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에 가다⑦] 남극 취재 수난기, '순간의 선택, 일주일의 고립'

양예빈 입력 2018. 12. 29. 14:06 수정 2019. 1. 10.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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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에 가다]
KBS 사회부 기획팀 막내 기자가 연재하는 남극 취재기입니다. KBS 신년기획으로 추진되는 남극 취재는 80일 이상이 걸리는 장기 여정입니다. 아라온호와 함께한 항해 열흘 후 남극 장보고 기지에 도착해 현장에서 취재를 하고 있습니다. 뉴스 리포트 속에는 담지 못하는 취재기를 온라인 기사로 연재합니다. 남극 여정에 궁금한 점을 댓글로 남겨주세요. 남극 장보고 기지에 머물고 있는 양 기자에게 전달됩니다.

운수좋은 날
그런 날이 있다. 유난히 날이 좋고, 해가 맑은 날. 모든 것이 내 마음 먹은대로 될 것 같은 날. 남극에서도 그런 날이 있었다. 그날은 날씨가 유난히 화창했다. 궂은 날씨 때문에 한동안 헬기 이륙을 할 수 없어 미뤄왔던, 이탈리아 기지 방문을 했다. KBS 촬영팀은 이탈리아 기지의 따뜻한 환대를 받으며, 맛있는 이탈리아식 식사를 했다. 후식으로 나온 젤라또는 참으로 달콤했다. 우리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그저 하하호호 웃으며 남극의 오늘을 즐겼을 뿐.

이탈리아 대원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뭔가 이상했던 그때.
남극에서는 몇몇 팀들이 캠프라는 것을 한다. 음식물을 싸들고, 텐트를 치고 기지에서 먼 곳에서 며칠 동안 연구 작업을 지속한다. KBS팀은 빙하를 시추하기 위해 떠난 빙하팀을 취재하기로 했다. 마침 헬기가 뜰 수 있는 날이기에, 이탈리아 기지 방문을 마친 뒤 빙하팀 캠프로 이동하기로 했다. 그런데 대장님이 갑작스럽게 한 말씀을 하셨다.

"빙하팀이 갑자기 철수를 결정해야 한다고 합니다. 날씨가 안 좋아서 그 쪽이 좀 힘든 상황이래요."

원래 1월초까지 예정되어있던 빙하팀 캠프였기 때문에 지금 철수한다면 취재를 못하게 된다. 깜짝 놀란 취재팀은 한 컷이라도 담아야된다는 생각에 헬기를 타고 빠르게 빙하팀으로 갔다.

빙하팀에서 꾸린 캠프


헬기에서 내려보니 온통 새하얀 설원에 눈보라가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다. 헬기 파일럿은 날씨가 너무 안좋다고, 5분안에 헬기를 다시 띄우지 않으면 빠져 나갈 수 없다고 말했다. '아직 촬영 못 했는데..어쩌지?'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떠나질 않는데, 그때 갑자기 촬영기자 김대원 선배가 말했다.
"양 기자. 여기 캠프 텐트 한 자리 남는대. 내가 하루 남아서 찍을게."
그 말을 듣고, 나는 "저도 같이 남겠다", 다른 촬영기자 선배는 "제가 남겠다"고 말했지만, 허락된 자리는 한 자리뿐. 일단 취재기자보다는 방송화면을 찍을 수 있는 촬영기자가 남아있어야 해서, 김 선배를 남겨두고 우린 다시 헬기로 돌아왔다.

하루면 될 줄 알았어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하루면 될 줄 알았다. 하루 뒤에 헬기가 뜰 줄 알았다. 하루가 이틀이 되고, 하루 하루 지나 어느덧 일주일이 됐다. 남극의 하늘은 헬기 이륙을 허락하지 않았다. 무전 속 김 선배의 목소리, "나는 괜찮아. 인터뷰 뭐하면 되니?" 하지만 떨렸다.
철수를 계획한 빙하팀도 헬기가 뜨지 않으니 철수할 도리가 없었다. KBS 촬영팀과 빙하연구팀은 남극의 설원 한복판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았다.

추위로 식기가 얼어붙었다


갑자기 남은 터라 김 선배는 눈에서 다닐 때 꼭 필요한 설상화도, 침낭도, 심지어 치약도, 여벌 옷도, 아무것도 없었다. 연구팀의 남는 일회용치약을 빌려쓰며, "이 치약 다쓰기 전엔 가겠지"라고 했지만...결국 치약을 다 쓰고 난 뒤에도 돌아오지 못했다.

그때의 빙하팀에서는 무엇을 했나

빙하팀이 시추를 하고 있다


빙하팀은 빙하를 시추해 연구하는 일을 하는데, 당시 날씨가 너무 안 좋아서 시추를 계속 진행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한다. 텐트에서 고립되어, 바깥을 보며 헬기가 뜨기만을 기다렸다고 한다. 해가 지지 않는 백야를 견디기 위해, 끝없는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갑자기 합류한 KBS 촬영 기자에게 취재 뒷이야기나 오지 취재 경험 등을 듣기도 했다고 한다. 보통 캠프를 하면 씻지를 못한다. 빙하팀은 2주동안, KBS 촬영 기자는 1주일간 샤워는 물론 세수도 하지 못했다. 내리쬐는 남극의 강렬한 태양과, 그 태양빛을 반사하는 새하얀 눈에 다들 얼굴이 시커멓게 타버렸다.

지친 대원들의 모습


하지만 또 춥기는 엄청 추워서 보온병에 물을 담고 안고 잠들지 않으면, 잠조차 들 수 없다. 물도 마음껏 먹지 못했다고 한다. 물과 음료수가 있었지만 간이로 설치한 화장실로 가는 길이 너무 추워서, 다들 뭔가를 마시는 것도 자제했다고 한다. 고립됐던 김 선배에게 "선배는 거기서 무엇을 하셨어요" 라고 물어보니, "나는 주방 보조했지. 피해주면 안되니까 재빠르게 할 일을 찾아 움직였어."(역시 연륜은 다르다). 크리스마스 당일에도 그저 무사히 이곳에서 나갈 수 있기만을 간절히 바랐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김 선배에게 깊은 죄송함을 느꼈다. 기지에선 따로 크리스마스 파티가 열렸었다...)

식사 준비를 돕는 KBS 김대원 촬영 기자


마침내 돌아오다
김대원 선배가 고립된 지, 일주일만에 다시 남극 하늘은 헬기를 허락했다. 헬기가 떴고, 빙하팀은 돌아왔다. "선배!!" 나는 기쁘게 김 선배와 빙하팀을 맞았다. 김 선배가 고립됐던 1주일, 쉬어도 쉬는 기분이 아니었다. 남극은 참 신비로운 곳이다. 기지에서 대원들과 얘기하면서, 이제 여기가 너무 익숙해져서 남극인지 스키장인지 모르겠다고 농담 반으로 얘기한 적도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너무도 확실하게 '이곳은 남극이다'라며 자연의 무서움을 알려준다. 한 순간도 긴장을 풀 수 없고, 긴장을 놓아서도 안된다.

아름답지만, 두려운 남극


지지않는 태양이 있는 곳. 끝없는 설원이 있는 곳. 자연의 힘을 어느 때보다 강하게 느낄 수 있는 곳, 남극이다.

KBS 김대원 기자가 1주일간 고립되면서 촬영한 빙하팀의 캠프 화면은 새해 KBS 뉴스를 통해 방영된다. 많은 시청을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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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예빈 기자 (yeah@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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