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전 그들의 '여성노인' 비하, 지금은 끝났을까

2018. 12. 22.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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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③
퀸텐 마세이스, '늙은 여인'
퀸텐 마세이스, <늙은 여인>, 1513년께, 목판에 유채, 런던 내셔널갤러리.

“정말 재미있는 것은, 마치 저승에서 막 돌아온 듯한 송장 같은 할머니가 ‘인생은 아름다워’를 끊임없이 연발하고 다니는 것을 보는 일이다. 이런 할머니들은 암캐처럼 뜨끈뜨끈하고, 그리스인들이 흔히 하는 말로 염소 냄새가 난다. (중략) 또 처녀들 틈에 끼어 술을 마시며 춤을 추려 하고 연애편지를 쓰기도 한다. 모두가 비웃으며 그런 할머니들을 두고 다시 없는 미친년들이라고 말한다.”

앞의 글은 네덜란드의 인문학자 에라스뮈스가 쓴 <우신예찬>에서 부분 발췌한 것이다. 풍자 글이라는 점과 1511년에 발표됐다는 시대상을 고려하더라도, 여성혐오와 노인혐오가 뒤범벅이 된 이른바 ‘고전’을 보는 마음이 그리 편치 않다. ‘여성 노인’을 보는 이 같은 시선은 비단 글에만 그치지 않는다. <우신예찬>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인물들을 소재로 한 그림을 많이 그린 화가 퀸텐 마세이스(1466~1530)는 에라스뮈스의 책이 간행된 3년 뒤, 기이한 그림을 하나 발표한다.

변형성 골염인 패짓(Paget)병에 걸려 뼈에 기형이 온 추한 모습의 여인. 게다가 그녀는 늙었다. 기미와 주름이 뒤덮인 얼굴은 괴이하게 보일 정도다. 그러나 그녀는 그 늙음의 흔적을 감추지 않는다. 오히려 가슴골이 보이도록 깊게 파인 옷을 입었는데, 옷 위로 삐져나온 쭈글쭈글한 살이 오히려 그녀의 노화를 더욱 드러내는 구실을 한다. 이 와중에 그녀는 오른손에 약혼의 상징인, 작은 빨간 꽃을 들고 있다. 이는 현재 그녀가 이성을 유혹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 그림의 제목은 <늙은 여인>. 즉 이 작품은 나이에 맞지 않게 행동하는 늙은 여성을 풍자하고 희화화한 그림이다. 마세이스가 혐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이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그래도 됐기 때문이다. <우신예찬>에서도 볼 수 있듯, 당시 사회는 이렇게 ‘주제 파악 못 하고 분수도 모르는 할머니’를 조롱하고 비웃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까닭이다.

마세이스의 그림이 발표된 지 500년이 지났다. 하지만 ‘여성 노인’에 대한 비하는 나아진 바가 없는 듯하다. 시중에 있는 잡지를 펼치면 항상 성형외과, 피부과 광고가 끼어 있기 마련인데, 그 광고 방식이 참 묘하다. 주름개선 시술과 제품의 광고 이미지 대다수가 젊은 여성의 피부와 주름진 중년 여성의 피부를 맞닿아 비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 어디를 둘러봐도 젊은 여자보다는 안 젊은 여자들이 더 많다. 세상에 멀쩡히 실존하는 안 젊은 그녀들은 졸지에 그들의 피부가 ‘교정 대상’으로 제시된 이 무수한 광고 이미지를 보며 불쾌하지 않을까.

그러다 성형외과 광고 구석에 자리잡은 병원장의 프로필 사진에 눈길을 돌리면, 그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항상 남성이다. 그 남성 중에는 주름지고 머리가 희끗한 중년도 있다. 그들은 교정의 대상이 아니라 교정을 하는 주체다. 이쯤 되면 사회가 보내는 메시지가 너무나 명확해진다. 사회는 늙음을 ‘추’로 생각한다. 추를 미로 바꾸고, 승인하는 쪽은 남성이다. 자연이 정해놓은 노화의 흐름을 바꾸기 위해 매일 시시포스가 바위를 굴리듯 노력해야 하는 쪽은 여성이다. 한편으로 <늙은 여인>에서 보듯 늙은 여성들이 젊어 보이려 ‘너무’ 애쓰다 보면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다며 준엄한 경고를 날리기도 한다.

여성이자 한해 한해 나이 들어가는 나는 그 요란한 경고음을 애써 무시하고 살기로 했다. 내 장래희망은 할머니 서퍼가 되는 것이다. 벌써부터 ‘아이고, 나이는 생각도 않고’라고 걱정을 빙자한 조롱이 들리는 듯하다. 하지만 뭐 어떤가. 소금에 전 백발을 휘날리며 파도 위를 누비다가 주름이 지도록 깔깔 웃는 할머니, 그러다가 내 맘대로 옷 입고 춤추며 뜨끈뜨끈하게 사는 할머니가 되는 게 뭐 그리 잘못된 일인가? 그렇게 늙음을 간직한 채로 젊게 살고 싶다. 이제 며칠만 지나면 한 살을 더 먹으며 그만큼 늙을 텐데…. 후, 내년엔 기필코 서핑 강습에 등록해야겠다.

이유리 예술 분야 전문 작가. <화가의 마지막 그림> <세상을 바꾼 예술작품들> <검은 미술관> 등의 책을 썼다.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코너에서 ‘여자사람’으로서 세상과 부딪치며 깨달았던 것들, 두 딸을 키우는 엄마로 살면서 느꼈던 감정과 소회를 그림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풀어보고자 한다. sempre8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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