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화 막는 청춘의 살결물"..북 광고도 소비자 취향 저격

2019. 1. 7.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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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 '자본주의 꽃' 광고 물결..탈북민도 "놀랍다"
우리가 몰랐던 북한 ①
오랜 세월 금기시됐던 상업광고
김정은 시대 열리자 빠르게 확산
"시장화·개혁개방 보여주는 척도"
식품부터 화장품·TV·노트북까지
체제선전·외화벌이용 벗어나
품질 강조하며 영업 의욕 보여
"급속 성장하고 있는 시장 증명"
북한 기업들도 소비자들의 취향에 맞춰 다양한 광고를 선보이며 시장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북한 조선국제무역촉진위원회가 펴낸 <조선상품 2018>에 실린 광고들을 보면 여러 기업들이 화장품, 과자와 음료수, 기저귀, 텔레비전, 맥주, 의류 등 다양한 제품을 홍보하고 있다.

우리가 몰랐던 북한, 우리가 보지 않으려 했던 북한의 변화가 있었다.

북한 사람들은 3천곳(공식·비공식 포함)의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팔고, 손전화(휴대전화) 600만대를 쓰고 있다. 주요 도시마다 고급 아파트가 들어섰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현지 시찰 소식에 아파트값이 들썩인다. 도시의 외관이 바뀌고, 사람들의 생활방식과 의식이 바뀌고 있다. 자동차가 전국 각지의 시장을 잇고, ‘돈주’로 불리는 ‘미래의 자본가’ 계층이 늘고 있다.

북한의 삶이 빠르게 변하는 동안, 우리는 ‘분단’의 틀에 갇혀 그 변화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일주일에 한번 ‘우리가 몰랐던 북한’을 깊고 생생하게 살펴보려 한다. 전영선 건국대 교수, 주승현 인천대 교수, 양문수 북한대학원대 교수,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이 자문위원으로 함께한다.

“텔레비전 광고가 아직 많지는 않고 주로 국가기업의 광고가 나오지만, 포스터 형태로는 온갖 기업과 개인 상점들까지 광고를 하고 있다. 북한도 이제 자본주의 사회가 다 됐다. 주민들도 좋은 물건, 좋은 서비스 따지고, 판매자도 효과적으로 선전해야지 물건도 잘 팔리고 수익도 높다. 가게들이 경쟁을 해야 하니 광고를 한다. 평양에 있을 때 나도 가게를 했는데 관리인에게 돈을 주고 가게 건물 입구, 근처 전신주, 장마당 입구에 포스터 광고를 붙였다. 시장에 갔던 젊은이들이 광고를 보고 찾아오기도 했다.”

지난해 평양에서 남쪽으로 온 20대 북한이탈주민(탈북민) ㄱ씨의 이야기다. ‘자본주의의 꽃’ 광고가 북한을 바꾸고 있다. ‘주체의 사회주의 조선’을 자임하는 북한에서 당연히 ‘상업광고’는 오랜 세월 금기시됐다. 하지만 2012년 ‘김정은 시대’의 개막과 함께 인민의 눈과 귀를 호리려는 상업광고가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기업과 소비자가 시장의 흐름에 몸을 싣고 빠르게 변한다.

깐깐해진 북한 소비자들 “산이 막든 바다가 막든… 선명한 화면만 나온다”(락원기술교류사 디지털 엘이디 텔레비전 광고), “로화를 막고 청춘의 생기와 아름다움을 주는 살결물”(조선상원무역회사 스킨 광고), “죽은 정자도 소생시키는 신기한 효과!”(조선동방즉효약물개발사 비아그라 광고)… 북한 조선국제무역촉진위원회가 펴낸 <조선상품 2018>에 담긴 광고 문구다. 이 책자는 북한의 43개 기업이 생산한 상품 관련 상세 정보를 조선어와 영어, 중국어로 소개하고 있다.

이 광고 책자에는 ‘소비자 후기’도 실려 있다. “식욕이 떨어지고 밥맛이 없었는데 이 약을 쓰니 식욕이 왕성해지고 몸이 현저히 좋아졌다”(‘면역부활소-30’ 소비자), “손발이 저리고 관절 아픔이 심해 이 약을 써보았는데 아픔이 모두 없어지고 높은 계단도 자유롭게 오르고 있다”(로년청춘교갑 소비자)는 식이다.

사회주의 경제 특유의 ‘공급 중심 마인드’가 뼈에 박혀 있었던 북한 기업들이, 이제는 상품을 더 많이 팔려면 ‘소비자의 취향’을 포함한 쌍방향 소통에 귀을 열어야 하는 변화에 적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난해 여름 부인 리설주 여사와 함께 “‘봄향기’ 화장품으로 명성이 자자한 신의주화장품공장”을 찾아 “인민들의 호평이 대단하고 수요가 높다고 자화자찬하지 말라”며 “기호품으로서의 특색”을 살리라고 ‘교시’했다고 <노동신문> 등이 전했다. ‘깐깐해진’ 북한 소비자의 취향과 선호를 중시하라는 지침이다. 전영선 건국대 교수는 “김정은 체제 들어서 ‘인민생활 제일주의’라는 개념이 등장했다”며 “인민생활을 강조하는 대목은 생산구조를 기존 중공업 중심에서 소비재 쪽으로 전환하려는 취지로 읽힌다”고 짚었다.

