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김혜수, 위대하고 다정한 그 이름

입력 2018.12.24. 09:41 수정 2019.02.10.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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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EAT WOMAN

30년이 넘는 시간을 배우로 살아온 프로페셔널, '최고'에 걸맞는 품위와 태도를 지닌 스타, 존경받는 여성이자 멘토, 놀랍도록 사랑스럽고 다정한 그 이름, 김혜수.

레더 소재의 원 숄더 톱과 플리츠 장식의 스커트는 Max Mara.

벨벳 소재의 스트라이프 셔츠와 팬츠는 Faith Connexion by 10 Corso Como Seoul.

우리에게 김혜수란 배우가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영화 <국가부도의 날>을 보며 생각했다.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다채로운 인물을 연기해 온 배우이자 대한민국 패션계에 기록될 압도적인 스타일을 선보여온 스타. 서울 시내 한 호텔의 펜트하우스에서 6시간 남짓 진행된 촬영은 우리가 기억하고 기대하는 김혜수의 모든 매력을 압축해서 체감하는 시간이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로 침대에 얼굴을 파묻을 때의 천진한 웃음, 레드 립스틱을 바르고 소파에 몸을 기댔을 때의 관능미, 잘 재단된 수트를 입고 카메라를 응시할 때의 카리스마.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을 완수하기 위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영화 속 한시현처럼 언제나 그렇게 확신에 찬 발걸음을 내디딘 것 같은 그녀지만, 지난 시간을 회고하며 ‘숱하게 길을 잃었다’고 고백한다. “막 울면서 나를 쓰다듬어준 적도 있죠. 너로서는 최선을 다했어, 아무도 몰라줘도 괜찮아.” 오직 본인만이 기억할 두렵고 고독한 시간을 버텨내면서, 품위 있는 여성이자 닮고 싶은 태도를 지닌 멘토로 우리 곁에 존재하는 전무후무한 아이콘. 가까이에서 마주한 그는 또한 얼마나 사랑스러운 여인이며 넓은 품과 다정한 마음을 지녔는지, 마음과 마음이 통했던 아름다운 순간에 대해 얘기하며 두어 차례 손을 들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국가부도의 날>로 관객을 만나고 있습니다. 특별히 마음에 와닿은 반응들이 있나요 저도 IMF를 겪은 세대잖아요. 어린 나이도 아니었고, 나름 그 시대를 거쳤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내막을 잘 모르고 넘어갔던 것 같아요. 당시 우리 집도 어려움을 겪었는데 저는 그게 개인적인 집안 문제인 줄 알았어요. 따지고 보면 다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던 거예요. 이번 영화는 중장년층 관객이 많아요. 어른들이 보시면서 많이 우세요. 그 시절을 온몸으로 겪은 분들이니 그때의 회환이 기억나시나 봐요. 젊은 사람끼리 ‘이거 꼭 봐야 해’라는 움직임도 좀 있는 것 같고요. “이런 영화 만들어줘서 고마워요” “연기해 주셔서 고마워요” 무대 인사를 하면서 이런 얘기들을 들을 때 울컥하더라고요. 관객에게 직접 이런 얘기를 들은 건 처음이었어요.

