪아 터진 KTX의 민낯을 드러냈다. 사과를 거듭하던 오영식 한국철도공사(코레일) 사장은 10개월 만에 사의를 표명했다. 오 사장이 사퇴의 변을 통해 지목한 사고의 원인은 ‘대규모 인력감축을 비롯한 과도한 경영합리화와 민영화, 상하분리’였다. 현재 구조개혁을 통해 공공성을 강화해야 사고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 오 사장이 내린 결론이다.

정치권 출신인 오 사장은 철도 비전문가에 가깝다. 강릉선 탈선사고의 원인을 섣불리 ‘한파’라고 추정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취임 이후 철도노조의 오랜 요구사항이었던 해고노동자 98명을 복직시키면서 친노조 성향의 사장이라는 꼬리표가 붙기도 했다. 이 때문에 보수언론과 자유한국당은 오 전 사장의 견해를 코레일 노조원의 입장을 대변한 변명으로 보고 있다. 이들이 지목한 사고 원인은 친노조 정책으로 벌어진 내부 기강해이다. 오 사장이 내린 진단은 그저 ‘철알못’의 오진일까.

■강릉선 사고로 드러난 병폐

답은 지난 8일 발생한 강릉선 탈선사고에 있다. 현재까지 국토부 항공철도사고위원회가 밝힌 강릉선 탈선사고의 1차 원인은 선로전환기의 오류다. 이 선로전환기는 애초 잘못 시공됐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설계 단계부터 회선이 거꾸로 연결된 불량부품이 그대로 설치됐다는 얘기다. 강릉선 KTX 구간 선로전환 시스템은 한 업체가 납품했기 때문에 국토부는 전 구간에 대한 점검에 나선 실정이다.

선로전환 시스템을 포함해 KTX 강릉선 시공에 대한 책임은 한국철도시설공단(시설공단)에 있다. 이 때문에 공사 시설 주체인 시설공단은 사고를 일으킨 1차 책임자로 꼽힌다. 설계가 잘못된 불량부품을 설치했고, 이후 확인작업을 게을리한 탓이다. 부실공사가 부른 전형적인 인재라는 지적이다.

시설공단의 부실공사는 적은 예산으로 공사를 해야 하는 구조적 요인에서 나온다. 비용을 최대한 아껴야 하는 시설공단은 시공사에 최대한 낮은 단가의 시공을 요구한다. 저렴한 납품단가에 맞춰 공사를 진행하다보니 설비에 쓰일 제품과 자재의 품질은 떨어질 개연성이 높다. 최진석 한국교통연구원 연구위원은 “정해진 예산에서 공사를 해야 하는 시설공단 입장에서는 품질 좋고 비싼 부품을 쓰지 못할 수 있다”며 “좋은 설비를 갖추려면 기재부에 예산을 추가로 신청해야 하는데 과정이 까다로워서 하지 않는 게 일반적”이라고 말했다.

시설공단의 책임은 시공에 한정돼 있다. 책정된 예산으로 정해진 공기에 따라 공사만 마무리하면 된다. 일단 공사를 끝내면 그 뒤 설비와 관련한 모든 책임은 코레일 몫이다. 현 상하분리 체계에서 시설공단은 건설·공사를, 코레일은 운영과 유지·보수업무를 담당한다. 이 때문에 운행이 시작된 선로에서 일어난 사고 역시 코레일의 책임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철도업계 관계자는 “시설공단에 제일 중요한 건 비용절감과 개통 여부”라며 “국토부가 개통을 재촉하니 부실공사를 해서라도 공기를 맞춰 넘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안전보다 비용절감에 방점을 둔 시설공단의 시공방식은 사고가 난 강릉역~남강릉역 구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KTX 강릉선은 사고구간을 제외한 전 구간이 복선이다. KTX 열차는 사고구간을 오갈 때만 상·하행선이 신호를 기다렸다가 교대로 운행한다. 단선구간은 사고위험이 높기 때문에 착공 당시 전문가들은 복선으로 설계변경을 요구했다. 강릉시 역시 안전을 이유로 전 구간 복선 설치를 주장했다. 하지만 정부는 사업성을 염두에 둔 예비타당성 조사를 근거로 강릉역 인근 9㎞에 단선을 설치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김상균 한국철도시설공단 이사장은 지난 11일 국회 현안보고에서 “(해당 구간은) 경제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단선으로 시공했다”고 말했다.

지난 11월 19일 서울역으로 진입하던 KTX 열차가 선로 보수작업 중이던 포클레인의 측면을 들이받아 작업자 3명이 다쳤다. / 연합뉴스

■철도개혁 가로막는 국토부 관료

예비타당성 조사에 따른 정부 방침에 시설공단이 이견을 내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예산을 짜는 기재부가 경제성을 이유로 단선 계획을 세웠더라도 안전을 책임져야 할 시공주체는 승객 안전을 내세워 반발했어야 마땅하다는 지적이다. 박흥수 사회공공연구원 철도정책 객원연구위원은 “기재부가 승객 안전에 대한 고려 없이 예산을 세웠더라도 국토부와 시설공단은 안전을 고려해야 한다”며 “경제논리에 맞춘 방침을 그대로 따랐다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강릉선 사고로 확인된 철도 안전의 위협요인은 수익을 우선하는 경영과 불량시공을 하고도 책임 떠넘기기를 가능케 하는 상하분리 구조다. 요컨대 오 사장이 사퇴의사를 밝히며 지적한 사안들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오 사장이 제시한 철도문제의 해결책, 철도 공공성 강화는 어떻게 봐야 할까.

