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공대 고문에 먼 두눈..'독한 년' 덕에 마을이 살았다

2019. 1. 3.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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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70주년 기획, 동백에 묻다⑫
애월읍 수산주민들 살린 '4·3 의인' 양경숙씨
산에 오른 주민 대라는 닦달에도 '모르쿠다'
4·3 때 고문받아 눈멀고 손가락 뒤틀려
남동생 둘은 행방불명돼 생일에 제사 지내
양경숙 할머니가 4·3 때 겪은 일을 이야기하며 울먹이고 있다.

‘바른말 하라’고 다그쳤다. 1948년 12월 어느 날, 애월면 신엄지서에서 파견된 경찰과 특공대원들이 양경숙(96·당시 26)을 파견소로 사용하는 초가로 끌고 갔다. 수산리 경찰파견소 경찰관과 경찰 보조원들이었다. 이들은 양씨를 작은 상자에 올라서게 했다. 양씨는 품에 안겨 잠든 5살 딸(강맹수)을 옆에 눕히고 상자에 올랐다. 특공대원들이 양씨의 팔을 뒤로 꺾고 포승줄로 묶어 초가의 들보에 매달았다. 이들은 상자를 걷어찼고, 팔이 뒤로 꺾인 양씨 몸이 허공에 떴다.

“집에서 ‘회의’할 때 어떤 놈들이 왔다 갔는지 바른말 하라”, “폭도들에게 무엇을 줬느냐”는 닦달과 함께 모진 고문이 이어졌다. 허공에 매달린 양씨의 양쪽에서 총구를 들이댄 채 “말하지 않으면 죽는다. 딸을 살리려면 바른말 하라”고 매질을 하기도 했다. 양씨가 기절하자 손목을 묶었던 줄을 풀었다. 이번에는 또 다른 특공대원 한 명이 밖으로 끌고 가 양씨의 목에 총을 겨눈 채 온갖 협박을 하다 공포탄을 쏘기도 했다. 그래도 양씨는 입을 열지 않았다. 이들은 양씨를 ‘독한 년’이라며 풀어줬다.

산에 오른 주민 말하라며 고문…평생 후유증에 시달려

지난 30일 제주시 애월읍 수산리에서 만난 양씨는 4·3 이야기를 하는 내내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옆에 있던 딸 강맹수(75)씨는 그런 어머니를 안타까운 듯 바라봤다. 양씨의 부모는 ‘수산리 일등 부자’였다. 강씨는 “마을에서 외가 땅 밟지 않으면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부자였다고 한다. 집이 안거리(안채)와 밖거리(바깥채), 모커리(별채)가 있고, 커서 동네 사람들이 자꾸 놀러 오곤 했다. 당시 놀러 왔던 주민들이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집에 사람들이 모였다고 경찰에 말해 엄마가 잡혀갔다고 들었다”고 했다. 경찰은 “사람들이 산에 올라가는 회의를 했는데 왜 말을 하지 않느냐”며 양씨를 고문했다.

양경숙 할머니가 4·3 때 겪은 일을 이야기하고 있다.

토벌대가 자주 마을에 들어올 때마다 중산간 지역에 가까운 수산마을 주민들은 피신을 다녀야 했다. 양씨는 집 마당에 세워둔 멍석에 들어가 둘둘 말아 몸을 숨기거나, 딸과 함께 한라산 중턱의 굴에 마을주민과 함께 피신해 며칠 동안 굶으며 지내기도 했다.

양씨의 고난은 파견소 고문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경찰관들이 들이닥쳐 집에 누워 있던 양씨의 손을 뒤로 묶고 신엄지서로 끌고 갔다. 1949년 1월께다. 이들은 “폭도들한테 쌀을 보내지 않았느냐”, “누가 산에 쌀을 보냈느냐”며 고문했다. 파견소에서 당했던 고문보다 더 거칠었다. 이들은 마주 보며 선 채 양씨한테 손을 내놓으라고 한 뒤 “바른말 하라”며 손바닥이 터져 피가 흐를 정도로 몽둥이질을 했다. 손이 부어올랐고 손가락이 부러졌다. 그래도 고문은 멈추지 않았다. 그때의 상처로 양쪽 엄지손가락 주변이 움푹 들어가 버렸다. 양씨는 “산더레 하간거 올린 이년은 죽어야 된 덴 허멍 홀목 다 데와불멍헙디다”(산에 이것저것 올린 이 년은 죽어야 한다고 하면서 팔목을 모두 비틀어버렸어요)라며 울먹였다.