책임감 강하고 프로페셔널한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의 모습이 인간 김혜수와 맞닿은 느낌도 듭니다. 처음부터 이 캐릭터가 얼마나 가깝게 느껴졌나요 많은 분들이 한시현이 멋있다는 얘기를 하는데, 저는 멋있다는 생각을 하진 못했어요. 일하는 여자로서 제가 공감했던 건 이 부분이에요. 한시현이 본인의 소임을 다하느라 정말 고군분투하고 뛰는데, 정작 자신의 피붙이인 오빠는 못 보잖아요. 일하는 분들은 많이 공감할 거예요. 주어진 내 일을 열심히 하느라 정작 내 가까이, 내게 중요한 사람들과 관련된 부분은 놓칠 때가 있다는 걸. 어떤 작품이든 저와 캐릭터 사이에 교집합은 있다고 생각해요. 처음에 시나리오를 봤을 때 들었던 생각은 한시현 같은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것. 이렇게 원칙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이 요즘에는 참 많지 않고, 있어도 조직에서 버티기 힘든 분위기니까요. 영화를 찍고 난 후 많은 분들과 영화에 대해 얘기하면서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하는 생각을 계속 하게 돼요. 더 좋은 어른, 성숙한 어른으로 살아가는 게 어떤 것인지, 언제부터인가 늘 고민하고 염두에 두고 있는데 좀 더 깊게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영화 초반 남자 팀원들이 구두를 신겨주고 외투를 챙겨주는 신이 나와요. 한국영화에서 여자 리더가 이런 방식으로 그려진 건 거의 처음인 것 같아요. 한시현이 팀을 이끌며 앞장서서 걷는 모습, 그 자체만으로 어떤 쾌감이 있더라고요 그 신이 몽타주처럼 지나감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얘기해 주세요. 스치듯 담긴 그 장면이 많은 분에게 자극이 된 건, 아직 그런 광경이 생경하다는 뜻이겠죠. 최근 들어 젠더 이슈가 화두잖아요. 치열하게 부딪치고 많이 얘기도 하면서 더 나은 방향으로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영화에서 그 부분이 좋았던 건, 신발을 갖다주거나 재킷을 입혀주는 모습이 권력 구조로 읽히지 않고 유기적인 팀워크로 보여진다는 점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이 좀 더 근사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금융 조직이 굉장히 보수적이라더라고요. 한시현은 자신의 실력으로 지위를 가진 사람이고, 이 팀은 조직에서 외인부대 같은 거라고 생각했어요. 남성 중심의 권력 구조에서 살아남았다고 해서, 그녀가 결과적으로 그런 구조적인 권력을 행사했을 것 같지도 않았고요. ‘정신 똑바로 차려’ 이런 대사도 ‘정신 차리자’는 식으로 좀 바꿨어요. 한시현의 실력은 이런 팀워크인 거고, 그래서 모든 조력이 너무 마땅하고 자연스럽게 보여지는 거죠.

20년 후를 보여주는 영화의 결말은 마음에 들었나요 원래 시나리오에서는 한시현이 시민단체에서 혼자 일하는 데서 끝나요. 어쩌면 그게 현실적인 결말일 텐데, 저는 속상하더라고요. 소신과 원칙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은 결국 변방에서 힘없이 우울하게 끝난다는 게. 억지로는 아니지만 조금 더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뒀으면 해서 아이디어를 제안했어요. 한시현은 결국 실패했고 좌절했지만, 더 큰일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뒀다는 게 전 좋아요.

화이트 베스트와 테일러드 재킷은 Bride and You. 화이트 팬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러플 장식의 화이트 언밸런스 톱은 Ports 1961. 블랙 쇼츠는 Dior.

핀스트라이프 패턴의 그레이 재킷은 Off-White™.

드라마 <시그널>에서도 신념을 지닌 투철한 여성 직업인을 연기한 적 있어요.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시즌 2를 기다리는 팬이 많은데, 본인에겐 어떤 작품으로 기억되나요 일단 일하는 환경이 굉장히 이상적이었어요. 모두가 프로페셔널했어요. 보이지 않는 스태프까지도 일치감이 있었고, 각자 자신의 분야에 있어서 거의 완벽에 가깝게 일했어요. 물론 늘 밤을 새웠고, 추위에 시달렸고, 제때 밥도 못 먹었지만 그럼에도 현장에서 숨소리 하나 두드러질 정도로 집중도 높게 작업했어요. 개인적으로 특별했던 건, 김원석 감독님이 일하는 태도를 보면서 ‘최선’에는 한계가 있을 수 없다는 걸 알았어요. 스스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이상의 최선이 있다는 걸 잊어버리잖아요. 끝까지 절대 놓아선 안된다는 것, 내가 하는 일이 바로 그런 일이라는 걸 다시 환기하게 됐어요.

