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경쟁이 만든 '각자도생' 대한민국

조효석 기자 2018. 12. 23.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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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 '나 혼자 아닌 우리'] <1부> ③ 사회 공동체 어떻게 붕괴됐나

글 싣는 순서

<1부 : 더불어 살아가기 위하여>
<2부 : 공동체 균열 부르는 ‘신계급’>
<3부 : 한국을 바꾸는 다문화가정 2세>
<4부 : 외국인 노동자 100만명 시대>
<5부 : 탈북민이 한국에서 살아가는 법>

‘각자도생(各自圖生)’은 요즘 한국 사회를 가장 잘 규정하는 단어 중 하나다. 빠른 속도로 진행된 신자유주의화로 개인 간 경쟁이 심해진 데다 외환위기부터 최순실 사태를 겪으면서 국가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 소속된 공동체의 연대의식이 급속히 사라졌다.

이는 사회 구성원들이 체제뿐 아니라 서로를 불신한 채 각자의 이해관계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결과로 이어졌다. 한국 사회가 공공의 이익이나 가치, 혹은 다른 개인이나 집단을 향한 공감과 배려 없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만 남은 곳이 됐다는 지적이다.

국가의 배신

한국 사회의 변화 계기로 1997년 외환위기가 꼽힌다. 사회 구성원들이 국가를 향한 신뢰를 잃은 사건임과 동시에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무자비한 경쟁이 본격적으로 확산된 시발점이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냉소사회’의 저자 김민하씨는 “외환위기는 끊임없이 ‘모든 것이 괜찮다’던 국가의 메시지가 거짓임이 공개된 최초의 사건”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이전까지 일부 진보 세력을 제외한다면 한국 사회 구성원들은 정권의 메시지를 대개 믿고 따랐다. 하지만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바로 직전까지 뉴스에서 ‘위기가 아니다’ ‘우리 경제 펀더멘털은 튼튼하다’고 말해온 게 결국 거짓이었다는 걸 경험했다”고 말했다.

최순실 사태 역시 정치뿐 아니라 행정과 사법체계에 대한 불신이 증폭된 촉매였다. 국가가 내세웠던 정책이나 구호가 사실은 자격 없는 이들이 사적 이해관계를 위해 저질렀던 일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모두가 목격했다. 이 사건으로 ‘기득권 세력은 거짓말을 해서 이득을 챙기고 피해는 힘없는 개인들이 본다’ ‘체제는 기득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식의 서사가 재생산됐고, 사회 구성원들에게 확신으로 자리 잡았다.

이런 믿음을 강화시키는 사건은 한국 사회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세월호 참사, 경주 대지진 등 각종 재난사고마다 드러났던 정부의 무능과 비리도 일례다. 국정원 댓글조작 사건이나 최근의 사법농단 사태도 여기 해당한다. 비서 성폭행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1심에서 무죄를 받은 뒤 일어난 시위에서는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라는 구호가 나오기도 했다.

지난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한국개발연구원(KDI)이 공동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16년 초 기준 한국의 공무원과 행정부, 지방정부 신뢰도는 모두 11점 만점에 5점, 지방의회는 4점에 그쳤다. 국회의원은 신뢰도가 3점대였다. 여론조사 기관 갤럽 조사에서 한국 정부의 신뢰도는 2017년 36%로 OECD 평균인 45%보다 9% 포인트 낮았다. 2006년부터 2017년까지 OECD 평균을 넘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체제에 대한 신뢰 상실은 곧 정부나 언론이 내세우는 대의, 즉 공공선(善)을 향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공공의 이익이나 소수자 배려 등 보다 공적인 가치는 평가절하된 채 어떤 정책이 누구에게 이익인지만 따지는 논란, 또 서로가 그러한 이득을 누리지 못하는 ‘피해자’라는 주장이 난무하고 있다.

각자도생의 사회

공공기관 정규직 2년차인 A씨(25)는 최근 회사에서 추진 중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논란을 보면 머리가 아프다. 사내 게시판은 관련 주제만 올라오면 전쟁터다. 콜센터 직원이 대부분인 이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바꿨을 때 기존 직원들이 금전적 손해를 본다는 불만, 혹은 왜 자신과 같은 채용 과정을 거치지 않은 이들을 정규직화해야 하느냐는 원성이 대부분이다. A씨는 “정책이 좋은 취지라는 건 알겠지만 솔직히 지금처럼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적용받는 ‘룰’이 운 좋은 몇몇 사람에게만 유리하게 달라지는 걸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말했다.

체제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 개인들은 외환위기 후 급속히 진행된 신자유주의화로 서로를 향한 연대의식까지 잃어버렸다. ‘억울한 사람들의 나라’ 저자인 칼럼니스트 최태섭씨는 “외환위기 이후 이어진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은 점점 더 많은 사람을 경계 바깥으로 내모는 것을 개혁이라고 주장해 왔다”면서 “한국 사회에서 공동체는 사라지고 있는 게 아니라 이미 없었고, 지금은 그것이 (구성원들의 인식 사이에서도) 확신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이제 한국 사회에서는 비정규직이나 여성, 장애인, 외국인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지키거나 회복해야 한다는 목소리보다 ‘자격 없는 이들이 부당하게 이득을 챙긴다’는 식의 무임승차, 혹은 특혜론이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지나친 경쟁으로 서로를 이전투구의 상대로만 바라보게 된 결과다. 인권이나 평등 등 다른 사회 정의보다 유독 ‘공정’만이 강조되는 것도 이 연장선상에 있다. 경쟁에서 서로 간의 우위를 가르는 데 적용될 ‘공정한 룰’이 다른 모든 가치보다 우선시되는 것이다.

한국 사회 구성원 간 연대의식이 사라진 건 통계에서도 드러난다. 사회학계 국제 네트워크인 ‘세계가치관조사(World Values Survey)’ 조사에 따르면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대인 신뢰도는 1981~84년 38%였던 게 2010~14년 들어 27%까지 떨어졌다. 같은 기간 외려 3% 상승한 중국은 물론 2% 하락한 일본, 8% 떨어진 미국과 비교해도 상대적으로 하락폭이 가팔랐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공동체적 가치와 신뢰가 사라진 사회일수록 언론 등 공론장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해관계가 부딪히는 사안에서 실체적 진실을 찾아내고 함께 지향해야 할 공공의 가치를 논의해야 한다는 조언이다. 김민하씨는 “이수역 폭행 사건에서처럼 각자의 입장 중계만 하면서 ‘남녀 갈등 심각하다’고 하는 식의 피상적인 보도로는 갈등만 부각시켜 상황을 악화되게 할 뿐”이라면서 “언론이 실체적 내용이나 사회적 맥락을 고려해 신중한 보도를 해야 각자가 이해관계상 우위를 점하려는 데 휘말리지 않고 왜곡된 시각을 피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최성수 성균관대 사회학 교수는 23일 “사회적 발언권이 있는 이들이 선명성이 먼저인 담론의 전장에서 손쉽게 입장을 정하고 갈등을 증폭시키는 발언을 하면 언론은 이를 검증이나 비판 없이 오프라인으로 확대 전달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섬세한 토론이나 과학적 근거보다 갈등과 감정, 정치적 입장이 우선시되는 과정이 그간 제도적 절제 없이 강화돼 왔다”면서 “중요한 사회적 현안에 주요 당사자들이 자리를 만들어 토론하고 나갈 방향을 합의하는 제도적, 인식적 기반이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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