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때문이야!" 광화문 현판이 '검은색 금동판'이었던 이유

이기환 선임기자 2018. 12. 27.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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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경복궁 전각 현판의 현재 모습과 <경복궁 영건일기>를 통해 김민규씨가 편집해서 복원한 모습. |김민규씨의 논문에서

‘불을 제압하라!’ 광화문, 근정전, 경회루 등 경복궁의 큰 전각에 붙인 현판은 원래 ‘검은색 바탕’이었고, 그 이유는 ‘화재방지용’이었다는 역사 기록이 확인됐다. 특히 광화문의 현판은 금색동판으로 특별히 제작한 것으로 확인됐다.

석조미술사를 전공한 김민규 씨(동국대 미술사학과 박사과정 수료)는 27일 국립고궁박물관이 발간한 학술지 <고궁문화> 최신호에 발표한 논문 ‘경복궁 영건일기와 경복궁의 여러 상징 연구’에서 “일본 와세다대에 있는 ‘경복궁 영건일기’를 분석한 결과 광화문 현판 색상이 검정 바탕에 금색 글자라는 기록을 찾았다”고 밝혔다. <경복궁 영건일기>는 경복궁을 중건하기 시작한 1865년 4월부터 완공된 1868년 7월까지의 공사 기록이다. 이 일기에는 날짜와 날씨, 강우량 등을 기록하고, 각 날짜에 해당하는 하교(下敎·임금의 명령), 계사(啓辭·공사와 관련되어 임금에게 아뢴 말), 관문(關文) 및 이문(移文·기관끼리 오간 공문서), 공사진행상황, 원납전, 일꾼, 자원군 등이 빠짐없이 기록돼있다. <경복궁 영건일기>는 일본 와세대대(早稻田大)에만 9책 9권으로 이뤄진 완질이 있다고 알려져있다. 서울대 도서관에는 1865년 6∼9월에 해당하는 권2 한 책만 전한다.

물 水자를 새겨넣은 은제 육각판. ‘6’자 역시 물을 뜻한다.(왼쪽) 물 수(水)자에는 ‘물의 신’인 용(龍)자를 1000여자나 새겨놓았다.(오른쪽)

와세다대가 소장한 영건일기의 전각 현판을 분석한 김민규씨는 광화문, 근정전, 경회루, 교태전, 강녕전, 근정문, 건춘문, 신무문 등의 현판 바탕색은 모두 검은색이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특히 1867년(고종 4년) 4월21일 <경복궁 영건일기>에 “교태전·강녕전 현판의 묵질금자(墨質金字·검은 바탕에 금색글자)로 했다”는 기록과 함께 각주에 “경복궁의 각 전당은 모두 흑질(검은 바탕)로 했고 이는 불을 제압하는 이치를 취한 것(皆爲墨質 取制火之理)”이라고 부연설명돼 있었다. ‘검은 색’은 ‘북 현무(北 玄武)’에서 보듯 음양오행 중 ‘북쪽과 물(水)’을 상징한다. 실제로 <영건일기>에 등장하는 각 전각의 현판 바탕을 보면 교태전과 강녕전 뿐 아니라 광화문·근정전·경회루·강녕전·근정문·건춘문·신무문 등이 모두 검은색으로 되어 있다. 김민규씨는 “이 전각들이 화재에서 무사히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검은 바탕으로 현판을 칠한 것”이라 설명했다.

이중 특히 2010년에 ‘흰색 바탕에 검은색 글씨’로 복원한 광화문 현판의 경우 지속적인 ‘색깔논쟁’에 휘말려왔다,

그러다 올해 초 문화재청은 ‘현재의 광화문 현판 색깔이 틀렸다’고 인정한 바 있다. 2010년 ‘흰색바탕에 검은색 글씨’로 복원한 것이 잘못됐다는 것이었다. 문화재청은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 소장 광화문 사진(1893년) 등을 토대로 과학적 분석을 해보니 검은 바탕에 금색 글씨가 맞는 것 같아서 다시 고치겠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원래부터 스미소니언 박물관까지 갈 것도 없었다.

궁중화사 출신의 안중식(1861~1919)의 ‘백악춘효(白岳春曉)’(1915년 작)에는 광화문 현판의 바탕이 검은 색으로 보인다. 또 1940년 서양화가 심형구(1908~1962)가 그림엽서에 그려 유통시킨 광화문 그림에도 어두운 바탕에 밝은 색의 글씨가 나타난다.

육각판을 싼 종이에도 묘(묘)자를 새겨넣었다.

이번 김민규씨의 논문은 이런 증거들과 함께 <경복궁영건일기>라는 공식기록에서 광화문 등 경복궁 전각들의 색깔을 확인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특히 김민규씨는 광화문 현판이 근정문 현판과 함께 단순히 ‘검은 색 바탕에 금색글씨’가 아니라 ‘금동판(金銅版)’으로 제작했음을 처음으로 확인했다. 즉 1865년(고종 2년) <경복궁영건일기>를 보면 “광화문 현판은 동으로 만들고(以片銅爲畵), 10품금 4량을 거듭 칠했으며, 근정전 현판도 동편으로 획을 만들고 금 3량 8전8푼으로 거듭 칠했다”고 기록했다.

안중식의 1915년 작품인 ‘백악춘효’(2점) 에서 보이는 광화문 현판. 바탕이 어두운 색임을 금방 알 수 있다. |강임산의 ‘1968년 광화문 복원의 성격’, 명지대 석사논문, 2015에서.

김민규씨는 “광화문·근정전 현판은 금동판을 글씨 모양으로 자른 뒤 금을 칠한 것임을 알 수 있다”고 풀이했다. 반면 경회루와 교태전, 강녕전은 동판이 아니라 나무판에 글자를 조각하고 금박을 입힌 방법을 썼다고 전했다.