그 외에도 필모그래피를 채운 수많은 작품 중에서 ‘전환점이 된’ 작품을 꼽는다면 전환점이라는 건, 당시는 잘 모르고 시간이 지나야 아는 것 같아요. 20대 초반에 <첫사랑>이라는 작품을 했어요. 제가 항상 나이보다 성숙한 역할을 많이 했는데, 이명세 감독님이 배우로서 저를 바라보시는 시선은 좀 달랐던 거 같아요. 그때는 왜 굳이 나를 선택해서는 다 맘에 안 든다고 하는지 이해가 안 갔어요. 지나고 보니까, 어릴 때 연기를 시작해서 저도 모르게 내 모습을 잊고 덧씌워져 있던 것들을 한 겹 한 겹 벗겨주신 것 같아요. 그리고 한참 시간이 흐른 뒤인데, 항상 절 따라다니는 말이 ‘대표작이 없다’는 말이었어요. 지금도 배우가 연기를 잘하는 게 중요하지, 대표작이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하는 입장이지만, 어쨌든 <타짜>라는 작품을 하고 나서 대외적으로 대표작이 생겼어요. 근데 그게 의미가 있더라고요. 이전에 저한테 들어오는 작품들을 보면 대중이나 업계가 나를 바라보는 혹은 나에게 원하는 게 뭔지 정확하게 보여요. 그런데 <타짜> 이후에는 훨씬 폭이 넓어진 거? 그것도 역시 시간이 지나고 나서 알게 된 거예요. 앞서 말했듯 <시그널>은 최선의 기준점을 재정립한, 중요한 작품이에요. 그리고 <국가부도의 날>도 그렇게 될 것 같아요. 출연 여부를 떠나 꽤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정말 우리가 뭘 생각해야 하는지 질문하는 작품이고, 아마 시간이 지나면 더 그렇게 느껴질 것 같아요.

오랜 시간 길을 잃지 않고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요 길은 수시로 잃어요. 지금도 그렇고요. 누구나 슬럼프가 없을 순 없어요, 그게 오래 지속된 순간도 있었어요. 그걸 많은 분들이 눈치를 못 챘거나, 그래도 늘 괜찮았다고 좋게 생각해 주시는 것 같아요. 힘든 때가 많았죠. 어린 나이에 전혀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출발해서 배우로서 자의식이 없는데다 제 취향조차 몰랐어요. 일하면서 철도 들고 배우로도 성장했지요. 중간에 어려운 시기도 많았어요. 내가 같이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나한테 관심 갖지 않았던 기간도 꽤 길었고요. 이 길이 맞는 건지 확신도 없고, 늪에 빠져 돌아가거나 주저앉아 헤맬 때도 너무 많았어요. 사실은 늘 길이 안 보이죠. 그럼에도 가야 하는 거잖아요. 그게 인생인 거 같아요.