락원무역회사의 맥주 광고

품목도 형식도 진화하는 광고 북한의 변화에 주목하고 있는 북한이탈주민 ㄴ씨(30)는 최근 북한의 다양한 상품광고를 본 뒤 깜짝 놀랐다. “얼마 전까지 북한의 광고는 신문 한켠에 흑백 문구로 “○○미용실”이라고 표기하는 식으로 매우 제한적이었는데, 이제는 광고 포스터에 그림이 들어가고 색감이나 글씨체 자체가 화려해지고 촌스러움이 줄었다.” ㄴ씨는 “노래방 증폭기 같은 것까지 광고하는 게 신기하다. 얇은 엘이디 텔레비전이라든지, 블루투스 이어폰까지 다양한 제품이 새로 등장하고 거기 연동돼 광고가 많이 생겨난 것 같다. 북한에 중국 제품이 많이 퍼져 있는데 국산 제품이 밀려나는 걸 우려해서 광고를 더 열심히 만드는 게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2016년 함경북도에서 남쪽으로 온 탈북민 ㄷ씨에게도 요즘 북한은 신기하다. “2015년에는 텔레비전 뉴스에서 약품이나 아리랑 손전화 새 제품 소개를 본 적은 있지만 광고는 아니었다. 화장품 시장에 가면 판매원이 소개해주는 게 전부였고 인기 있다고 하면 그런 줄 알고 샀다. 요즘 나왔다는 화장품 광고나 노트북 광고는 너무 새롭다.”

실제로 최근 북한의 경제 관련 학술 전문지 <경제연구>(2018년 2호)에는 ‘상품광고사업에서 나서는 원칙’이라는 제목의 논문이 실렸다. ‘주체경제’를 논해야 할 학술지에 ‘어떻게 하면 광고를 잘할까’를 다룬 논문이 실린 것은 과거 김일성, 김정일 시대에는 없던 현상이다. 논문은 “상품광고도안을 한번 만들어 10년, 20년 우려먹을 생각을 하지 말고 계속 특색있는 것으로 갱신하여야 한다”고 주문한다.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북한 기업들이 화려하고 눈에 띄는 포장과 광고를 활용해 소비자들에게 물건을 적극적으로 팔겠다는 의욕을 보이는 대목은 큰 변화”라고 말한다.

탈북민으로 북한 사회와 분단 문제를 연구하는 주승현 인천대 교수는 “처음에는 ‘북한도 광고를 한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보이기 위한 광고였고, 두번째 단계로 외화벌이, 관광유치용 광고가 등장했다. 세번째 단계인 북한 주민 대상 광고는 2년 전쯤 시작됐고 본격화된 것은 2018년부터”라고 설명했다. 주 교수는 “광고라는 개념 자체가 이전까지 북한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주민들은 광고라는 새로운 경험을 ‘생활이 나아질 것이고 미래가 있다’는 희망의 표시로 본다. 김정은 시기 이후에 일어난 변화이기 때문에 김정은에 대한 기대도 커진다”고 말했다.

북한에서 상업광고가 점점 더 다양해지는 추세는 북한에서 ‘시장’이 급속히 성장하고 있음을 증명해준다. 북한 경제 전문가인 양문수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광고가 “북한의 시장화, 개혁·개방의 수준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라고 강조했다.

북한에서 시장경제가 발전하면서 ‘자본주의의 꽃’ 광고가 소비자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조선상품 2018>에 실린 운하대성무역회사의 과자 등 식품 관련 광고.

티브이에도, 거리에도 광고, 광고, 광고! 사회주의 선전선동의 핵심 수단이던 텔레비전 방송에도 광고가 늘고 있다. 뉴스 방송 뒤 프로그램 마지막에 상품 소개 코너에서 30초 동안 정지화면과 음악을 내보내는 방식으로 2~3개 상품을 광고한다. 한방약, 화장품, 식품 등 일상 소비재와 비교적 고가품인 텔레비전을 비롯한 생활가전제품 광고가 많다. 인민의 소비 여력이 높아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공장이나 기업소 방문 형식의 5~10분짜리 다큐멘터리 광고도 이전과 달리 정치·사상적 체제선전 내용은 뒤로 빠지고 상품 품질과 함께 소비자 체험기·사용후기가 전면에 배치되는 식으로 변화하고 있다.

북한 매체 <조선의 오늘>에 나온 텔레비전 광고를 분석한 김민관 케이디비(KDB)산업은행 통일사업부 부부장은 ‘북한의 TV광고 활용 현황과 시사점’(2018년 5월)이란 보고서에서 “대동강종합과일가공공장, 락연식료공장 등 식품류와 여명거리상점, 봉남양복점 등 유통 관련 광고의 비중이 높은 편”이라며 “류경장미원(오락), 림승마구락부(오락), 고려항공(운수) 등 서비스업도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고 밝혔다. 분석을 보면 2017년 7월부터 지난해 5월까지 <조선의 오늘>에 나온 텔레비전 광고는 뉴스 형식이 53건, 다큐멘터리 형식이 20건이었다.

‘혁명의 수도’로 불리는 평양 거리에도 상업광고가 조금씩 늘고 있다. 2016년 4월 평양에서 열린 국제마라톤대회 경기장 곳곳에는 후원기업의 상업광고가 붙었다. 후원사인 ‘고려인삼회사’는 경기장 안팎에 광고판을 설치하고 선수 번호가 적힌 유니폼에도 회사 이름을 새겼고, 대회 기간에 인삼음료 샘플을 나눠주는 시음 이벤트를 진행했다. 평양 지하철 역사에 설치된 스크린 화면을 통해서도 광고가 나온다고 전문가들은 전한다.

다만 <경제연구>는 북한의 상품광고는 “상품의 쓸모와 리용방법, 구매조건 등을 사람들에게 안내소개하는 상업봉사”라며 “겉모양은 번쩍거리지만 인민들의 생활과 동떨어진 것이 많은” 자본주의 상품광고와 다르다고 선을 긋는다. ‘사회주의 경제’ 공식 이데올로기와 시장경제라는 새로운 현실 사이의 고심일까.

노지원 박민희 기자 z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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