공공성 강화는 오 사장뿐 아니라 철도전문가와 학계, 시민사회에서 오랫동안 제시한 철도문제 해결방안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철도 공공성 확보를 철도문제를 해결할 해법으로 판단했다. 문 대통령은 철도 공공성 강화를 위해 첫 번째로 시행할 과제로 상하통합을 꼽았다. 실제로 문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철도공사(코레일)와 철도시설공단을 통합하는 데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혔고, 관련 내용을 담은 한국노총과의 정책협약에 서명했다. 오 사장과 문 대통령이 철도문제에 대한 진단과 처방이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철도정책을 이끌고 있는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 역시 취임 이후 경쟁체제 하에 분리된 철도산업 구조 전반에 대해 재검토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김 장관의 뜻과 달리 철도 구조개혁은 당장 내부 반발에 부딪혀 표류하고 있다. 국토부가 진행 중인 첫 철도 개편작업은 ‘철도 공공성 강화를 위한 철도산업 구조평가’ 연구용역이다. 철도산업의 구조를 평가하고 개선방향을 찾겠다는 취지의 연구다. 여기에는 코레일과 수서고속철도를 운영하는 SR의 통합을 비롯해 코레일과 시설공단의 통합에 대한 타당성 연구도 포함됐다. 국토부는 지난 6월 해당 용역사업을 발주했고 현재 인하대학교 연구팀에서 용역을 진행 중이다. 당초 계획대로라면 오는 19일에 연구 결과가 나와야 하지만 이달 들어 갑자기 일정이 연기됐다. 국토부는 “인하대 측에서 연구에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해서 3개월 시간을 더 준 것”이라고 밝혔다.

국토부의 설명과 달리 이번 일정 연기를 두고 뒷말이 나온다. 여론조사를 비롯한 연구결과가 통합으로 나올 조짐을 보이자 부담을 느낀 국토부가 시기를 늦췄다는 것이다. 요컨대 상부 지시로 용역을 맡겨놓고 정작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자 실무진들이 발표를 미루라고 압력을 가했다는 얘기다.

철도업계 안팎에서는 철도 공공성 관련 연구용역 결과가 나오는 3월에 김현미 장관이 교체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코레일 노조의 집행부가 바뀌는 때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업계에서는 국토부 내부에서 장관과 노조의 수장이 바뀌는 시기에 연구결과를 발표해 의미를 축소시키려고 한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이 같은 정황은 국토부가 운영하고 있는 ‘철도산업 구조평가 협의회’에서도 나타난다. 지난 8월 국토부는 코레일과 SR, 시설공단 등의 철도전문가 등 12명으로 철도산업 구조평가 협의회를 구성했다. 진행 중인 철도산업 구조평가 연구와 관련해 매달 한 차례씩 모여 진행상황을 점검하는 일종의 자문기구다. 하지만 협의회 활동은 상견례 자리를 제외하고 한 차례 회의가 열린 이후 중단됐다.

지난해 10월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설계·시공 오류가 드러난 ‘소사~원시 복선전철’ 공사 현장을 찾아 철도시설공단 담당자들에게 보완책을 주문하고 있다. / 경향신문 DB

■국토부 “상하통합 주장은 월권”

문제는 첫 회의였다. 협의회 자리에서 철도산업 구조의 문제에 대한 지적이 이어지자 국토부는 연구내용과 방향에 문제를 제기했다. 당시 협의회에 참석한 관계자는 “국토부 담당자가 회의 자리에서 ‘연구결과가 나오면 그 결과에 따른 정책을 할 수 있지만 결과가 부실하면 그냥 무시하고 국토부가 알아서 방향을 결정하겠다’고 언급했다”고 말했다. 국토부에서 예상한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따르지 않겠다는 의미다. 이에 대해 국토부 관계자는 “제기된 의혹들은 사실이 아니다”라며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용역을 진행해서 용역 결과를 토대로 정책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국토부는 공식적으로 코레일과의 상하통합을 반대해 왔다. 지난 2012년 12월 박근혜 정부 출범을 앞두고 코레일이 시설공단과의 통합을 건의하자 국토부(당시 국토해양부)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코레일의 주장을 일축했다. 당시 국토부는 “철도정책 수립은 정부의 고유권한”이라며 “코레일의 상하통합 주장은 기강해이에서 비롯된 행위”라는 입장을 내놨다. 국토부는 오히려 더욱 완전한 상하분리를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국토부의 이 같은 방침은 상하분리가 이뤄진 지난 2005년부터 이어져 왔다. 당시 철도청의 상하분리는 부채를 줄이기 위한 철도산업 구조개혁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다. 2015년 기준 코레일의 부채는 2배 이상 늘었다. 지난해에도 코레일 부채는 1조1366억원이 증가했다. 시설공단의 부채 역시 20조원에 달한다. 2005년 철도개혁 당시부터 제기된 상하분리로 인한 안전사고 우려는 현실이 됐다. 사고 예방을 위한 유지보수비는 상하분리 이후 연평균 5.3% 감소했다. 지난 2011년 민간전문가로 구성된 철도안전위원회는 상하분리로 인해 안전 확보가 어려울 수 있다며 개선을 권고하기도 했다. 이영수 사회공공연구원 연구위원은 “대통령은 바뀌었지만 철도 상하분리 정책을 만든 관료들은 여전히 남아있다”며 “관료들이 직접 만든 정책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개혁작업이 내부 저항에 부딪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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