올해 <미스티>로 활약한 김남주 씨가 한 시상식에서 ‘김혜수 선배’에게 격려 전화를 받은 일을 언급하며 감사를 표했죠. 얼마 전 청룡영화제에서 한지민 씨가 수상 소감을 말할 때는 함께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요. 여배우들과 특별한 연대감을 느끼나요 여자 연기자에게만 느끼는 감정은 아니에요. 우리 일을 하는 모든 사람들, 그중에서 특히 배우들한테 더 공감하는 거죠. 내가 못한 걸 해내는 게 부럽고, 너무 대단하게 느껴져요. 왜냐하면 그걸 해내기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잘 아니까요. 선배가 후배한테 격려해 주는 차원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것 같은 마음이 더 커요. 잘하는 사람이 계속 잘하는 것도 힘들고, 어떤 좌절이나 공백을 겪은 뒤 무언가를 해내는 것도 힘든 일이에요. 더욱이 우리 일은 모든 게 드러나는 일이고, 그 즉시 평가받잖아요. 그게 아무리 오래해도 내성이 생기지 않고 정말 두려운 거거든요.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공황이 있어요. 그만큼 자신을 깎아내고 영혼을 짜내서 하는 일이죠. 그런 강렬한 유대감이나 연대감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어느 순간부터 그런 마음을 용기 내서 표현하게 됐어요. 정말 가슴에 꼭 품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잘해냈어’ ‘수고했어’ 그런 인사가 얼마나 눈물 나는 위로인지, 저는 알잖아요. 우리끼리라도 그런 마음을 공유해야 버텨내고 또 할 수 있거든요.어디선가 만났을 때 포옹해 주거나 손 키스를 해주는 사람은 생각보다 흔치 않죠. 김혜수에겐 이런 것들이 어쩜 그렇게 자연스러울까요 제가 외국에서 오래 살았거나 우리 집이 교포 집안인 건 아니에요(웃음). 형제가 많고 서로간의 유대가 아주 깊었어요. 안아주고 뽀뽀하는 스킨십이 너무 자연스러웠어요. 어떤 때는 백 마디 말보다 그냥 손 한 번 잡아주고 꼭 안아주는 게 더 마음에 와닿을 때가 있잖아요. 우리가 만나면 인사하고 헤어지기 바빠서, 그렇게 말할 시간이 많지 않고요. 가까운 분들이 그런 얘기를 하거든요. 네 마음은 알겠는데 그래도 상대는 준비가 안 돼서 당황할 수 있다고. 근데 저는 그냥 제 마음이 그런 거예요. 어떤 상대를 만나거나 상황이 되면, 저도 모르게 벌써 그렇게 움직여요. 살아오면서 저한테 너무 체화된 표현 방식 중 하나여서, 조심해야지 싶다가도 금방 까먹어요.

깊은 V네크라인의 톱과 플리츠 장식의 시폰 스커트는 모두 Ralph Lauren Collection.

오늘 드레스부터 수트까지 다양한 의상을 소화했어요. 여전히 패션에도 관심을 많이 두나요 당연히 그렇죠. 트렌드에 용이한 체형은 아니여서, 제 체형에 맞게 입긴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관심을 갖고 있어요. 나한테 적용시키진 않아도 트렌드 흐름 같은 건 알아둘 필요가 있죠. 단순히 재미도 있지만 그런 것들이 이를테면 영감을 줄 수도 있고, 대중의 기호가 움직이는 걸 본다는 점에서 제가 하는 일과 무관하지도 않거든요.

여성 주체적인, 건강한 의미의 ‘섹시미’를 전파한 스타이기도 합니다. 한때 집요하게 받던 ‘노출’에 대한 질문에 늘 당당하게 “표현의 자유, 개인의 취향”이라고 답했던 모습이 기억나요 섹시하다는 건, 일대일로 마주하지 않으면 절대 경험할 수 없는 감정이에요. 시각적인 섹시함은 1차원적인 것이고요, 제가 생각하는 섹시함은 훨씬 주관적이고, 내밀하고, 정형화되지 않은 거예요. 드레스를 입을 때는 아무 의도가 없어요. 그냥 그날 제 기분, 제 취향인 거예요. 배우란 스크린이나 브라운관에서 모든 것을 총동원해서 자신만의 고유성을 창출해야 하는 사람인데, 시상식 날 드레스 하나 자신의 스타일대로 못 입는다는 건 너무 이상하지 않아요? 우리가 개인의 취향이나 개성을 진정으로 존중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부분이에요. ‘나이에 맞게 입었으면 좋겠다’는 얘기도 많이 하는데, 그건 누가 정하는 거죠? 나도 남도 불필요하게 너무 옭아매는 것 같아요.