“그때가 음력 섣달이라. 지네도 두드리당 치쳐신지 지서 앞이 큰 낭에 거꾸로 돌아매엉 발창 막 두드리고, 코에 물을 짓는 거라. 경허당보민 정신을 잃어. 지서 앞이 물통이 이서신디 물이 얼어서라. 순경덜이 얼음을 깨멍 정신 잃은 날 잡앙 그 물통더레 처박아. 아이고, 웬수고치 눈이 떠지는 거라. 게민 데려강 또 물고문허고, 때리고 해서. 그때 죽어져시민 얼마나 좋을 거, 무사 못죽어져신고.”(그때가 음력 섣달이야. 자기네도 때리다 지쳤는지 지서 앞에 큰 나무에 거꾸로 달아매 발바닥을 마구 때리고, 코에 물을 붓는 거야. 그러다 보면 정신을 잃어. 지서 앞에 물통이 있었는데 물이 얼었어. 경찰들이 얼음을 깨고 정신을 잃은 나를 잡아서 그 물통에 처박아. 아이고, 원수처럼 눈이 떠지는 거야. 그러면 데려가서 또 물고문하고, 때리고 했어. 그때 죽었으면 아주 좋을 텐데 왜 못 죽었는지)

1942년 1월20일 당시 애월면 신사에서 귀향기념으로 찍은 가족사진이다. 남편과 양경숙 할머니, 남편의 여동생, 어머니와 아버지다.

닷새 동안 매일 지긋지긋한 고문이 자행됐다. ‘바른말 하라’는 경찰의 고문에 양씨는 ‘모르쿠다’(모르겠어요), ‘뭘 알아사 말을 헐 거 아니우꽈’(뭘 알아야 말을 할게 아닙니까)라고 대답했다. 손을 뒤로 묶은 상태에서 나무에 매달아 어깨가 꺾이고, 팔목 뼈도 튀어나왔다. 고문은 양씨의 눈을 멀게 했다. 양씨는 “어릴 때 동네 할머니들이 ‘경숙이는 눈이 밝으니 머릿니가 있는지 봐달라’했었는데, 그 물이 눈에 들어가니까 보이지 않는다. 물이라도 고운(깨끗한) 물이면 좋지만 더러운 물이 들어갔다”고 말했다. 양씨는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말소리로 누군지를 짐작한다.

고문을 받는 동안 양씨는 한 끼도 먹지 못했다. 양씨의 어머니는 우는 손녀(양씨 딸)를 업고 지서에 밥을 해 날랐다. 딸에게 주는 식사가 아니라 고문하는 경찰에 “우리 딸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주는 밥이었다. 양씨에 앞서 잡혀가 수감됐던 다른 마을주민들은 총살당했다. ‘그다음은 나로구나’하며 지내던 양씨는 그렇게 고문을 받다가 풀려났다. 양씨는 “어머니가 돈을 줘서 풀려난 것 같다. 어머니 아니었으면 나는 살지 못했을 것”이라며 북받쳐 울었다.

딸 강맹수씨가 울먹이며 자신의 4·3 체험을 이야기하는 어머니를 안타까운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다.

주민들 살리기 위해 모진 고문 견뎌내

경찰의 고문에도 양씨는 입을 열지 않았다. 산으로 피신했거나, 쌀이나 물건을 올려보낸 사람들의 이름을 불라는 경찰의 고문에도 입을 굳게 닫았다. 자칫 마을 사람들 전부가 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서에서 산에 올라간 사람 일름 고르랜 헐 때 일부러 안고라수다. 그 사람덜 일름 몬 댕 죽여동 나 살앙 뭐 헙니까. 벨 사람이 벨 말을 고라도 나만 죽젠 해수다. 나 입 열앙 놔시민 죽을 사람 하나수다. ‘모르쿠다’라고만 해수다. 그 일름 다 댔다가는 수산리가 망해수다.”(지서에서 산에 올라간 사람 이름 말하라고 할 때 일부러 말하지 않았어요. 그 사람들 이름 모두 말해서 죽여버린 뒤 내가 살아서 뭐합니까. 어떤 사람이 어떤 말을 해도 나만 죽으려고 했어요. 내가 입 열었으면 죽을 사람이 많았습니다. ’모르겠어요’라고만 했어요. 그 이름 모두 말했다면 수산리가 끝났어요.)