김민규씨의 논문이 웅변하듯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의 ‘화두’는 ‘화재예방’이었다.

사실 경복궁을 처음 세운 조선초부터 풍수학상 ‘화기(火氣)’를 잠재우는 것이 관건이었다. 차천로(1556~1615)의 <오산설림>에 재미있는 야사가 전해진다. “한양의 진산을 인왕산으로 잡고 북악과 남산을 좌우의 청룡백호로 삼아야 한다”는 무학대사(1327~1405)와 “자고로 제왕은 남면(南面·남쪽을 향해 앉아 다스려야 한다는 뜻)한다”는 정도전(1342~1398)의 논쟁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이때 정도전의 주장이 통하자 무학대사는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200년이 지나 반드시 내 말을 생각할 때가 있을 것”이라 불길한 에언을 했다.

심형구가 1940년 그림엽서 유통용으로 그린 ‘광화문’. 현판의 바탕색이 검은색임을 알 수 있다.|강임산씨 제공

무학대사는 왜 걱정을 했을까. 경복궁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관악산 때문이었다. 관악산은 얼핏 보아도 불이 활활 타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풍수상 관악산은 불의 산이다. 그 불의 산으로부터 뻗어나는 화기(火氣)를 다스리지 않으면 안됐다. 이름도 숭례문(崇禮門)이라 지었다. 예의를 숭상한다는 뜻도 있었지만, ‘예(禮)’자는 오행(五行)으로 치면 ‘화(火)’를 일컬었다. 또 오방(五方)으로는 남쪽을 나타냈다. 이 숭례문의 현판을 가로가 아닌 세로로 세운 것도 바로 관악산의 화기 때문이었다. 즉 나무나 종이를 태울 때 잘 타라고 세우는 게 보통이다. 숭례문 현판을 세로로 세운 까닭이다. 세로로 세워놓음으로써 맞불을 놓은 것이다. 그것을 ‘이화제화(以火制火)’라고 할까. 현판을 세로로 세웠으니 ‘관악산이나 활활 타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무학대사의 예언대로 경복궁은 여러차례 화마에 휩싸인다.

1553년(명종 8년) 경복궁은 근정전만 남긴 채 편전과 침전 구역이 모두 소실됐다. 강녕전, 사정전, 흠겸각이 불탔고 각종 금은보화와 왕·왕비의 고명과 의복, 거마가 잿더미가 됐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선조 25년) 5월에는 또 한 번 불바다가 된다. 파죽지세로 쳐올라가던 왜군이 평양성 전투 패전 이후 퇴각하면서 벌어진 참화였다. 왜군은 궁궐과 종묘를 불태운 뒤 약탈과 살육을 자행한다. 무학대사가 예상했다는, 바로 그 200년이 지난 것이다. 경복궁은 그 뒤 270년이 지나도록 중건되지 못했다.

1865년(고종 2년) 흥선대원군(1820~1898)이 황폐한 경복궁을 중건했다. 이 과정에서 화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별의별 수단을 다썼다.

경복궁 경회루 연못에 ‘혀를 쑥 내밀고 콧수염을 동그랗게 만, 해학적인 형상의 청동용(龍)’을 넣었다. 역시 화재예방 차원이었다. 1865년 8월30일 <경복궁 영건일기>를 보면 “두마리 용 중 한 마리의 배에 ‘대청 동치 4년 을측년(1865년) 임오월(壬午月) 임술일(壬戌日)’에 시작해서 9월10일 임신(壬申)에 몸을 합쳐 한쌍을 주조했다”고 기록했다. 간지 ‘임(壬)’의 상징은 북쪽이고 물을 상징하는 괘(卦)와 동일한 의미이다. 게다가 용이라는 상상의 동물은 ‘물의 신’으로 알려져 있다. 경회루의 모든 구성은 숫자 ‘6’으로 이뤄졌는데, 이 역시 물과 관계돼있다. 음양오행으로 보아 음(陰)은 물(水)을 말하는데, 그 음의 대표적인 숫자가 6이라는 것이다.

이것도 모자라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근정전의 종도리에서 상량문(중수가 끝았음을 알린 문서)과 함께 물(水)과 용(龍)으로 도배한 부적 3점과 육각형판 5점을 모셔두었다. 특히 깨알같은 글씨로 ‘물의 신’인 ‘용’ 자를 1000자나 메워 쓴 수(水)자 부적을 두 장이나 두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육각형 은판 5점 역시 흥미를 자아냈다. 1점 당 폭 3.6㎝, 두께 0.25㎝의 육각형 은판의 모서리마다 물 수(水)자가 새겨져 있었다. 왜 육각형인가 하면 물은 음양오행상 음(陰)이며, 음의 대표적인 숫자는 ‘6’이기 때문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육각형 5점을 붙여보면 물 水자가 3개 모여 묘(묘)자가 된다는 것이다. ‘묘(묘)’ 자는 ‘물이 아득하다’, 혹은 ‘수면(水面)이 아득하게 넓다’는 뜻이다. 은판을 싼 종이에도 묘(묘)자를 써놓았다. 이외에도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에 물귀신을 의미하는 해태상을 세워놓았다. 흥선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화재를 막으려 경회루와 연못을 만들었고, 청동용에 해태, 그리고 갖가지 물(水)를 상징하는 부적까지만들었다는 것이다.

김민규씨는 “여기에 <경복궁 영건일기>를 통해 광화문 등의 주요 전각 현판의 바탕색까지도 ‘북쪽’과 ‘물’을 상징하는 ‘검은 색’을 썼다는 것을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면서 “차제에 문화재청이 추진중인 새로운 광화문 현판 단청도 금동판에 금칠하는 방식으로 변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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