김혜수란 사람이 열심히 일하고, 원하는 대로 입고,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모습만으로도 어떤 이들에겐 영감을 주고 응원이 됩니다. 많은 이들의 삶의 모델, 인생의 멘토란 걸 실감하나요 어떤 사람한테 좋은 모습을 하나 보면, 계속 좋은 걸 발견하고 싶고 기대하는 심리가 있잖아요. 저한테도 어느 순간 그게 적용된 것 같아요. 사실 저는 그렇게 근사한 사람은 아니에요. 일관성이 없고 부실한 면도 많아요. 좋은 선배로서 끊임없이 훈훈한 미담을 자아내는 그런 이미지의 멘토라면 굉장히 부담스러워요. 제가 원하는 바도 아니고요. 그런 시선 역시 어떻게 보면 저를 옭아매는 것 같아요.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해 평소 지키려는 루틴이 있나요 몰두하는 일을 하다 보니까, 일을 안 할 때는 최대한 풀어져 있어요. 운동도 잘 안 해요. <굿바이 싱글>을 하기 전, 살을 빼야 해서 식단 관리도 하면서 처음으로 운동을 해봤어요. 힘든 단계가 지나면 그 다음에는 개운하고 활력이 생긴다는데, 저는 오히려 운동하고 나면 하루 컨디션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요즘 요가가 좋아졌어요. 시작한 지는 1년이 좀 넘었는데, 횟수로는 그리 많이 못 나갔어요. 1주일에 한 번 할 때도 있고, 한 달에 한 번 할 때도 있어요. 게을러서 일부러 시간 내서 운동하는 걸 싫어해요. 그런데 요가는 운동이 아니라 수련이라더군요. 정말 마음의 평안을 주는 것 같고, 체력도 좋아지는 걸 느껴요. 꾸준히 하고 싶어요.올해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아름다운 장면을 꼽아본다면 청룡영화제에서 한지민 씨가 수상 소감을 하던 장면이 생각나요. <미쓰백>으로 상을 탔지만, <미쓰백> 이전에 그녀가 오랫동안 노력했던 과정을 알거든요. 더 대접받고 예쁨 받을 수 있는 길을 양보하면서, 정말 많은 시도들을 했다는 걸. 너무 많이 울고 목소리가 떨리는 와중에도 차분하게 진심을 담아 말을 이어가는 모습이 감동적이었어요. 개인적으로 지민 씨를 좀 알게 됐는데, 배우로도 좋지만 진짜 예쁜 사람이에요. 수상 소감만으로도 아름답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았을 거예요. 또 하나는 해외에 가서 난민 아이들을 만난 일이에요. 고향도, 집도 잃은 난민 가족의 한 여자아이가 나한테 머리끈 하나를 주더라고요. 먹을 게 없는 와중에 외국에서 손님이 왔다고 과일을 내어주고, 애기들이 내 손을 막 만져주는데…. 저한테는 너무도 아름다운 순간이었어요.

난민 관련 다큐멘터리에 참여하고 아동 후원이나 미혼모 돕기 등 다양한 일에 관심을 두고 있는 걸로 압니다 제가 아는 한도에 있어서는 모두 관심이 있어요. 저는 사실 혜택을 많이 받는 삶이잖아요. 개인적인 시간을 훨씬 더 용이하게 쓸 수 있다 보니까, 그런 시간을 나를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 쓰고 싶어요. 저는 무언가 기회가 되면 일단 하는 편이에요. 하고 나서 판단해요. 지인끼리 입양을 기다리는 아이들을 위한 보호시설을 찾기도 하고, 동물 보호와 관련된 모임도 있어요. 일단 아무런 선입견 없이 참여해요. 하고 나서 만약에 문제의식이 생기면 문제 제기를 하고, 지속적으로 해야 될 건 어딘가 적을 두고 드문드문이라도 이어가려고 해요.

레이스와 크리스털로 장식한 벨벳 점프수트는 Self-Portrait by Net-A-Porter.

화이트 턱시도 셔츠는 Boss. 블랙 턱시도 재킷은 Alexander McQueen by Mue. 팬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블랙 페이턴트 펌프스는 Gianvito Rossi.

