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기자] 카풀-택시 갈등, '밥그릇' 아닌 '빈곤'의 문제

조효석 기자 2018. 12. 20.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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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시위는 열악한 노동환경 불만 폭발한 것

내년 환갑을 맞는 권모씨는 10년째 서울에서 법인택시를 몰고 있다. 개인사업이 실패하고서 이혼한 뒤 지금껏 같은 회사 소속으로 택시를 운전했다. 권씨는 20일 열리는 서울 여의도 집회에 나갔다. “마지막으로 비명이라도 지르자는 심정이에요.” 권씨는 최근 분신했던 택시기사 최모씨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도 수차례 했다고 말했다. 택시기사들의 절박한 상황을 어떻게든 알리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권씨는 이번 주만 해도 오후 4시부터 다음날 오전 5시까지 매일 하루 최소 13시간을 운전했다. 그러나 주6일로 꼬박 일해도 한 달 버는 돈은 120만원 정도다. 기본임금인 142만원에서 사납금(회사납입금)을 채우지 못한 만큼이 깎인 금액이다. 야간 근무 시 내야하는 사납금은 하루 15만원 정도다. 5000원 이상 요금 낼 승객을 최소 30명은 받아야 채우는 금액이다. 다른 일거리를 찾으려고도 해봤다. 하지만 편의점에서조차 나이 많은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나마 주변 택시기사들 중 그는 매우 어린 축이다.

권씨는 7년 전 얻은 비강암 때문에 여태 약값을 치르느라 빚을 졌다. 보험 혜택은 끝난 지 오래다. 젊은 시절 뒷바라지했던 동생들이 자주 도와주지만 이젠 면목이 없다. 새벽이면 술주정 부리며 반말하는 젊은 손님을 견뎌야 할 때가 많다. 권씨는 여태 스스로 한 번도 승차거부를 해본 적이 없지만 그런 기사들의 심정도 이해한다고 했다. 지금에서 더 어려워지면 어디까지 내몰려야 할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또 다른 택시기사 박모씨는 내년이면 70세가 된다. 자녀들이 부양해줄 형편이 아니라서 퇴직 뒤 운전대를 잡은 게 벌써 20년째다. 개인택시를 몰아 그나마 사정이 낫다지만 손에 쥐는 돈은 한 달에 많아봐야 160만원 수준이다. 다른 일거리를 찾아보려했지만 아파트 경비 자리마저 빈곳이 없었다. “이것 말고는 입에 풀칠할 수 있는 일이 없는데 어떻게 하라는 건지 모르겠어요.” 박씨 역시 20일 집회에 나갔다.

택시운전대를 잡은 이들은 갈수록 늙어가고 있다. 한국교통안전공단이 국민일보에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달 말 기준 전국의 택시기사 26만8164명 중 60대 이상은 14만5198명으로 54.2%를 차지한다. 2015년에는 60대 이상이 약 11만6780명이었다. 불과 3년 만에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약 12% 포인트 늘었다. 50대 이상으로 범위를 넓히면 비중은 89.5%에 이른다. 70대 이상 택시기사는 전국적으로 2만7490명으로 3년 전보다 약 1만명 늘었다. 택시기사의 98.6%는 남성이다.

도로에는 오늘도 수십만의 권씨와 박씨가 달리고 있다. 통계에서 드러나듯 많은 기사들은 가족의 부양을 받지 못해 일거리를 찾아 나선 노령층이다. 노인층을 부양할 만한 여력이 일반 가정에서 급속히 사라지면서 자연스레 택시운전대를 잡은 이들이다. 서울노동권익센터는 2016년 보고서에서 남성 1인 가구 택시노동자가 증가하고 있으며 이들의 노동·생활실태가 다른 이들보다 훨씬 열악하다고 지적했다.

택시기사의 고령화는 기존에 지적받아온 사납금 문제와 결합하면 더 심각해진다. 그간 물가에 따라 지방자치단체가 택시요금을 올려도 택시회사가 함께 올리는 사납금 탓에 수익은 고스란히 이들 택시업체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노조는 무력하거나 부패한 경우가 많았다. 서울 지역에서 2000년과 2014년 택시기사의 1일 순수입은 2만2282원에서 2만1245원으로 오히려 줄었다. 물가는 같은 기간 1.492배 올랐다.

이번 시위에 기사들이 대규모 거리로 쏟아진 것도 카풀 도입에 위기를 느낀 업체들이 이날 하루 사납금을 면제해주고 나서야 가능했다. 업체들 대부분은 지난 10월과 11월 파업에서 사납금을 면제해주지 않았다. 시위 체감도가 일반 시민에게 그리 크지 않았던 것도, 참가자 중 개인택시기사의 비중이 유독 높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한 노조 관계자는 “업체들의 비협조 때문에 법인 택시기사들의 참가율이 낮았던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수십년째 사납금 문제를 사실상 방기해왔다. 기사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지난해 도입된 ‘택시발전법’ 역시 어용노조와 사측이 짬짜미로 합의해 사납금을 대폭 올린 업체에선 별 효과가 없었다. 운송비용을 기사 개인에게 전가하는 일도 이 법으로 금지됐지만 여전히 현장에선 흔하게 벌어진다. 정부가 18일 카풀 대신 내주겠다며 협상안으로 내민 ‘택시월급제’도 이미 제시된 지 오랜 세월이 지난 해법이다. 기사들은 막판에서야 급하게 내민 정부의 제안에 그 진정성을 의심하고 있다.

이번 파업이 설사 카풀을 막아낸다 해도 앉아서 이득을 볼 건 업체들이다. 지금까지 정부가 무슨 방안을 발표해도 기껏해야 권장사항 정도로 시행되거나 어용노조가 회사와 말도 안 되는 협상을 벌이는 통에 현장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게 기사들의 설명이다. 권씨는 “나와 동료기사들은 이미 현실이 더 나아질 것이란 희망을 버렸다”면서 “나아지긴 커녕 여기서 훨씬 더 나빠질 게 뻔한 일이 닥쳐오니 정말 죽겠다 싶어 나선 것”이라고 덧붙였다.

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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