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 의미 왜곡" 국방부 '양심적 병역거부' 용어 변경 논란

이혜리 기자 2019. 1. 6.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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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국방부가 대체복무제를 만들면서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용어를 갑자기 ‘종교적 신앙 등에 따른 병역거부’로 바꾼다고 밝혀 논란이 일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개인의 고유한 결정이라는 헌법상 양심의 자유의 의미를 왜곡하고, 비폭력·평화주의 등 종교에서 비롯되지 않은 형태의 양심적 병역거부를 배제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비판이 나온다. 시민단체들은 국방부에 용어 변경을 즉각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헌재·대법도 ‘양심’ 쓰는데 국방부만 왜?

최현수 국방부 대변인은 지난 4일 “대체복무제 용어를 둘러싼 불필요한 논란을 최소화하고 국민적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앞으로 ‘양심’, ‘신념’, ‘양심적’ 등과 같은 용어는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허용하는 헌법재판소 결정과 대법원 판결 이후 “군대 간 나는 그럼 비양심적이냐?”는 비판이 빗발쳐 어쩔 수 없이 용어를 바꾼다는 게 국방부 설명이다. 양심적 병역거부자 당사자들은 물론 국가인권위원회나 관련 시민단체들도 오랫동안 용어 문제를 고민해왔지만 바꾸지 않던 것을 국방부가 일방적으로 바꾸겠다고 선언해버렸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군인권센터, 참여여대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지난달 28일 서울 국방부 앞에서 이날 국방부가 발표한 양심적 병역거부 대체복무제 정부안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용어 변경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일단 헌법 제19조에서 규정한 양심의 자유의 의미를 왜곡한다. 헌재와 대법원은 지난해 양심적 병역거부 관련 결정과 판결에서 똑같이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면서 양심이 무엇인지 상세히 설명했다. 이에 따르면 양심은 단순히 선량하다거나 올바르다는 의미가 아니다.

헌재는 2002년 양심에 관해 “헌법 제19조에서 보호하는 양심은 ‘착한 마음’ 또는 ‘올바른 생각’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판단을 추구하는 가치적·도덕적 마음가짐을 뜻한다”고 규정했다. 또 대법원은 지난해 판결에서 “양심은 어떤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 그렇게 행동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인격적 존재가치가 파멸되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로서 절박하고 구체적인 것”이라고 했다.

안재훈 울산지법 판사의 경우에는 양심적 병역거부자에게 무죄를 선고하면서 “주로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표현을 쓰나 일반인에게는 이는 마치 병역을 거부하지 않으면 양심이 없는 사람이라는 뉘앙스를 주므로 적절한 표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밝힌 적이 있다. 안 판사가 대체해 쓴 표현은 ‘종교적 신념에 따라 헌법상 양심의 자유를 이유로 한 병역거부’였다. 여기서도 ‘양심’은 빠지지 않았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로만 바꿔도 오해의 소지를 줄일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한 법원 관계자는 “헌법에 양심의 자유가 명시돼있는데 논란이 있다고 용어를 바꾼다면 헌법도 바꿔야 되는 것 아니냐”라고 반문했다.

■“집단이 아니라 개인의 결정”

국방부가 쓰겠다는 ‘종교적 신앙 등에 따른 병역거부’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말하는 영어 표현 ‘Conscientious objection’의 뜻을 제대로 담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있다. 이 표현은 개인이 스스로의 양심에 따라 고유하게 내린 결정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종교나 특정 단체 등 집단이 내린 결정이 아니다.

실제로 양심적 병역거부가 이뤄지는 형태를 봐도 그렇다. 병역거부를 하게 되는 근본은 종교 그 자체가 아니라 종교를 통해 형성된 개인의 양심이다. 대법원이 판결에서도 말했듯이 진정한 양심적 병역거부인지 여부는 양심적 병역거부자 개인이 살아온 삶을 통해 판단한다. 여호와의증인 등 특정 종교에 귀의하고 있더라도 양심적 병역거부를 해야겠다는 개인의 양심이 형성돼있지 않으면 진정한 양심적 병역거부로 인정받을 수 없다. 대체복무제를 두는 많은 국가에서 특정 종교인이라고 무조건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해주는 게 아니라 개개인을 심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종교적 신앙 등에 따른 병역거부’는 마치 병역거부가 양심이 아니라 종교 그자체에서 비롯된 것처럼 오해될 수 있다. 이같은 오해는 결과적으로 특정 종교에 대한 혜택 등으로 양심적 병역거부의 정의를 좁힌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오랫동안 변호해온 오두진 변호사는 “Conscientious objection은 종교의 교리를 배웠지만 (그 교리가) 내 양심에 미쳐서 각자가 내린 결정이라는 뜻이 담겨있다”며 “집단적으로 계량하는 개념이 아니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갖고 있는 양심을 통한 결정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킨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8월 대법원이 연 양심적 병역거부 공개변론 때 양심적 병역거부자 처벌을 주장했던 검찰 측 참고인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조차도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용어에 대해 국민들 사이에서 많은 논란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일상용어에서 이야기하는 도덕적 양심과 법적 개념의 양심 사이의 혼동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며 “양심이라는 개념은 도덕적 정당성이 아닌 개인적 소신”이라고 말했다.

■비폭력·평화주의 병역거부는 배제?

국방부는 새 용어에서 ‘종교적 신앙’만을 명시해 그 외에 비폭력·평화주의 등에 의한 양심적 병역거부는 배제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군인권센터·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전쟁없는세상·참여연대는 국방부 발표에 대한 논평에서 “한국의 병역거부 역사에서 여호와의증인들이 병역거부자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여호와의증인이 아닌 병역거부자들도 2000년 이후 80여명에 달한다”며 “비록 소수라고 해도 이들이 양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감옥행을 택해왔고 법원의 무죄판결을 받기까지 희생해온 역사가 있는데 논란이 있는 용어라는 이유로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이어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논란을 회피하기 위한 용어 변경이 아니라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의 의미를 지속적으로 알려나가면서 논란을 불식시키는 것”이라며 “국방부의 용어 변경 결정은 즉각 취소돼야 한다”고 했다.

정부 방침과 달리 법원에서는 여전히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용어를 쓸 것으로 보인다. 같은 개념에 대해 두 개의 용어가 혼재돼 사용되는 것이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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