아직 해보지 않은 일 중에 언젠가 꼭 도전해 보고 싶은 것이 있나요 몰라서 안 해본 것들이야 많죠. 지인 중 한 명이 VR 게임방에 갔다는데, 저도 너무 해보고 싶더라고요. 나 좀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어요. 여행지 중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친구들과 시간 맞추기가 어려워서 미루고 있는데, 이상하게 혼자 가기는 싫더라고요. 20~30대에는 저 혼자 여행 많이 했거든요. 혼자 여행 가면 엄청 근사할 거 같잖아요? 해프닝도 많을 것 같고, 길 나가면 멋진 남자가 말 걸어줄 것 같죠? 그런데 그런 일은 별로 없어요(웃음). 외롭고 너무 심심해요.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잘 몰라요. 그냥 세상 끝이고 멀다는 것밖에. <해피투게더>라는 영화를 좋게 본 기억은 있어요. 잘 모르기 때문에 느껴지는 낭만 같은 게 있나 봐요. 여기서 내가 현실적으로 경험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아직도 그런 꿈을 꾸는 거죠. 막상 가봤더니 영화는 역시 영화라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어떤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나요? 최근 반하게 된 인물이 있다면 사람마다 반하는 포인트가 달라요. 애인들을 봐도 일관성이 하나도 없고, 가장 친한 친구들도 하는 일부터 세계관이나 취향, 다 달라요. 최근에 반한 사람이라면…. 친구를 통해 굉장히 좋은 어른 두 분을 알게 됐어요. 노부부라고 할 수 있는데, 그분의 마인드가 전혀 노부부 같지 않았어요. 식사 자리에서 그분들과 나눴던 얘기들이 너무 좋았어요. 내가 나이만 먹었지 과연 어른인가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그래서 좋은 어른을 알게 되면 어떻게든 놓치고 싶지 않은 생각이 들어요. 아, 랄프 로렌을 만난 일도 있었네요. 뉴욕에서 열린 랄프 로렌 50주년 기념 패션쇼를 다녀왔어요. 오랜만에 쇼 보러 간다고 가볍게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한 엄청난 감동이 있었어요. 다양한 세대와 인종의 모델이 등장했는데, 모든 것에 하나하나 신경 쓴 마음이 느껴졌어요. 쇼가 끝나고 랄프 로렌을 잠깐 따로 보는 시간이 주어졌는데, 몇 분 안 되는 시간이지만 로렌이란 인간 자체에서 오는 감동이 있었어요. 언어권이 다르고 나는 패션 종사자도 아닌데 그렇게 짧은 대면 속에서도 감동을 줄 수 있는 건, 그분이 특별하기 때문일 거예요. “오래오래 굳건하게 해주세요.” 이런 말을 나도 모르게 했던 것 같아요. 이 역시 올해의 아름다운 순간이기도 하네요.

저도 지금 김혜수란 배우에게 같은 말을 하고 싶어요. 오래오래 굳건하게 해주세요 배우로서 최종 목적이 뭐냐고 묻는다면, 없어요. 어릴 때부터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어떤 배우가 되고 싶나, 배우로서 네 목적은 뭔가. 그런 질문을 받으면 뭔가 생각해서 만들어야 하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잊히지 않는 배우가 되고 싶다, 매번 변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 그런 말을 하기도 했는데, 다 가짜예요. 정직하게 말하면, 잘 모르겠어요. 국민배우가 되고 싶다는 소망도 없고, 칸에 진출해서 영광을 누리겠다는 꿈도 없어요. 그냥 지금 할 수 있는 걸 최선을 다해서 잘하고 싶어요. 언제까지 일할지도 모르겠고 결국 목적 없이 끝날 수도 있지만, 그 자체로 의미 있을 수도 있고요. 설령 아무것도 아닌 게 될지라도 나는 괜찮을 것 같아요.

새해 인사에 담고 싶은 바람이 있나요 나도 그렇고 <엘르>를 보는 분들도 좀 더 웃었으면 좋겠어요. 생각보다 우리가 잘 웃지 않아요. 저는 종교가 없지만 누군가를 향해 마음으로 기도할 때가 있어요. 내가 아는 혹은 나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한 번이라도 더 웃었으면 좋겠다고. 뭐 때문이든 의미가 없으면 어때요, 그냥 웃는 거 자체로 충분히 가치 있다고 생각해요.

사진 김영준

스타일디렉터 정윤기

패션에디터 정장조

피처에디터 김아름

스타일리스트 김보람, 서혜지(Intrend)

헤어 조영재

메이크업 홍랑(Avecnous Beauty)

장소 Conrad Seoul

디자인 전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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