양씨가 고문을 받으면서도 굳게 입을 다문 덕분에 주민들은 살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한테서 4·3 이야기를 듣고 자란 딸 강씨는 “3년 전만 해도 동네 할아버지가 나만 보면 항상 ‘네 어머니 때문에 살았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혼자 살려고 이름을 다 말했으면 동네가 거의 초상집이 될 뻔했다고 한다”고 덧붙였다.

양씨는 “집에 돌아오니까 동네 사람들이 찾아와서 ‘이름을 말하지 않아 고맙다’고 했다”고 말했다. 마을 주민들이 성(돌담)을 쌓을 때도 나오지 말고 몸조리하라는 말도 들었다. 그러나 양씨는 그 뒤 평생을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1945년 일본 도쿄의 중앙대학 상업학교를 다닐 때의 양 할머니의 남동생 양창희(왼쪽). 양씨는 1948년 10월 행방불명됐다.

앞길 창창했던 두 남동생은 행방불명

1948년 9월27일은 숙부의 제삿날이자 작은 남동생이 끌려간 날이다. 경찰이 마을에 파견돼 돌아다니자 양씨의 어머니는 어둡기 전에 제사를 빨리 끝내자며, 해질 무렵 제를 지냈다. 그 순간 경찰이 들이닥쳐 작은 남동생(양창범·당시 20)을 잡아갔다. 남동생은 그 뒤 돌아오지 못했다. 하귀중학원에 다니던 작은 남동생을 경찰이 하귀로 끌고 가 고문했다는 소문만 돌았다. 닷새쯤 지난 10월 초, 동생의 소문을 들은 큰 남동생(양창희·당시 23)이 집에 왔다가 친구한테 다녀온다며 나간 뒤 소식이 끊겼다. 4·3은 남동생 둘을 데려갔다. 양씨의 어머니는 아들 둘을 잃고, 딸이 고문당한 뒤 화병을 앓다가 55살에 세상을 떴다.

양씨의 두 남동생은 일제 강점기 때 인근 마을로 유학을 가 방을 빌려 살며 소학교(초등학교)를 다녔다. 양씨는 어머니와 함께 쌀을 짊어지고 남동생들 집을 찾아가 밥과 반찬을 해주곤 했다. 밭 팔아 공부시킨 큰 남동생은 일본 도쿄와 서울에서 유학 한 인텔리였다. 해방 무렵에는 수산리 청년들을 모아 한글을 가르치기도 했다.

“남동생들 생각허민 누워도 눈물나곡, 그 남동생들 하나만 살아시민 나가 무사 이추룩 살아.” 양씨는 또다시 울었다. 양씨는 해방 전 일본에서 3년을 살았다. 남편(강재익)이 도쿄에서 직장생활을 한 덕에 안정적인 삶을 살았다. 해방되자 일본 도쿄에 살던 양씨 부부는 8개월 된 딸을 안고 잠시 고향에 다녀가기 위해 귀국선에 올랐다. 고향에 왔던 남편이 먼저 일본으로 간 뒤 뱃길이 끊겼다. 양씨는 남편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양경숙 할머니

“4·3은 나 신디만 오라수다”

양씨는 해마다 4월3일이면 제주4·3평화공원을 찾는다. 딸 강씨는 “제대로 보지도 못하는 어머니가 공원만 가면 행방불명된 남동생들 표석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데, 걸음이 얼마나 빠른지 모른다. 나도 쫓아가지 못할 정도로 비석까지는 가는 걸 보면 대단하다”고 말했다. 양씨는지난해 4월3일 제70주년 4·3추념식 때는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 옆에 앉기도 했다. 오는 4월3일에도 4·3평화공원을 찾겠다고 한다.

모진 고문에도 주민들을 살리기 위해 입을 열지 않았던 자그마한 체구의 양씨는 ‘4·3 의인’이다. “그게 사람 살 때 시절이우꽈. 호꼬만 뜰리민 죽어수다. 소삼은 몬딱 나 신디만 오랑, 이추룩 얼먹어질 줄 누게가 알아수과”(그게 사람 사는 시절입니까. 조그만 다르면 죽었어요. 4·3은 모두 내게만 와서 이렇게 힘들 줄을 누가 알았겠어요)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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